저녁 때 힘 빠진 햇빛이 옷자락처럼 펄럭이다 산기슭 조릿대에 한 냥 남았다 살강의 희미한 실금이 앉은 쌍희(囍)자문 밥그릇에 고여든 하루가 염출한 허기 밀 익는 소리 들리는 새벽 같은 붉은 저녁은 저 멀리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시 2015.06.07
푸른 구법(求法) 어둠 속 유랑하는 물들이 끼리끼리 낯 선 채 누구나 있을 과거나 경력은 생략하고 건내는 명함 함께 오르는 입신의 경지 장송(長松)의 금이 간 마른 논에 푸른 물 풀었다 왕성한 삼투압으로 우듬지까지 무장한 그들의 실핏줄 나는 본다, 이 봄날 폐부를 찌를만한 저 바늘 끝 그길 오르막을.. 시 2015.06.05
수선화 가지런한 흰 치아 드러내고 노란 목젖으로 바래길 옆에서 가부좌 튼 어혈이 확 풀리는 설핏한 향기 까무룩 졸고 있는 격자창에 걸린 가녀린 매무새 그 순하디 순한 열 여덟의 순정. 시 2015.06.05
절 고양이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보니 비만한 고양이가 다람쥐를 뜯고 있다 반만 남은 사체를 뺏을려고 쫓아갔더니 피 묻은 입 쓱 문지른 그 녀석 날 노려보며 산 중에서 배고픈 중생들끼리 뭘 그래? 시 2015.06.04
미나리 컴컴한 수채에서 푸른 순이 돋을 줄 줄기가 바로 설 때까지 온갖 오물 뒤집어쓰고 그 일념 한 생을 지냈다 새끼들 뻗어나가고 줄기 싹둑 잘려나간 뿌리는 초원을 동경했을지도 세상을 다 이고 있는 저 튼실한 뿌리 위대한 모성이여. 시 2015.06.04
찐만두 속 꽉 채우고 찜질방 다녀오더니 속살 비치는 옷 입고 윤기 흐르는 백옥같은 피부 부끄러운 듯 엉덩이 내밀며 잡수라고 무장해제된 결코 사전에 만개란 없는 꽃. 시 2015.05.29
노량리 버스정류장 마른 햇빛이 염하듯 엉겨드는 들판에 누운 길의 어디쯤 한줄기 바람에 멱살 잡힌 간판은 기울고 가로수가 깁스하고 목발 짚은 그 어귀 하드 막대기에 달라붙은 개미 옆구리 접질린 가로등 누가 내다 버린 찢어진 소파 그 위 권속(眷屬)으로 “고소득 보장 홀서빙” 혼자 있기 거북한 실핏.. 시 2015.05.29
쌀 한 포대 농사짓는 여성이 손수 지은 쌀을 보내왔다 도정기에서 5분도로 막 나온 실한 날것들이 인심 가득하게 거실에서 누워 인사를 하니 묘한 표정의 집사람 생살 돋는 평생의 허기가 까무룩 지나가는 밥할 무렵. 시 2015.05.29
부엌풍경 그을린 천정이 내려다보는 보리깜부기 어둠 속에서 삘기 색 밥풀이 눈물로 떨어지는 식어가는 재 위의 가마솥에서 붙인 시룻번 같은 어머니 땀자국 밴 침침한 무명 치마 뭐라도 삼킬 듯 아가리 벌리고 있는 아궁이 삽짝문에 누가 왔나 내다보는 복福자가 새겨진 금간 사발 몇 개와 간장.. 시 2015.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