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배사.日本 島流し物語

유배지 문화발전에 공헌한 고노에 노부타다

책향1 2012. 2. 3. 10:44

유배지 문화발전에 공헌한 고노에 노부타다



고노에 노부타다(近衞信尹. 1565~1614.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 관료)로 사키히사(前久)의 아들이다. 호가 산먀쿠인(三藐院)으로 시, 작곡, 서예에 능했으며 화풍이 고노에류(近衛流)로 불렸고 “간에이(寛永) 3필”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관료들과 좋은 사이를 만들 기회가 많았으므로 무사들에게 일종의 동경심이 있었다.

157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이름 중에 “信”한자를 빌려 자신의 이름을 만들었다. 1585년 좌대신이 되고, 당시 후지와라 일족 이외에 타성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조카인 히데쓰구(秀次)밖에 없었지만 도요토미의 간바쿠(関白. 왕 대신 정치를 하는 최고위직. 일러두기 참조) 취임했다. 간바쿠를 내심 노리던 기쿠데이 하루스에(菊亭晴季. 1539~1617)와 담론을 벌였지만 그가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문제제기의 빌미만 주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히데쓰구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싶은 내심을 숨기지 않자 1592년 좌대신을 사임했다.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침략군을 만드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해 자신도 조선으로 넘어가기 위해 교토를 출발했지만 히젠노구니(肥前)의 나고야(名護屋)에 머물렀다. 관료로서 자유분방하여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 기쿠데이 하루스에 (菊亭晴季.きくてい はるすえ. 1539~1617. 에도 시대의 관리)와의 담론 끝에 일당의 참언이 있었기 때문에 고요제이(後陽成..1571~1617, 일본의 제107대 왕) 왕의 명령에 의해 사쓰마 지역 보노쓰(坊津. 현재의 남사쓰마 시 일대. 대륙과 가까워 견당사 등이 출발하던 “가라(唐)항구”로도 불렸다. )로 3년 간 유배 가게 되었다.

 현재의 류간지(龍巌寺)에서 체재하며 분산되어 머무르며 근처 명승을 답사했다.

 와카 「보노쓰 팔경(坊津八景)」을 쓰기도 하고, 인근 주민들과 친해져 서화 등을 가르치기도 하며 가을 철 풍년제에 참석하여 당대 일류 문화인으로서 교토의 문화를 전파하여 지역 발전에 이바지했다.

 가고시마(鹿児島) 지역의 대표적인 민요인 “한야부시(繁栄節)의 작자로 전해진다. 여기서 그는 「코고모리 팔경(鹿籠八景)」 등의 와카를 지었다. 팔경에 대하여 각 한 수의 시가 있고 아래 시는 네 번째 시이다.


深浦の夕立

夕立に風吹きくれば深浦の波にえならじひとむらの鐘


 후카우라의 석양

석양에 강한 비바람과 파도소리로 가까운 절의 종소리도 들을 수 없네

*夕立(유다치)는 여름 철 오후부터 저녁 무렵까지 일상적으로 보이 날씨.


당대의 중앙의 일류 문화인으로 서예에 눈을 뜨고 가고시마의 대표적인 민요 「한야부시(繁栄節)」의 작자이기도 하다. 유배 중 신세 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 중 “信” 자를 주기도 했다.

현재 당시의 유배처 근처는 고노에 공원이 되었고 후손에 의해 비석이 세워졌다.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의 환대로, 교토로 돌아가야 할 무렵에는 이미 1, 2년 더 있고 싶다는 편지를 남길 정도였다

1596년 칙허에 의해 교토로 돌아왔다.1600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 종군했지만 패배하고 비밀리에 시마즈의 가신들을 비호했으므로 일행은 무사히 마쿠라자키(枕崎. 현 마쿠라자키 시)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패장 오시가와 고이에(押川強兵衛. 필자주; 오시가와 기미치카(押川公近가 본명. 1598년 사천성 전투에서 철포를 사용했다)도 전투에 패해 시마즈가 도망 왔지만 고노에 집에서 보호를 받고 무사히 사쓰마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는 시마즈와 도쿠가와 가문의 교섭을 중개하고 영지를 확정적으로 받았다.

그는 편지를 비롯한 많은 필적을 남겨두고 있지만, 그 강력한 필선은 묵직하며 호쾌하여, 인품을 잘 표현했다고 한다. 사쓰마 체재 중 지역의 문화발전과 평화에 크게 이바지 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그의 아버지 역시 시마쓰 가와 도쿠가와 가의 교섭을 중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쓰로 부터 영지를 확약 받았다. 두 부자의 사쓰마 지역 평화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1605년 염원하던 간바쿠가 되고, 50세로 1614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