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후지와라노 모로나가의 유배
후지와라노 노로나가(藤原師長. 1138~1192)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관료로 호겐의 난(保元の亂)의 주모자였던 좌대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인 실권자 후지와라노 타다자네(藤原忠実)의 양자가 되어 출세 가도를 달렸다.
1151년 14세의 나이로 참의(参議)로 관료대열에 올랐다. 1156년 아버지인 요리나가가 스도쿠 상왕(崇徳上皇)과 손을 잡고 호겐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죽는 바람에 연좌되어 관위를 박탈당하고 사도노구니로 유배 처분을 받았다.
양부이자 할아버지인 타다자네에게 입산할 것을 알렸으나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란 말에 설득되어 그만 두었다.
1164년 사면되어 교토로 돌아와 복권되고 고시라가와 상왕 측근에서 활약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177년 종1위의 태정대신으로 승진했다.
헤이케(平家)의 부상에 따라 충돌이 야기되는 가운데 1179년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의 반란(治承三年の政変)이 일어나자 실권을 장악한 기요모리에 의해 해직되고 오와리노구니(尾張国. 현재 아이치<愛知> 현 서부일원)으로 또다시 유배처분을 받았다.
유배 중 그는 출가하여 스스로 리카쿠(理覚)라 칭했다. 3년 후인 유배에서 풀려나 1192년 55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관료로서 정치적인 업적은 부족하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학술적인 소질이 훌륭했다.
당대의 석학으로 불린 아버지와의 논쟁을 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나 여러 주요 행사의 의식 절차 등을 기록하기도 했다.
아악(雅楽)에서 미나모토노 히로마사(源博雅. 918~980. 헤이안 시대의 유명 음악가)와 어께를 겨룬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였다.
악기 중에 소(箏. 일본 전통 현악기 중의 하나. 쟁. 고토<琴>로도 불린다)나 비와(琵琶. 비파. 동아시아 현악기 중의 하나)의 명인으로 알려지고 당시에 유행했던 가구라(神楽. 신사 등에서 신에게 받치는 무용이나 음악), 로에(朗詠. 일본 가곡의 한 형식) 등에도 정통했다 한다.
음악에 관한 글로 「산고요로쿠(三五要録)」를 남겼다. 특히 음악가들의 수호신이라 여기던 묘음보살을 독실하게 모신 사실은 묘온인(妙音院)이란 그의 아호에서도 알 수 있다.
19세의 그가 젊은 나이로 사도로 유배 무렵 그의 악기 솜씨에 반해 가인이 된 제자 미나모토노 고레모리(源惟盛)과의 이별을 노래한 시가 남아있다. 그에게 소의 연주비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비밀리에 남송에서 건너온 음악을 배우려던 뜻을 굽히지 않아 스마(須磨. 현 고베시의 스마 구)에서 무라카미(村上. 926~987. 제62대 일본 왕) 왕의 령을 받들어 비파를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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