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승려 쥰칸의 유배
쥰칸(俊寛. 1143~1179)은 헤이안 시대 후기의 일본 진언종(真言宗)의 승려.
1177년 6월 세상은 헤이케(平家)의 전성시대로 권세가 극에 달한 시기에 쥰칸의 별장인 교토 시시가다니소(鹿ヶ谷荘. 현재 교토시 사이교<在京> 구)에서 고시라가와 친왕 등이 모여 헤이케 정권 타도 음모를 꾸몄다. 그는 고시라가와의 측근이었다.
후지와라노 나리치카(藤原成親. 1138~1177. 헤이안 시대 말기의 관료)는 마쓰노 마에(松の前), 쓰루노 마에(鶴の前)라는 두 명의 덴죠와라와(殿上童. 성인식을 거치기 전에 작법 등을 배우기 위해 궁궐 등을 드나들던 사람)을 이용해 쥰칸을 가담시켰다고 한다.
마쓰노 마에는 미인이지만 애정이 부족한 여자이고, 쓰루노 마에는 미인이지만 애정이 넘치는 여자였다. 나리치카는 두 명을 쥰칸의 술 상대를 시킨 결과 쓰루노에게 마음을 주고 여아를 임신시켰다. 쓰루노에게 마음을 빼앗긴 쥰칸이 결국 모반 가담에 동의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미나모토노 유키쓰나(源行綱)가 이 음모 사실을 집권자인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에게 밀고해 버렸다. 이에 격분한 기요모리는 음모를 기획한 쥰칸, 후지와라노 나리쓰네(藤原成経), 다이라노 야스요리(平康頼)를 사쓰마노구니(薩摩国) 기카이가시마(鬼界ヶ島)에 유배 보냈다.
3인이 유배를 떠난 이듬해 기요모리의 차녀인 다카구라 노리히토(高倉憲仁. 제80대 왕)의 중궁(中宮) 노리코(徳子)의 회임(懷妊)을 기념하여 유배자들에게 사면을 지시했다.
사면장을 가지고 온 사신이 섬에 도착하였지만 그 사면장에 쥰칸은 제외되어 있었다. 아연실색한 쥰칸을 제외한 두 사람을 싣고 사신은 빨리 섬을 떠나려 했다.
그는 떠나는 배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애원했지만 사신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때 쥰칸은 물가에 쓰러져 갓난아이처럼 울고 배 떠난 곳을 바라보며 밤을 새웠다 한다.
쥰칸이 섬에 남겨진 반년 후인 1179년 쥰칸을 유배 전에 시중들던 동자 아리오(有王)가 찾아왔다. 많이 변한 모습의 쥰칸과 대면했다.
가족 소식을 물은 쥰칸에게 아리오는 아내 기타노가다(北の方)도 아들 와가기미(若君)도 이미 죽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딸인 히메기미(姫君)만이 숙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전하며 딸의 편지를 건넸다.
쥰칸은 딸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수치심을 참고, 지금까지 살아 온 것도 처와 자식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에 대해서는 늘 걱정이지만, 함부로 살며, 딸에게 언제까지나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의 정이 아니다"고 아리오에게 말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했다.
그날부터 쥰칸은 일절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단지 염불만 외우면서 비극적인 일생을 마쳤다. 그의 유골을 아리오가 수습하여 되돌아 왔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1995년 5월 이오지마(硫黄島)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쥰칸의 동상이 세워졌다. 현재 기카이가시마는 어느 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오지마는 화산에 의해 유황이 분출하여 바다를 물들인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사실(史實)에 모티브를 두고 초기 소설을 많이 발표한 천재 소설가 아쿠다카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1922년 작 소설「俊寛」과 일본 노(能)를 대성시킨 제아미(世阿弥. 다른 쪽 참조)의 노「俊寛」이 있다.
아래 사진은 그가 유배 중 거주 했다는 이와지시마(硫黃島)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쥰칸 상 모습. http://www.minc.ne.jp/~hotei/syunkanzo.jpg에서 인용. 20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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