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성 전투의 우쓰노미야 쿠니쓰나(宇都宮国綱)
우쓰노미야 쿠니쓰나(宇都宮国綱. 1568~1608.다이묘)는 1576년 아버지 히로쓰나(広綱)의 죽음으로 22대 우쓰노미야 씨족을 계승하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적대적인 호족들이 많앗고 後北条이 번을 침략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그는 여러 다이묘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손을 잡게 되었다.
번내 여러 성들이 침략을 받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힘들어지자 도요토미의 협력만을 바랐다.
1590년 도요토미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 참전한 공으로 18만석의 영지를 얻었다 그 후 도요토미를 따라 임진왜란에 참여 하게 된다.
1597년 돌연 도요토미의 명령에 의해 가이에키되고 사위인 히젠노구니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68~1608. 무장으로 정유재란에 남원성을 공격하고 전라도 충청도를 석권했다고 하며 순천성을 축조. 우키다 요시이에 편 참조)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쿠니쓰나의 후사가 없었기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의 3남을 양자로 하려 했지만 동생인 하가 다카타케(芳賀高武. 1572~1612)의 맹반대에 직면하자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이와 간련된 참언에 의해 가이에키되었다고 한다.
그 후 쿠니쓰나는 도요토미로부터 “조선에서의 공적이 있었으므로 재건을 허한다”는 말을 듣고 정유재란에 참전한다. 순천성에서 무공을 세웠지만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재건은 물거품이 되었다.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 1607년 에도의 아사쿠사(浅草)에서 40세에 실의를 품고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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