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살해하려한 딸 때문에 유배 간 두 여인
신자이모쿠마치(新材木町)에 시라기야(白木屋)라는 큰 상점이 있었다. 주인은 시라기야 쇼사부로(白木屋正三郎)이고 처는 오죠(お常)로 둘 사이에는 딸 오구마(お熊)가 있었다. 쇼사부로는 가게의 장사에 열중하여 집안일은 모두 처에게 맡겨 놓았다.
그런 상황을 좋은 기회로 삼은 오죠는 늘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어제는 우에노의 꽃놀이, 오늘은 뱃놀이, 내일은 연극 구경과 유람을 제멋대로 하고 지냈다.
딸인 오구마는 괜찮은 미모로 이런 어머니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역시 섹시하고 정조관념이 전혀 없었다. 어느 날 주시치(忠七)라는 데다이(手代. 농정을 보는 하급 관리)와 깊은 사이가 되었다.
그런 일에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사람들은 "오구마도 이제 나이가 찼으므로 데릴사위를 맞이하여 가게의 기반을 다져 보지 않을래?" 라며 쇼사부로 부부에게 조언했다
가게 운영이 매우 어려운 가운데 오죠는 사치가 너무 심했다. 따라서 곳곳에 빚도 많고 속사정은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가게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부부는 "결혼 지참금이 많으면 데릴사위도 좋다"고 했다.
중매하는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오덴마(大伝馬)쵸의 부잣집 출신으로 결혼 지참금 500량을 갖고 온 마타시로(又四郞)를 사위로 결정하였다.
이것을 알고 난 딸과 주시치는 도망칠까도 궁리했지만, 가게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마타시로와 오구마는 축하를 받으며 부부가 되었지만 그녀와 주시치의 밀애는 지속되었다. 또 주인인 아버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오구마의 호화생활 역시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마타시로와 오구마 사이에 아이도 생겼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은 "주시치의 맏아들이다."라며 쑥덕댔다.
오구마는 남편 마타시로가 싫어서 견딜 수 없어 어머니에게 이혼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혼하면 지참금을 반환해야 하므로 주시치는 지혜를 짜냈다.
"마타시로를 비밀리에 살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병사라고하면 지참금을 반환하지 않아도 되고 그 후에 주시치와 아무런 방해 없이 부부가 될 수 있다"
주시치는 오구마, 오죠, 하녀 오히사(お久) 네 명이 모여 모의를 했다. 오히사는 원래 주시치와 오구마 사이의 만남을 주선 해온 하녀였다. 그들은 오기쿠(お菊)라는 젊은 하녀를 불러와 설득하며 일을 꾸몄다.
"야, 마타시로 님의 침실에 숨어 들어가 이 면도칼로 조금만 상처를 줘"
처음에는 오기쿠도 새파랗게 질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고 단번에 거절했지만
네 사람은 모두 그녀를 설득했다.
"작은 상처뿐이다. 면도칼로 손끝에 조금 피가 나오게 하는 거다. 장난이야. 잘 해 주면, 나중에 금과 옷을 줄게"
네 사람에게 설득당한 오기쿠는 결국 "조금만 상처를 줄 뿐이라면"하고 제의를 받아들였다.
실제로는 오기쿠가 마타시로에게 상처를 입히자 말자 네 명이 쳐들어가 두 명 모두를 살해 해버리려는 계획이었다.
어느 날 밤 오기쿠가 마타시로 침실로 몰래 들어가 목 주변을 찔렀다. 놀란 그가 일어나 그녀를 잡고 “누군가 사람을 불러주게”며 큰 소리를 지르자 종 한명이 마을에 알리고 곧 주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사정을 알고 마을 내에서 조용히 하려 했으나 마타시로 집안에서 용납하지 않았다. 기관에 제소가 이루어지고 사건은 공적인 일이 되어 관계자들이 소환되었다.
1272년 13월 7일 하녀 오기쿠 사형(18세), 하녀 오히사는 마을돌림(마을에서 말에 태우거나 끌고 다니며 창피를 주는 일) 후 사형, 오구마는 마을돌림 후 사형(23세), 주시치는 마을돌림 후 투옥, 오죠는 이즈로 엔도(遠島)형(49세), 쇼사부로(正三郎)는 에도에서 추방이 결정됐다.
처형 당일 오구마의 옷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밧줄에 묶여 말에 태워진 그녀는 시로무구(白無垢. 신전 등에서 입는 흰 신부 옷)의 나카기(中着. 기모노의 상의와 하의 중간에 걸치는 옷) 위에 기하치죠(黄八丈. 하치죠시마에서 나는 식물로 염색한 비단. 당시 고급 옷)를 입은 화려한 모습이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옷소매에는 수정 염주가 걸려 있고 입으로는 나무묘법연화경을 외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피해자가 죽지 않았음에도 3명이 사형된 사실은 다소 과중한 형벌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오히사의 사형이 그러하나 간통에 조력했다는 이유가 괘씸했기 때문이고 전반적으로 일본에서 엄격한 주인을 해하려한 봉공인의 하극상이라는 중죄 때문이라 보인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일본의 대표적인 악녀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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