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남해읍 인물편

책향1 2010. 2. 7. 11:24

  남해읍 인물편


남해읍 독립 유공자


\1. 강한문(姜漢文)


1871년 2월 10일 북변리에서 태어나 48세이던 1919년 4월 4일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에 주도하였다. 이미 하루 전 이예모, 정순조, 정학순 등의 주도로 설천리 남양리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있었으므로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사기가 높았다. 남양리에서 남해읍까지의 시위행진 도중 당시 고현면장의 밀고 등으로 포기하고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재거사를 하기로 계획했다. 당일 아침 일찍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시장으로 나오고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불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시위에 참석한 군중들이 약속한 신호에 따라 가슴속에 숨겨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군청, 우체국, 경찰 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 간부들의 모자나 대검을 빼앗기도 하였다. 군중의 위세에 눌린 일제 경찰들이 당황하자 고현면장은 다시 인근 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날이 어두워 자진 해산하려던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이어리에 있던 그의 집을 파괴하고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어 1919년 8월 27일 당시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1982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 김희조(金喜祚)


1871년 6월 11일 아산리에서 길이(吉伊)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4월 4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이예모, 정순조, 정학순,정몽호, 윤주순 등의 주동으로 4월 3일 설천면 남양리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 주민들의 사기가 높았다. 남해읍으로의 진출 계획이 중도에 당시 고현면장의 밀고와 해가 저물어 포기하고 다음날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계획했다. 4월 4일 아침 일찍 장꾼으로 가장하여 시장으로 나온 그는 1천여 명으로 불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시위 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일제히 가슴속에 숨겨온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군청, 우체국, 경찰 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고 경찰들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서의 경찰들이 당황하자 당시 고현 면장 김치곤은 인근 사천경찰서에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했으나 김치관의 이런 소행을 듣고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어 1919년 8월 7일 당시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1982년 대통령포창과 1990년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원복생(元福生)


1892년 6월 17일 북변리에서 세은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4월 4일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예모,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씨 등의 조동으로 4월 3일 설천면 남양리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으므로 주민들의 사기가 어느 때보다 놀았다.이날의 독립운동은 날도 저물고 고현면장 김치곤의 밀고도 있고 남해읍까지의 시위행진은 중도에 포기하고 다음날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재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장터로 나갔다. 장꾼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 전날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온 태극기를 꺼내 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군청,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 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 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해산하려다 김치관의 이러한 소행을 듣고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1919년 9월 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83년 대통령 포창과 1990년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5.정용교(鄭鎔交)


1885년 4월 23일 북변리 600번지에서 임기 씨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 4월 3,4일의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의 독립만세운동은 설천면 문의리의 이예모 지사가 1919년 4월 2일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고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지사를 만나면서 계획되었다. 4월 3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인근 마을에 계획을 알리고 그도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많은 군중이 남양리 노상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해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 대열이 고현면에 이르자 당시 면장 김치관은 시위 군중들의 위세에 놀라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알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이러한 밀고 사실을 안 시위대는 다음날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운동을 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장꾼으로 가장한 그는 아침 일찍 남해읍 장터로 나갔다. 장꾼이 1천여 명으로 불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 시위에 참여 했던 시위 군중이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시위군중은 군청, 우체국, 하교, 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 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 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 같은 소행을 듣고 이어리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어 1919년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박진평(朴晉平) 


1876년 박유근 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회적으로 격동기에 숭문 예학의 가풍에 따라 사회 여러 분야에 봉사 정신을 발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남해 충렬사 중건에 힘쓰고 경내를 정비하고 그 해 중건비를 세웠다. 1950년 11월에는 충렬사 숙직사를 건립하였고 선소항의 도로와 방파제 공사에 많은 의연금을 희사하여 선소리 입구에 “박진평 시혜비”가 있다. 당시의 운행선 조합에 소속되어 선소와 미조, 삼천포 간을 운행하던 망운산 호와 여수와 부산 간을 운행하던 강진호를 남해군에 기증하여 지역의 경제 발전에 많은 공헌이 있다. 또한, 2차 대전 중이던 1945년 8월 7일 망운산 옥조봉 아래 B-24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11명의 미군 장병의 유해를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일을 지휘하고, 기념탑을 세우기 위해 1947년 “연합군경조기념탑건설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았다. 그의 후원으로 1956년 5월 높이 3.8m의 기념비를 세우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새겨졌고 하단부에는 영문으로 비명이 있다. 또한 그는 1952년 4월 10일 효성이 지극하였던 교우 김백렬 선생의 효행록을 기록하여 후세에 인륜지도를 본받고 칭송받도록 하는 등 사회의 건전한 정신문화 발전에도 노력하였다. 남해군 외의 업적으로는 경주시 오릉과 안압지, 석굴암과 밀양의 밀성재를 찾아 현지조사를 했다. 밀양시 내일동 331번지 소재 밀성재(密城齋)는 그의 시조로 29세손인 신라 경명왕 8왕자 중의 한명으로 밀양에 살았으며 자손인 욱(郁)의 소상(塑像)을 봉안하는 곳으로 익성사가 있고 소상을 옮길 때 “남해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상을 섬기는 정성을 다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시 탑동의 오릉 경내에 있는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의 중수에도 참여하여 숭덕전 중수비에 이름이 들어있다. 석굴암과 안압지에도 시혜비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찾을 수가 없다. 1929년 4월 8일 대한독립촉성 국민회의 남해지부에 의연금으로 15만환을 납입하여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조하였다.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한 봉사를 직접 실천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일반


정치




\62.곽동의(郭東儀)  재일 정치인


곽동의 한통련 상임고문은 1930년 남해읍 북변리에서 태어나 1943년 남해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사범학교와 진주농림학교(진주산업대의 전신)를 나와 1948년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때 재일대한반공반공청년단 중앙본부 부단장을 지낸 반공청년이었지만 재일대한청년단 중앙단장 시절 5.16 쿠테타로 조국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반군정선언'을 하여 입국금지 대상이 되었다. 그 후 1973년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초대의장 김대중 전 대통령)일본본부 결성에 참여해 조직국장과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그 뒤 '김대중 납치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김 전 대통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일본에서 활발한 구명운동을 벌인 바 있다. 곽 고문은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을 확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1989년에 출범한 한통련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돼 2004년 2월까지 의장을 맡아왔다. 그러나 곽 고문은 1978년 한민통 조직국장 시절 한민통이 '김정사 간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부터 한국 사법당국에 의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 됐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내 란음모 사건' 당시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북의 간첩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한통련을 대표하는 그는 4.19 직후 한국을 다녀간 뒤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을 시작으로 반독재 민주화와 조국통일에 앞장서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러한 곽 고문의 인생역정은 재일교포 활동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4, 김영우 재경읍향우회 4대 총무 박희태 국회의원보좌관20년


약 20여 년 간 박희태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지냈고 방음벽 전문 생산과 토목공사 전문 업체인 2006년 6월 30일 해송건설을 인수하여 경영인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재경향우회 4대 총무로 고향 사랑과 향우회 발전을 노력 하고 있다.


 

70,   김영조 (金永助) 경상남도 도의회부의장  011-776-2367


 1937년 북변리 300번지에서 태어나 1950년 남해초등학교와 1953년 남해중학교를 거처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이동중학교와 남해고등학교 교사를 재임했고, 경남 흥업부사장, 남해군 새마을금고 이사장, 신용협동조합 창립이사장을 역임하고 라이온스클럽회장으로 사회 봉사활동에 성의를 다했다. 현재 남해중학교 총동창회 회장이고 2004년 7월 6일 제7대 경남도 의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제4차 지방동시선거 경상남도 도의원 남해1선거구(남해읍, 서면)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경제환경문화위원회 소속이다. 제6, 7대 경남도의회 의원을 지냈고 경상남도 도정 자문의원이고 남해읍발전협의회 회장이다.

 





69, 김영태 현 군의회 의장


1944년 8월 7일 북변리에서 출생하였다.

1956년 남해초등학교와 1958년 대신중학교, 1960년 동아고등학교를 거처 1965년 동아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최장수 한나라당 남해지구당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남해청실회와 남해산악회 회장, 남해군 씨름협회 회장, 남해새마을 금고 이사장을 지내며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현재 바르게살기 운동협의회 남해군 부회장으로 있으며 2006년 5월 31일 제4차 동시지방선거에서 남해군의회 의원 서거에서 가 지역구(남해읍, 서면)에서 한나당 공천으로 당선되었다. 남해군의회는 2006년 7월 1일 제127차 임시회를 열었고 그는 제5대 남해군의회 전반기 의장에 선출되었다. 청렴하며 항상 온화하고 합립적인 성품으로 남해읍이 행정,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 소도읍 종합 육성사업 선정과 상설시장 현대화 사업시행, 도시계획도로 개설과 간선도로 정비 등 남해읍 발전의 획기적 기틀을 다지고  앞으로 대형 버스 주차장 조성 , 유배 문학관 건립으로 관광객의 시내 유입을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의 전기를 마련을 위하여 남해읍이 우리군의 모든 중추적 기능의 센터로 확실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스포츠 마케팅의 전진기지 서면은 스포츠 파크를 포함한 주변의 스포츠 레저 인프라를 토대로 각종대회 및 전지 훈련팀 유치는 물론 해양스포츠를 포함 스포츠 마케팅의 종목 확대로 스포츠 레저 인구를 유입해 지역민의 소득향상에  관광과 농어촌 체험 등을 통한 복합 산업을 육성하여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우리 지역의 특산물인 마늘과 시금치 등의 농산물 가공공장을 유치하며 남해읍과 서면이 한축으로 동시 발전 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고 노년층, 장애인, 농, 어업인 등 소외계층의 권익신장과 복지증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20,김욱태 (金煜泰)  광포 전 관세청장, 국민은행장


 1934년 7월 26일 평리 947번지 광포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961년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60년 국무원 사무처에 첫 공직 입문한 이래, 1964년부터 1969년    까지 재무부의 세관국 지도과, 총무과, 법무관으로 재임했다. 1970년 재무부 세관국 수입과장과 세무국장, 1971년 관세청 감사담당관, 1972년 수입국장, 1974년 관세청 기획관리관 1975년 서울 세관장, 1976년 재무부 관세국장, 1979년 관세청 차장, 1981년4월부터  1986년 8월까지 제4대 관세청 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1986년 10월부터  1988년 까지 국민은행 은행장 1988년부터 1992년 까지 전국투자금융협회 회장, 1995년 7월부터 관세청 출신의 모임인 사단법인 관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관세청에서 재임 중 우리나라 관세 행정의 달인으로 자타의 공인을 받았으며 고향발전과 후배들의 진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99년 12월에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는 『무역과 관세』가 있고, 상훈으로 홍조근정훈장(3등급)과 황조근정훈장(2등급) 등이 있다.


67. 김재기(金在奇)  제4대 남해군의회 의원,  전 기획감사실장.


1940년 1월 2일 남변리 338번지에서 태어나 1952년 남해초등학교, 1955년 남해중학교, 1958년 남해 제일고등학교를 거처 경기대학교를 수료했다. 남해읍 부읍장과 서면장, 산업과장, 새마을 과장 재무과장, 내무과장과 기획감사실장 등 군내 요직을 두루 거치고  2001년퇴임했다. 2002년 6월 13일 제3회 전국동시 지방선거에서 남해군의회 의원 선거에서 남해읍 선거구에 출마하여 행정경험론을 주창하며 당선되었다. 전반기 부의장을 역임했다.


132, 김종윤


 제9대-12대 (1982년4월 20일부터 1994년 3월 13일까지) 남해군수산업협동조합장, 1986년 8월 재임 중 제빙 냉동공장을 신축했다.


74, 김재용 (金在容) 남산리 제2대 경상남도의회 의원


남산리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早稻田)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법제학회와 경남대학교 사범 대학을 수료했으며, 부산 협성운수주식회사 서무과장과 부산공작선박주식회사 전무를 역임하고 군속으로 장기간 근속했다. 1956년 실시된 제2차 지방의회 선거 경상남도 도의회 의원선거 남해군 제1선거구에서 당선되어 제2대 경상남도의회 의원을 지냈다.



71, 김종현 (金鍾玄) 선소 제4대 경남도 도의원,  전 대통령선거인단

  

1938년 5월 7일 선소리에서 태어나  부산 육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강진수산 대표로 경영수완을 발휘했고 1981년 2월 11일 대통령을 뽑는 남해읍지역 선거인단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바르게살기운동 남해군협의회장과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제4대 새마을운동 남해군지회장, 남해육상연맹회장, 민자당중앙상무위원 민자당 소속으로  1995년 6월 27일 제1차 동시 지방선거 경상남도 도의회 도의원 선거 남해군1선거구에서 당선되어 농림수산위원장을 지냈으며 남해읍 하수종말처리장 건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72. 김준한(金準漢)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31년 1월 24일 북변리에서 태어나 1972년 12월 15일 실시된 임기 6년의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남해읍 지역에서 당선되었다. 


75, 박민섭 (朴旻燮)   제3대 경남도의회 도의원


 1920년 4월 10일 태어나 남해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1여 년 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1991년 8월 20일 실시된 제4차 지방의회선거 경상남도의회 의원 남해군 제1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제3대 경상남도 의회 의원을 지냈다.




21, 박윤경


230,박한경(朴漢慶)   전 동작구청장,

 1939년 7월 4일 경남 남해 출생 남해수산고등학교와  1968년 우석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0.  ~   .    서울시 운수과장

1981.  ~   .    서울시 사회지침담당관

1983.  ~   .    서울시 종로구청 총무국장

1984.  ~   .    서울시 강동구청 재무국장

1986.  ~   .    서울시 강동구청 총무국장

1989.  ~   .    서울시 도봉구청 부구청장

1991.  ~   .    서울시 강동구청 부구청장

1992.  ~   .    서울시 종로구청 구청장

1993.  ~   .    서울시 동작구청 구청장

1995.08 ~ 1996.12   서울시도시철도공사 총무이사

1997.01 ~ 1998.05   서울시 보건사회국 국장(부이사관)

상훈으로 근정포장이 있다.



\30, 박윤원(朴允源) 북변 남해군 제헌의원


1908년 북변리에서 태어나 여수수산중학교와 일본 도쿄 수산강습소,  만주 대동(大同)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임기 2년의 1군1인 소선거구제로 최다득표자를 당선자로 한 제헌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남해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그는 1949년 6월 20일 제2차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1950년 2월1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에 의해 석방되어 월북했다. 그의 묘는 최근 평양시내의 62명의 납북인사 묘역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9, 송권오(宋權五) 초대 남해군 의회 의원


1931년 평리 95번지에서 태어나 1991년 3월 26일 실시된 제4차 지방의회선거에서 남해군의회 의원 선거에서 남해읍에서 무투표 당선되어 초대 남해군의회 의원을 지냈다. 



68. 이재열  현 남해군의회 의원, 전 남해읍장


1948년 1월 17일 서변리에서 태어나 1960년 남해초등학교와 1963년 남해중학교, 1966년 남해제일고등학교를 거처 2002년 남해전문대학 중국e비즈니스과를 졸업하였다. 19**년 남해 군청 공무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이래 민방위과장, 사회복지과장, 문화관광과장과 이동면장, 남해읍장 등 군내 주요부처를 거처 경영혁신 과장으로 재임하던 중 2005년 30여 간의 공직에서 명예 퇴직하였다. 2006년 5월 31일 실시된 제4대 동시 지방선거 남해군 의회 의원선거 가선거구(남해읍, 서면)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현재 남해군의회 의원이다. 현재 남해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이며 장학회 이사이다. 상훈으로 1980년 옥조근조훈장, 2006년 녹조근정 훈장이 있고, 2005년 남해군민이 뽑은 모범공무원 상이 있다.


223, 이행식


1958년 7월 1일 북변리에서 태어나 1971년 남해초등학교와 1974년 남해중학교, 1977년남해제일고등학교를 거처 1979년 진주산업대학과 한국통신대학 농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부터 2005년까지 남해군 농업기술 센터에서 경제 작물계장, 시험연구팀장, 마늘전문 팀장으로 마늘에 관한 해박하고 지식과 기술을 지니고 있고 “마늘 박사”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며 운송업에 종사하고 있다. 2006년 5월 31일 실시된 제4대 동시 지방선거 남해군의회 의원선거 가선거구에 출마했다. 남해군 농어업발전위원, 농촌경제연구원이다. 상훈으로 1999년 모범공무원상과 2005년 국무총리 표창이 있다. 


64. 유임두(柳任斗)   대통령 선거인단 1994년 군민대상 수상


1924년 2월 22일 태어나 1981년 2월 11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에서 남해읍지역에서 당선되었다. 1981년 6월 5일부터 1991년 6월27일까지 평화통일자문회의 남해군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1994년 남해군민대상을 수상하였다.


66. 유창식  제3대 남해군의회 의원 남해군지역혁신협의회회장 864-2938


 평현리 424번지 야촌마을에서 태어나 1950년 남해초등학교와 1953년 남해중학교를 거처1957년 남해제일고를 졸업하고 남해읍장을 마지막으로 37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1998년 6월 4일 실시된 제2차 동시지방선거 남해군 의회 의원선거 남해읍선거구에서 무투표 당선되어 재3대 남해군의회 의원을 지냈다. 2004년 9월 21일 창립한 남해군지역 혁신협의회의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어 2006년까지 역임했다.


65, 장홍길  제2대 남해군의회 의원 전반기 의장 사회복지법인 남해사랑의 집 대표이사


아산리 932번지에서 태어나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3년 임기의 제1차 동시지방선거 남해군의회 의원선거 남해읍 지역구에서 당선되었고, 동년 7월 13일 남해군의회 의장단 선거에서 전반기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 9월 24일 남해의 대표적인 장애인 복지 시설인 개원한 사회복지법인 남해사랑의 대표이사를 역임하고 있다.


73, 정종우(鄭宗佑)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36년 10월 15일 북변리에서 태어나 1949년 남해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78년 5월 18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남해읍에서 당선되어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53, 정현태(鄭炫台)봉전


 \2. 최봉구(崔鳳九) 선소  전국회원 제13대 국회의원 남북신뢰회복추진협의회회장  재경향우회지 재경향우회 고문  0112210070,023329191


  1940년 2월 21일  선소리 102-2번지에서 태어나 1952년 남해초등하교, 1955년 남해중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중앙대학교사회개발대학원와 1991  미국  하버드대학교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1991년  연세대학교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하였다. 1968년 법무부 검찰국에 공직을 시작하여 1980년 대검찰청 비서관으로 퇴임했다. 1980년 구룡상사 대표로 성실 정직 신의를 무기로 경영자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그는 선소지역의 피조개 양식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고 1986년부터 현재까지 구룡상역 대표이사이다.  1988년 제13대 평민당 소속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어 1989년 평민당 원내부총무와 국회 재무분과위원과  국회 운영위원을 지냈다. 1989년  평민당 당무지도위원과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위원으로 광주사태 관련 청문회에서 날카로운 질의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1991년부터 1992년 12월까지 민주당 원내부총무를 역임했다. 1991년 10월부터  1992년 8월까지  민주연합 청년동지회 중앙회장과 1995년부터 대한민국헌정회 이사를 지내고  1981년부터 현재까지  서울오페라단후원회 이사, 1993년 12월부터  한국정치발전연구회 이사, 1995년 5월부터 남북신뢰회복추진협의회 회장으로 있다. 재경남해군향우회 고문으로 고향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7, 하복만 군의원출마


군대


\41,임종린 남변 제20대 해병사령관, 예비역 해병중장. 수필가


 1937년 8월 2일 남변리 341번지에서 태어나 1950년 남해초등학교, 1953년 남해중학교와

1956년 남해제일고등학교를 거처 1962년 해군사관학교 졸업(16기)하고 1975년 육군대학과 1990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고향 남해 섬은 그의 어린 시절 놀이터였고 삶의 모태(母胎)였고,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마음의 쉼터로 여기며 바다가 좋아 바다와 가까운 곳을 삶터로 삼기 위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과 동시 해병대소위로 임관하여 36년간 푸른 유니폼을 입고 바다와 함께 살아온 바다를 사랑한 사나이다. 임관 후 1967년 3연대 3대대 중대장, 1983년 2사단 1연대장, 1985년 해병대 2사단 부사단장, 1988년 해병대 6여단장, 1990년 해병대 부사령관, 1990년 해병대 제2사단장, 1992년 6년 30일부터 남해출신 최초로 1994년 6월 30일 제20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하고 1994년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세계시인협회 회원, 한국해양문학가협회 고문, 명지대학교 사회학교수, 서울평양학회 회원, 대한민국 성우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바람직한 장교상』『전장의 촉감』『한국인의 가치관과 우리의 자세』『우리가 지녀야 할 보편적 가치관』시집으로『머물고 간 흔적』『원시의 현장』『슬픈 여정』『분노의 횃불』 수필집 『세월이 삼켜버린 슬픈 고독』(2004년) 『빨간 명찰 속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소설로는 『새옹지마(아직도 못다 부른 연가)』등이 있다. 상훈으로 1968년 국방부장관 표창, 1970년 화랑 무공훈장, 1971년 충무 무공훈장, 1972년 대통령 표창, 1984년 보국훈장 삼일장, 1987년 보국훈장 천수장, 국선장 외 다수가 있다. 문학상으로 한맥문학 주최 제4회 서포문학대상을 수상했다. 


 

43, 최홍숙 남변 국방부감사관 0176746912



법조


118. 송모충(宋模忠)  변호사  변호사송모충법률사무소

 

 1962년 12월 6일 광포리에서 출생하고, 1981년 진주 대아고등학교와 1989년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8년 제40회 사법시험 합격에 합격했다. 2001년 사법연수원을 제30기 수료하고 2001년 2월 변호사를 서울에서 개업했다.


 6,  신환복(申桓馥)   변호사, 변호사신환복법률사무소장, 재경읍향우회 청년국장

 1964년 8월 20일  남해읍에서 출생하여 1983년 진주 대아고등학교와  1991년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제43회 사법시험 합격하고, 2004년 사법연수원을 제33기 수료했다. 2004년 2월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2004년 2월부터 삼우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로 근무하다 2006년 2월부터 변호사신환복법률사무소를 열었으며 재경 남해읍 향우회 청년국장으로 고향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36. 조종만(曺鐘滿) 변호사, 정당인   0112618944


1957년 10월 15일 서변리에서 출생했다. 1970년 해양초등학교와 1973년 남해중학교, 1976년 성동고등학교를 거처 1985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성균관대학교대학원 공법학과를 수료했다. 1988년 제30회 사법시험 합격하고 1991년 사법연수원 제20기로 수료했다.

1991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한 이래 서울종합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로 있었고 1998년   변호사조종만법률사무소 변호사, 2000년 3월부터 2004년 8월까지 법무법인송파합동 변호사로 일했다. 2001년 12월부터 한나라당 서울 노원갑지구당 지구당위원장과 2002년 9월부터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정선거방지위원회 법률지원단 부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경인 지역에서 저소득층 무료 변호와 지역민을 위한 활동에 열성을 다해 많은 호평을 받고 있으며, 한나라당내의 법률 통으로 자타의 인정을 받고 있다. 자유총연맹 노원구 지부장으로 많은 선행을 했으며,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변호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언론


224, 강명규 전 남해신문 대표이사.

211, 김광석 남해시대대표이사. 전 남해신문 편집국장

213, 김성철 전 남해리뷰 대표

207, 김윤관 경남신문 남해지국장

209, 박성렬 경남일보 남해주재기자


17, 신학림  전국언론노조위원장  한국일보기자


1958년 9월 29일 소입현에서 태어나 1971년 해양초등학교와 1974년 남해중학교(23회), 남해제일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 인도네시아 어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한국일보에 기자로 입사해 1993년 한국일보 노동조합 위원장을 두 차례 지낸바 있다. 2000년 코리아타임스 기획실장, 2002년 코리아 타임스 특수사업팀장을 거처 현재 2003년부터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으로 있다.

2003년부터 전국언론노동조합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함께 맡아오고 있는 그가 2005년 2월 28일 한국언론회관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있었던 두 조직의 지도부 선거에서 다시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MBC언론노조 소속 김종규(수석부위원장)씨와 동반 출마한 그는 상대후보를 큰 표 차이로 따돌리고 언론노조 제3기 위원장과 언론노련 제9대 위원장에 당선됐다. 언론노련 수석 부위원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신문개혁특위 위원장 등으로 활동해 온 신 위원장은 2003년 제 2기 언론노조. 제8대 언론노련 위원장에 선출됐다.

신 위원장은 당일 있었던 취임식에서 “작은 차이를 뛰어넘어 대동단결하지 않으면 산적한 과제를 성취해내기 어려운 만큼 더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고 남해를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212, 이동화 전 환경신문 대표이사

223, 이영호 전 환경신문사 대표이사

25, 이재열 북변 한국일보기획조정실 0117493868 0226043809 이태근 씨 아들 하복만연락

208, 윤시남 전 동아일보 남해지국장

97, 유진규 전 남해뉴스 대표이사

210, 정문석 남해신문사 대표이사

26, 정복현 유림 수도권일보사 대표이사 0182771715,

110, 정성효  kbs 교양국pd



행정



\28, 문원경 (文元京)  행자부차관 017-2015610


1949년 11월 23일 서변리에서 태어나 1968년 경남고등학교와 1976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1975년 행정고시(17회)를 합격하고 1992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도시공학박사 학위와 2003년 성균관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행자부 민방위재난관리국장과 2002년 울산시행정부시장, 2004년 행자부 민방위재난통제본부장, 2004년 차관보, 2005년 지방행정본부장을 역임하고 2005년 7월 27일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실시된 정부인사에서 행자부 등 신설된 4개 부처 복수차관에서 신임 행자부 2차관으로 임명됐다. 2006년 1월 31일부터 소방방재청장으로 재임 중이다. 그는 정통 내무관료 출신으로 중앙과 지방의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 제2차관의 주요 업무인 지방분권 및 혁신 업무에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17회에 합격, 내무부장관 비서실장, 행정자치부 민방위재난통제본부장, 차관보, 제2차관 등 구내무부와 행정자치부 요직은 물론, 경남 진해시장, 통영군수 등 일선 시장군수를 역임했다. 또한, 민방위재난관리국장, 민방위재난통제본부장 및 소방방재청 개청준비단장으로 재직한 바 있으며 정책입안과 일선 자치단체 사정에도 밝아 주위로부터 “지방행정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2002년에는 행정자치부 직장협의회로부터 베스트 간부로 선정된 바 있는 그는 지난 1995년 진해시장 재임 시 ‘생각하는 사람’(T.M:Thinking Man) 운동을 전개하고 창의적 사고를 이끌어 내기 위해 `거꾸로 가는 시계`를 시청 현관에 달아 화제가 됐으며 현재도 시청에 걸려 있다.


124, 유영호 법무사 전 진주지검 수사과장

140, 박길주 사무관

141, 김부종

142, 조정엽 건설과장, 전 미조면장

143, 박홍국

144, 

78, 이창휴 군 과장출신 장인태도지사 선거본부장

146, 김재영 읍 부산시청 남부회 회장 부산시 노동정책과 사무관

108, 반상권 아산 (정보통신부) 행정고시합격, 반상훈 동생(0114954730)

93,  최병규 현 남해읍장

98, 하종준  현 기획감사실장

99, 정덕현 전 기획감사실장

100, 김우창 전 기획감사실장

101, 고광훈 전 기획감사실장

102, 양석용 전기획감사실장, 평화통일 자문회의 전 남해군협의회장

120, 김동철 전남해읍장

117, 안상진 낙원다방

103, 기타 읍출신 과장 이상 명부 확인


교육계


205, 공세기(孔世基) 전 남해중학교교장


1939년 1월 8일 **에서 태어나 삼남초등학교와 해성중학교, 여수고등학교를 거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수료했다. 해성중학교, 서면중학교, 남해여자고등학교, 남해종합고등학교, 남해정보고등학교의 교사를 역임하고 남해중학교 교장으로 41여 년 간의 교직에서 정년퇴임했다. 상훈으로 대통령훈장 푸른기장, 경남교육장상 등 다수가 있다.  


39, 김선옥 남변 성남초교 01197515805


76, 김우영(金楀永) 전 남해초등초학교 교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전 도마, 남해초등학교 교장 . 남해교육청 학무과장 역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땅이름학회이사 , 한국지명학회 회원 화전사 바로알기 모임 회장 저서로는『화전고을 땅이름 유래를 찾아서』(2001년 문성인쇄소)『남해의 금석문을 찾아서』(2001년 문성인쇄소)『남해지명사전(2003년 문성인쇄소)』『남해현정사』 (2006년 문성인쇄소) 등이 있다. 2001년 남해문화원의 남해문화대상과 2004년 남해군 군민대상을 수상했다.


77, 정규순 미조초 교장


150, 정휘위 학교법인 동아학숙 이사장


\112, 정재환(鄭在煥) 죽산 전 동아대 총장, 이사장

  

1908년 11월 1일 남변리에서 정민주(鄭民柱) 씨의 3남으로 태어나고 법조인과 교육자이다.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고등문과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여 법조에 몸담았다. 1945년 11월 부산지방검찰청 차장 검사로 취임하고, 전주, 대전, 대구 지방 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하였고, 1952년 5월 29일 법무부 차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조국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있음을 깨닫고 1946년 11월 재단법인 동아 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아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3년 10월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동아대학교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2월 동아대학교 병설 초급대학을 설립하는 하는 등 11개 단과 대학과 4개 대학원으로 육성하여 명실 공히 사학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고등고시 위원을 비롯해서 경상남도 교육위원, 교육회장과 부산시 교육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인재 양성과 지역사회의 발전과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78년 천마산 기슭에 망양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상훈으로는 국민훈장 모란장 외 다수가 있다.

 


116, 정성명 교장


학계



27, 김성동  서변 한국교육과정 평가 원장 0319650356

51, 김석주 봉전 0113730171 김석주의원 원장

47. 김춘추 심천 성모병원 내과과장


221, 최 효(崔孝) 남해읍 북변리 출신. 국립강릉대학교  교수.

 

 서변리에서 태어나 1962년 남해초등학교와 1965남해중학교와 1968년 진주고등학교를 거처 1976년 서울대학교 기상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기상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8월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대기연구소 박사과정거처1984년 5월 Univ. of Texas at Austin Dept. of Civil Engineering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우리 기상학계의 거두로 한때 국립강릉대학교의 유력한 선출직 총장감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1992년 5월부터 한국 환경과학회 부회장이고 1989년 5부터 한국 기상학회 이사 학술, 용어 연구위원이다. 1987년 4월부터 1987년 5월까지 한국 남극기지 후보지 조사대의 일원으로 남극 과학자 기지 및 해양, 기상조사 통역, 기지계획을 입안했다. 미국 기상학회 정회원(이사), 필리핀 기상학회 정회원, 한국 해양학회 정회원, 일본 빙설학회 정회원, 중국 해양학회 정회원으로 있다. 주요국내외 발표논문으로 "산업적 활용을 위한 동해 연안 표층풍의 특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coastal surface wind in the East Sea of Korea for industrial applicability), 한국 기상 학회지, 69-84. 1993. 등 수십 편이 있다.



32, 유득준 서변 전 이화여자대학교 경제학과교수


33, 윤장옥


서변리에서 출생하고 진주여자고등학교와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동국대학교 부도서관장 역임


157, 정익준(鄭益駿)   동아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0165467431


1947년  남변리에서 출생하여  1959년 남해 초등학교, 1962년 남해 중학교와 1965년 부산 공업고등학교 거처 부산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 박사과정 수료(우리나라 항공사의 국제선 여객운송 서비스마케팅 전략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Marketing &Sales Manager, Japan Airlines, Managing Director, Fan East Travel Services, 미국 Virginia Polytechnic Institute &State University 객원교수와 한국관광레저학회 부회장 역임했다.현재  동아대학교 경영대학 국제관광통상학부 교수로 재임중이고 아태관광연구소 소장, 한국여행학회 및 대한관광경영학회 부회장, Editorial Board, Journal of Tourism Analysis, U.S.A. 으로 있다.
 

148, 김남진 부산시 학장동 학장성심의원 일반외과 원장

149 박영재 부산의 의료법인 송산의료재단 이사장으로 송산의원, 한솔의원, 지성외과 의원서원요양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105, 장명세 사회복지법인 벽천 대표이사,  남해병원 원장

106, 장진성  전 남해병원 원장

155, 장구락 감천중앙병원 원장

156, 정안창 동아대학병원 사업소 소장0118835279

23, 정태현 북변 단양세종병원장 0317159412

57, 조현찬 섬호 0112102326 한국성심병원병리학과장

55. 이수철 소입현 이수철 신경정신과 01190202100



경제


\61, 유봉식(兪奉植) M.K그룹회장


 1928년 6월 23일 북변리에서 태어나고 1942년 남해초등학교를 졸업한 일본의 사업가이다. 택시운수회사인 M.K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현재는 긴키(京畿) 산업 신용조합 회장이다. 1943년에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리츠메이칸(立命館) 고등학교을 졸업하고 1951년 리츠메이칸 대학교 법학부를 중퇴했다. 일자리를 전전한 뒤에 1957년에는 나가이 석유(永井石油), 1960년 미나미 택시를 설립했다. 가쓰라 택시 이사장을 지내고 1977년, 미나미 택시와 가쓰라 택시를 통합했고 엠케이 택시(M.K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이후 대표 이사로 선출되었다. 엠케이 택시는 시내의 택시 요금 인상을 단독으로 반대했고 요금 인하를 계속 추진했다. 또한 장애인 손님을 먼저 모시는 철저한 친절교육과 전문 디자이너에게 기사들의 의상을 맡겨서 입히는 등 직원들의 대우를 통한 양질의 서비스로 손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4년 엠케이 그룹 대표 이사 회장을 사직하고 소유자가 되었다. 그의 일생과 경영철학은 한국방송에서 드라마로 제작한 바 있고 수차례 국내 회사나 여러 단체의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하였다. 건설산업교육원 교양 담당 교수이기도 하다.



62, 유태식  M.K그룹부회장


그는 형 유봉식 회장과 M.K택시를 창업한 인물이다.  19세 때 맨주먹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60년 교토(京都)에서 형과 함께 택시 10대로 사업을 시작, 정유·금융회사 등 10여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M.K그룹으로 사업을 키웠다. “M.K택시의 친절은 인사로부터 시작” 이란 모토로  “기업에서 친절은 곧 돈” 신념의 소유자이고 남해인의 자긍심을 세계에 알렸다.

 M.K택시의 친절은 ‘인사’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혹시 일본에서 M.K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감사합니다, 오늘은 OOO기사가 모시겠습니다. 행선지는 OOO가 맞습니까? 잊으신 물건은 없으십니까?’하고 네 번 인사하지 않으면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인사가 택시운임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라며 M.K택시 설립 초기엔 기사들이 인사를 하라는 회사 방침을 따르지 않고 회사를 떠나는 일까지 있었지만 M.K택시 기사들이 인사를 시작하면서, 교토 시민들 사이에서 ‘밤에 여성들이 귀가할 때에는 M.K택시를 타는 것이 안전하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손님들이 늘어났다.

1972년에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우선 승차시키고, 요금도 10% 깎아주는 제도를 도입, 친절 택시의 명성을 높여갔다. 아이들과 많은 짐을 들고 M.K택시를 탔던 한 주부는 택시기사가 집까지 짐을 들어다 주는 친절에 감동을 받아 “앞으로 M.K택시 외에는 다른 택시를 타지 않겠다” 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M.K택시는 직원 복지로도 유명하다. 1961년에 이미 직원 전원에게 주택을 지어 줬고, 1991년엔 고급 맨션아파트를 건립해 장기 저리로 분양했다. M.K택시의 ‘친절’이 유명해지면서,  일본 왕과 정치인들이 참석하는 대규모 공공행사에 관용차량 대신 M.K택시를 공식 의전차량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달라이 라마, 엘리자베스 영국여왕 등 세계적인 거물들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M.K택시를 타보기도 했다. 저서로 성공적인 삶을 그린『돈이 아니라 생명입니다』(2000년. 쿰란) 가 있다. 건설산업교육원 교양 담당 교수이다.



\61,정한성(鄭漢晟) 재단법인 한성장학회 이사장  주식회사 흥화제작소 대표


 유림리에서 태어나 1945년 남해초등학교를 거처 남해제일고등학교(공립농업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어려움 끝에 일본대학교 기계공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에 정착해 회사를 일군 기업가다. 일본 도쿄에서 기계부품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그는 2000년부터 3년간 재일 경남도민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경남지역 나무심기 운동 등을 이끌기도 했다. 지난 1993년 그가 설립된 한성장학회는 남해전문대뿐만 아니라 남해제일고 등 군내 4개 고등학교에도 해마다 1, 2, 3학년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오고 있으며, 2005년 모교인 남해초등학교의 발전 기금으로 1억 원을 희사해 그가 맡긴 돈은 이 학교의 장학회 설립기금으로 활용되고 있고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일본 체류와 귀국의 귀로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일본에서 배운 학문의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이곳에 남아 못다 한 남아의 뜻을 펼쳐야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체류하게 된 것이 어언간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전후의 불경기와 겹쳐서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민족 차별의 질곡을 감내하며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형언할 수 없는 난관이 다가와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를 의연히 극복하고 오늘에 이룬 것이다.

그런 세월 속에서도 언제나 떠나지 않은 고향 산천과 조국의 생각들로 해서 그는 정체성을 되새겨보며 과연 나는 무엇을 했는가 하고 자문하게 되고 이제는 생활의 터전이 이곳 일본이라 되돌아갈 수 없는 조국이기에 나의 조그만 힘이라도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소박한 결심이 서서 그의 학창시절에 겪었던 학자금 조달의 어려움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기에 조국의 불우하나 향학열이 투철한 학생들에게 적은 힘이라도 보태자는 취지에서 장학회를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는 자금 규모가 작아서 떳떳하게 내세울 처지는 아니더라도 그 뜻과 정성은 누구 못지않게 긍정적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앞으로 경제적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증자하여 한명이라도 더 혜택을 받는 학생이 늘도록 하겠다는 것이 지금 지니고 있는 그의 소신이다.






\63.김성오(金成午) 북변


1906년 10월 8일 북변리에서 석봉(錫鳳) 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1920년 남해공립보통학교를 제8회로 졸업했다. 남해 충렬사 관리위원장으로 충렬사의 보수 개축을 선도하였고,1967년 남해군3.1운동 동지회 회장으로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남해 3.1독립운동기념비 건립에 힘을 모았다. 경상남도 도정 자문위원과 교육위원을 지내고 남해여자고등학교 설립추진위원장과 해양초등학교 설립추진위원장, 해양초등학교 육성회장, 남해라이온스클럽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당시 남해초등학교의 학생 수 과다로 분리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동년 1월의 회갑 기념으로 학교부지로 사재인 2,000여 평을 희사하여 새로운 배움터로의 해양초등학교 설립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인자한 성품과 봉사정신이 강하였으며 향토 교육 발전과 사회사업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해양초등학교 교정에는 1976년 당시 남해군 유지, 교육자, 해양초등학교 설립기성회, 해양초등학교 육성회 일동이 세운 교육 공적비가 있다. 상훈으로 경남교육회장상, 국무총리 표창 등 20여개의 포상이 있다.



22. 김대실 한국가스공사 0112117746


24, 박영호  유림 센추리cc사장 01192928500



21, 유진동  건설산업교육원 이사장   0112677972


건설시장의 세계화와 정보화에 따른 국제경쟁력 제고와 부실공사 방지를 위한 건설 기술인력의 수준향상 및 책임 의식 함양을 통해 전문건설인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건설산업교육원의 이사장이다.


34, 이해복 서변 국립공원관리공단 01065813355


35, 이환성  단양관광호텔대표이사  011-778-0997


1946년 서변리에서 태어났다. 1958년 남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를 거처 1972년 경희대 경영행정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하면서 경영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경영인으로서 자질도 갖췄고 4촌 매형인 신동관 전 의원의 배려와 많은 도움이 있었다. 1977년 10월 (주)이화특수교역이라는 회사를 창업한 것이 그의 첫 사업진출이었다.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 공업국으로부터 건설기계나 자동차 등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유압장치를 수입해 국내기업에 공급하는 것이 이화특수교역의 주요 사업이었다. 꾸준히 이화특수교역을 경영해오면서 다른 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출 수 있었다. 한 때는 마대 포대를 만드는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지만 이화특수교역 만큼은 든든하게 성장했다. 경영인으로서의 그의 역량이 아낌없이 발휘된 곳은 남해읍의 현대아파트 건설에서였다. 시작은 그의 일이 아니었으나 얼마 안가 벽에 부딪힌 사업에 고려산업개발을 끌어들임으로써 사업을 무리 없이 성사시켜낸 사람은 그였다. 고향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초고층 아파트를 자신이 맡게 된 만큼 그가 강조한 것은 처음도 튼튼하게 두 번째도 튼튼하게 짓는 것이었다. 현대아파트 입구에 세워진 비석에는 ‘(주)이화특수교역 대표 이환성’이라는 글귀가 있다. 

남해읍 현대아파트 건설사업 이후 그에게 단양관광호텔 경영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나타났다. 1997년 아이엠에프 이후 부도위기에 몰린 호텔 건축주가 사업을 포기해 경매처분의 위기에 몰린 것을 그가 인수해 성사시켜 낸 것이다. 그를 만난 단양관광호텔은 삽시간에 단양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로도 인정받고 있는 관광호텔로 자리 잡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의 중심에 위치한데다 지방의 관광지 호텔들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호텔의 다양한 서비스시설들과 야외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양관광호텔의 이러한 장점과 그의 풍부한 인맥으로 전국 자치단체의 세미나를 유치해나갔고, 1천여 명을 한꺼번에 모실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해 단양군의 공식행사를 담당하는 공식호텔로, 단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웨딩홀로 자리 잡았다. 단양의 대표호텔의 대표인만큼 단양에서 그는 이미 유지 중의 유지로 대접받고 있다. 제천영육아원후원회 위원 등 각종 사회복지시설을 후원하는 것은 물론 크고 작은 일을 뒷받침 하고 있다. 1990년대 초중반 고향의 소년소녀가장들을 서울로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마련했다. 황기준 군수시절 남해군과 일본 오구치(大口)시의 국제도시 간 자매결연을 주선할 정도로 폭넓은 보폭으로 많은 일본 관광객을 유치함으로써 호텔 경영을 안정적인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재경 향우회 감사이며 용산마포지구 거주 남해출신 모임인 용마회 회장으로 있다. 



52, 김을주 동북관세사무소 부장0175510254

153, 박현오 한국인포데이타(주)대표이사 0516450029

154, 이해원 일본항공 고객관리부장


200, 박경순  서변리 출신으로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처음으로 실시된 초대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남해군에서  당선된 박윤원 씨의 자녀로 재경향우회회장으로 서울시 의회 의원을 지내고 유광사산부인과 병원 원장인 유광사 박사의 부인이다.

    011-380-2337

 

31. 박영호 서변 미화콘크리트 전무 0192277139


40, 이결휘 남변 강지중계사



45, 김용길(金龍吉) 심천 0415467991 한국베랄 대표이사 사장

 

  1955년 11월 20일 심천리에서 출생한 벤처기업인이다.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 152-3에 소재한 자동차 마찰재 생산회사인 한국베랄의 대표이사이다.  대우자동차판매 총무부장을 거처 한국베랄에 입사하여 상무이사, 전무이사를 거처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46, 김용웅(金龍雄)  심천 한국베랄


 1942년 5월 19일 심천리에서 출생했다. 1954년 남해초등학교와 1957년 남해중학교, 1961년 남해고등학교를 거처 1991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유신교통 대표이사사장과  북구대우판매 대표이사사장,  한국베랄 대표이사를 거처 현재 한국베랄 회장으로 있다. 그는 일찍이 국내의 자동차 대중화를 예상하고 자동차에 없어서는 안 되는 디스크 브레이크 패드, 라이닝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종합 마찰재회사인 1985년 한국베랄을 설립했다. 창립하던 동시에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종합 마찰재 회사인 영국 페로도사의 기술지원과 자본합작으로 설립된 한국베랄은 친환경적인 마찰재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국내 최초로 비석면 마찰재를 개발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베랄의 비석면 마찰재는 세계 굴지의 자동차 회사로부터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국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자동차의 순정부품으로 납품하고 있으며 영국, 미국, 일본 등 마찰재 선진국으로 수출하는 쾌거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변해가는 자동차 산업에 능동적으로 대처해가기 위해 현재 기술에 자만하지 않고 지속적인 연구개발, 철저한 품질관리, 고객 만족을 실현해가며 21세기 초우량 마찰재 회사로 거듭나고 있다. 국내에서 성공한 벤처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42, 김재일 죽산 재경향우회사무국장 01190692557



48, 정달옥 심천 0115929101 기아자동차고문

49, 정영희 심천 c케이스케이블 상임고문024021736

50, 장문본 아산  농협중앙회점 강남역지점장0112142851


54, 이민석 평현 한국진흥(주) 대표


56, 조현근 섬호 한빛은행 인천연수원장


147 하한평 오동 삼경,국일 관세사무소 재부 남해읍부산향우회장대표 관세사 0175459534


111, 김승배 회계사 017-580-3290

113, 김한준 남변 제 33대 -35대 재부 남해군향우회회장

114, 정수봉 죽산 제36대-제37대 재부 남해군향우회장

118, 이장생 재부남해군향우회 부회장, 아남약품회장 0115783511

119, 하항룡 오동 재 부산향우회 직능부회장 (주)구룡산전대표 0115920918,0518964959




종교


137, 법산(法山) 스님  동국대학교 교수. 전 불교대학장. 전 정각원원장

 1945년 11월 23일 평현리 양지마을에서 태어났다. 1961년 12월 망운산 화방사로 출가하여 큰스님 덕산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문학석사와 불교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대만문화대학 철학연구소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하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강사(범어)로 출발하여 동국대학교 정각원 원장으로 13년간 재임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을 역임하고 교수로 재임 중이다. 화방사에서 고성 옥천사로 출향한 이후 꾸준히 구도와 범어, 경전 해석에 몸담았으며 한국인도철학회장으로 국내 선학 연구의 독보적인 학승으로 인정받고 있다. 봉전의 학림사에 불교대학을 열어 강의를 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포교와 문화센터로 도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 『그대들도 나처럼 이 길로 오라』 등이 있다.



201, 정휴(正休) 스님 호압사주지

 

 1951년 남해에서 태어나 1966년  범어사 승가대학 졸업을 졸업했다. 월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1960년 천황산 표충사에서 입산했다. 1961년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64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청암사 주지, 1985년부터 1992년까지 구룡사주지, 1993년부터 1998년까지  해운사 주지, 1998년부터 1999년까지 기림사 주지,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해운사 주지, 대한 불교 조계종 중앙종회 제 8, 9, 10, 11, 12, 13대 종회의원을 역임한 한국 불교계의 중진이다.

2006년 현재 제14대 종회의원이고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의 호압사 주지이다. 불교신문 주필 및 편집국장과 총무원 기획실장, 불교방송 상무, 법보신문 사장 직무대행, 불교신문사 사장, 학교법인 동국학원 감사를 지내고 현재 학교법인 능인학원 이사장이다. 197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시조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도 데뷔했다. 저서로 수필집『걸레스님 중광』(2002.밀알)과 『선재의 천수천안』(1999. 우리),『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1999. 우리) 『깨친 사람들을 찾아서』(2000.우리) 등이 있고, 소설 『열반제』『경허』등 10여권 등 다수가 있다.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다방면의 글을 발표했다.

  

222, 성각(成覺) 스님 망운암주지


남해에서 태어나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에서 출가 득도하였다. 동국대학교 선학과와 문화예술대학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을 수료하고 원광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5년 『한맥문학』신인상에 동시가 당선 되었으며, 2005년 『시와 수필』, 2006년 『문학 21』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망운산 망운암 주지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원각선원 선원장으로 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는 근대 한국 선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시키고 일제 치하 치욕스러운 불교 정책을 쇄신하는 선봉장이기도 했던 만공 스님의 첫 법어집이고  스님은  만공 스님의 법문들을 한 데 모으고, 각 법문마다 현대적 의미의 해석과 주석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1995년에 광복 50주년 기념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한  첫 선서화 초대전'을 가졌다. 그 뒤 계속해서 소년소녀가장, 심장병 어린이, 실직자 가족 돕기 등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을 돕기 위한 전시회를 해마다 한 번씩 지금까지 열고 있다.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시회를 가져 일본,중국,태국 등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경향신문 창간 60주년 기념 특별초대전의 일환으로 마련된 2006년 9월 5일부터 경향갤러리에서 선시화 작품 전이 열렸고 산사에 묻혀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성각 스님의 선화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였다.  경향신문 객원 논설위원, 경남 도민일보 칼럼 리스트, 동의대학교 초빙교수이다. 호가 소암(素巖)이고 저서로는 선시집 『어느덧 내 모습은 산이 되어』(2006년)과『선예술의 이해』,『한용운의 채근담』『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등 다수가 있으며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국제 펜클럽 한국지부 정회원이다.

   


문화예술


44, 감충효(甘忠孝) 죽산  시인 0162884505


1950년7월29일 죽산리에서 태어나 1963년 남해초등학교 1966년 남해중학교 1969년 남해제일고등학교를 거처 1971년 진주교육대학교와 1990년 인천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1999년 연세대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과정 2005년 경희대학교 대학원  상담학과정을 마쳤다 그는 고향을 떠난 지 20여년이 흘렀지만 남해문학회 회원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1982년에 고 이웃 문신수 소설가와 이상범 수필가 등 몇몇 문인과 같이 남해문학회의 창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명시선발간위원회는 2006년 6월 20일 “시인 100인 한국명시ㆍ시조선(8)” 「빈 가슴에 피는 안개」를 발간하였는데  그의 신작 대표시조 5편이 실렸다. 이 책에 실린 감 향우의 시조는 「어떤 귀향」「용문사」 「반도남단 가천에 가면(2)」, 「임진나루 강변에 서면」 「경원선 야간열차」이며 5편 중 3편이 고향을 소재로 쓴 시다. 나머지 두 편은 휴전선 부근의 학교를 근무하면서 임진강변과 여타 휴전선 지역에서 민족분단을 소재로한 최근에 발표된 시다. 그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고향에 근무하던 1979년에 교육전문지를 통하여 이원수 시인과 정한모 박사의 추천으로 등단하였고, 1999년 계간지 시조생활에서 「어떤 귀향」으로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었다. 남해신문에서 “남해논단”을 쓰기도 한 그는 2004년에 발간된 한국시 대사전(을지출판사)에도 10여 편의 시조가 소개되었는데 대부분 고향을 소재로 한 내용이어서 그의 고향에 대한 정서가 시정신의 밑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월간문학(한국문인협회 발행)과 계간 시조생활(시조생활사 발행) 및 월간 문학공간(문학공간사 간) 등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한국문인협회, 남해문학회, 한국시조생활동회 회원이며 전 민족시조생활화운동본부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시집 『크리스털의 노래』(2007)에는 100여 편의 시중 반 정도가 고향과 자연의 서정을 노래한 시이고 나머지 반중에 그 반이 휴전선 부근의 민족분단을 소재로 한 시이며 나머지 반이 일상생활과 산악활동에서의 감회를 적은 주지시로  되어있다.


88, 고재억(高載億) 남인수가요제 수상자

 

예명이 남해일로 진주시에서 열린 제2회 남인수 가요제(1992년)에서 은상을 수상하였고 제3회 대회에의 창작부문에서 “장대비”를 불러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남해 연가 외 11곡이 수록된 『고재억 애향곡집』 원점 외17곡인 『뽕짝 당신』과 수상곡을 타이틀로 한 CD등이 있다. 1997년 남해문화원의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60, 김진희(金眞熙)   소설가 한맥문학 출판인


1937년 2월 10일 남변리에서 출생하고 본명이 영선(榮善)이다. 1950년 남해초등학교와 남해중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를 거처 일본 코쿠사이(國際)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문학춘추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월간 동양문학, 농민문학을 발행하였다. 현재 한맥문학 출판인으로 한국문단의 발전과 신인 작가 발굴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문학계의 마당발로 통하고 있다. 한국소설가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이사이고 특히 애향심이 강한 작가는 고향을 떠난 삶을 늘 아쉬워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산자수려한 고향으로 자주 초빙하고 있으며 긍정적인 사고와 정감어린 문체로 고향을 알리며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기업 소설과 번역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밤에 타는 태양』(1977년. 예림),『종이남자』(1978. 미조출판사), 『사랑의 이상기류』(1979. 대광), 『소돔성」의 밤』(1980. 보이스), 『신홍길동과 금불사』(1988. 독립문출판사), 19번째 소설집 『바람』(2006.) 등 수많은 작품이 있고 번역집으로는 『동남아에 흐르는 비애』(1980.천광출판사)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장편 소설 「오리시스의 땅」을 10년 가까이 한맥문학에 연재하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 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로 있고 개마고원유격대 기념사업회장으로 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이런 너꺼무』는 출판계가 당시 안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당시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기도 하였으며 개인 빚을 갚을 만큼 부를 안겼다. 현재 단편 소설 가제 한국전쟁 6·25참사를 주제로 한 장편소설 『안다이네 동네 사람들』을 집필 중에 있다. 현재 한맥문학(전 농민문학) 발행인으로서 한맥문학상(12회), 한맥문학가협회상(14회), 서포문학상(10회)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으며, 한국문단의 발전과 신인작가 발굴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한국예술인총연합회 소설분야 본상과 문예사조 소설부문 대상 등 기타 많은 수상했다.

 한국전쟁 중 함경남도 개마고원에서 반공투쟁을 하다 산화한 반공애국투사 영령들의 애국심을 기리는 “개마고원반공유격대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故 박순천, 故 김재광 씨의 뒤를 이어 1987년부터 맡아 함경남도와 도민회의 상패와 공로패를 여러 차례 받았다.

  


213, 김용엽(金龍燁) 1955년 2월12일 달성군 현풍 출신. 한국문인협회 남해지부 사무국장, 시인, 시사평론가

   

220, 김우태(金羽泰) 시인, 언론인


1964년 7월 12일 서면 남정리에서 태어나 1976년 대서초등학교와 1979년 남해중학교, 1982년 진해고등학교를 거쳐 부산대학교 국문학과를 1989년 졸업하고, 2002년 경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를 수료했다. 1989년 남해신문의 창간과 편집에 기여하고 1991년부터 2004년까지 경상남도청 경남도보 편집위원으로 재임하다 2005년 3월부터 남해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88년 전남대학교 주최 문예행사에서 5월 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1989년 서울신문사 신춘문예에 시 「비갠 아침」이 당선되었다. 「두렁길」「귀뚜라미」 등 많은 시를 발표했으며 그의 대표작인 「비갠 아침」은 자연의 풍광과 세상사를 소박하게 섬세한 문치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남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다.


122, 류기주 사진작가


1978년 10월 남해사진동우회의 1991년 2월부터 1996년 11월까지 제5대 회장을 역임했다.


83, 류미아  소설가


1954년 남해읍에서 출생하고 조선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여수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첫 발을 내디딘 후 6년 간 교직생활을 했다. 1988년 1월 동야문학에 단편소설 『내부의 밧줄』을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다. 왕성한 창작열로 여러 문학지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93년 전작 장편소설 부치지 못한 편지를 출간하여 신선하고 발랄한 표현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89, 서현숙(徐賢淑) 시조경창 백제문화제 입상


1961년 부산전국시조경창 대회 입상을 계기로 1986년 충남의 부여 백제문화제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수상경력이 있다. 1986년부터 전국시조경창대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그의 특기는 지름시조이다.

 

579, 박민기(朴玟錤) 수필가, 교육자


1918년 북변리에서 출생하여 1987년 별세한 수필가이다. 1931년 남해초등학교를 거쳐 해안대학 국문학과와 정경학과에서 수학하고 1938년 소학교 교원 검정시험에 연속 2회 합격했다. 1940년부터 중현, 고현, 갈화초등학교 교사와 대서초등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진주시 봉원, 중안, 반성초등학교 교장과 산청군교육청 학무과장을 지냈다. 민족정신이 투철한 교육자로 1945년 한글맞춤법과 시조, 태극기 해설을 수록한 『곳집』을 발간하여 군내 각급 학교에 배포했다. 또 동요나 동화 학교교가 등의 창작활동에 열성이었고, 출판사 강산문화사를 창립하여 초등학생용 1960년 초등학생용 『국정교과서 국어 새사전』을 출간 보급하는 등 우리말의 연구와 순화에 헌신했다. 1960년 영문(嶺文)에 수필로 등단한 후 수 많은  수필과 시론을 써왔다. 경남일보 논설위원,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경남 수필문학회 회장, 한글문화협회 진주 지부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동화집 『흥부와 곰의 꼬리』 수필집 『그날까지 파도처럼』『소신의 창에 햇살이』를 출판했다. 광복 30년 문학전집(정음사 간)에 수필 「고향」 외 1편과 한국수필문학대전집(범조사 간)에 「갓집」 외 7편이 수록되어있다. 상훈으로는 국민훈장 석류장이 있고 눌원문학상을 수상했다.


38, 박인아(朴仁兒)  전 한국문인 편집차장 01197622802


1959년 북변리에서 태어나 1973년 해양초등학교, 1976년 서울 영란여자중학교와 1979년신광여자고등학교를 거처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 한국문인에서 「박하향기」로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문인 추천작가회 회원이다.

한국주부클럽 시문회 회원이고 필 문학회 회장으로 있었고 격월간 종합문예지인 한국문인 편집차장을 2006년 8월까지 역임했다. 2006년 한국문인상을 수상했고 공저로 『한국명수필선』 『내 마음속의 지우개』『추억찾기』『새들도 고향을 그리워할까』『사임당 문학 28집, 29집, 30집, 31집』 등이 있다.



80, 박춘희(朴春嬉) 소설가


1950년 남해읍 출생. 진주여자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1972년 동화 「분홍웃음」(새교실), 「새벽에 오는 기차」(소년)로 천료되고, 1976년 동화 「가슴에 바다를 안고」가 소년 중앙지 문학상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 후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저서로 『달맞이 꽃』『가슴에 뜨는 별』 외에 다수가 있으며  대표 동화「새벽에 오는 기차」를 통해본 작품 경향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표방하며 역경에 처한 어린이를 주로 조명 했으며 풋풋한 가족애와 연관된 인간미를 지상의 최고의 선으로 삼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뚜렷하다.


90, 박춘영(朴春英), 전국예약 시조부분 상임이사


86. 이문성(李文成) 화가. 미술교사 


남해미술교육연구회의 회장으로 재임하고 각급 학교의 미술전람회 권장, 학생미술 실기대회

참여를 독려하고 화전문화제에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에서 미술의 저변확대와 발전을 위해서 노력했다. 이동중학교 미술교사로 있다.

 

82, 이상범(李尙範) 수필가 설천중학교 교장,


1944년 평리에서 출생했다. 남해농업고등학교와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현재 설천중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이다. 1979년 경남수필문학회에서 수필 「차창」으로 등단한 이후 많은 수필을 발표하였다. 1983년 남해문학회 창립을 발기하고 1998년부터 2006년 1월까지 회장으로 재임하였다.




84, 이처기(李處基)  시인 남해미술 연구회 초대회장 역임


1937년 남해읍에서 출생하여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하였다. 여러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함안교육청 장학사를 역임했다. 1987년 9월 1일 발족한 남해미술연구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1989년 현대시조 신인상에 「고수(鼓手)」가 당선되었고 이어 「겨울억새」가 천료, 문단에 데뷔했다. 저서로 『널문리 가는 길』(1993. 백상)이 있다. 그는 국악이나 토속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고향이나 인정, 시대적인 상황을 생동적으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남해문학회 회원으로 지역에서 활발한 문학 활동과 신인 발굴에도 열성이다. 


87, 이준(李俊) 전 이화여자대학교 미대교수 미대학장, 예술원 회장, 서양화가

  

 1919년 8월 14일 남해읍에서 태어나 1935년 일본의 미술명문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졸업했다. 1950년 숙명여자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래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부교수로 시작하여 1984 이화여자대학교 미대 서양화과 교수,  1975년부터 1981 까지 이화여자대학교 미대학장을 역임했다. 1953년 국전에 특선을 수상했으며 1970년부터 1986년까지 미술협회 고문을 지냈다. 1986년 미술협회회장, 한국미전운영위원장과 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 세계미술제 운영위원장을 역임한 우리나라 미술계의 거목이다.

1981년부터 2003까지 대한민국예술원 서양화부분 회원으로 재임하다가 1997년 세종문화상 예술분과심의위원장으로 큰 역할을 했고, 2003년 12월 20일부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으로 역임 중으로 남해출신으로 문화예술계의 자랑이다. 그의 주요 예술 활동은 제1회부터 30회까지 국전 출품(1949년-1981년), 개인전 7회(1951년-1999년), 동남아5개국 순회미술전 출품(1965년), 뉴욕메이시 백화점 극동미술전 출품(1966년), 한국근대미술 60년전 출품(국립현대미술관, 1972년), 한국현대미술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1976년), 한국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77년-1993년), 대한민국 서양화대전 출품(국힙현대미술관, 1975년), 이태리 한국현대미술전 출품(밀라노, 1983년), 파리 그랑빠레 한국현대미술전 출품(1986년), 아시아 경기대회 한국현대미술전 출품(1986년), 아시아 국제미술전(1985년-1993년), 제24회 서울올림픽세계현대미술제 출품(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이준 회고전(1994년), 아시아 현대미술전 출품(2002년), 한민족의 빛과 색전 서울시립박물관(2002년), 이준 미수전(米壽展. 2006)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상훈으로는 조선종합미술전 문교부장관상(1947년),국전 대통령상(1953년), 국민훈장 동백장(1977년), 삼일문화상(1978년), 서울시 문화상(88), 은관문화훈장(1995년) 외 다수가 있다.



85  이중문(李中文) 사진작가


1963년 제1회 개천예술제 초대 작가를 역임하였고, 1965년 제1회 경상남도관광협회 주최 관광사진 및 포스터 현상모집에서 사진부 특선을 수상했다. 그 외 3차례의 입선 경력과 부산, 진주 등에서 개인전이 수차례 열렸다. 그의 대표작으로 「목섬 전경」「다도해」「한려수도의 석양」 등 많은 작품이 있고, 우리나라의 이름 난 관광명승지, 고적지, 새마을 사업 사진 등을 사재를 털어 35밀리 슬라이드로 만들어 재일동포에게 고국의 참모습을 알리는데 일조를 했다. 저서로는 1960년 『남해군 관광사진첩』과 남해의 이모저모를 정성껏 담은 사진집 1996년 5월 『정다운 고향 남해정경』(무진재 간)등이 있다. 1999년 남해문화원의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136, 이호균 남해문화원장




81, 신택환(申宅煥)  시인. 수필가


1936년 광포리에서 태어났다.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초, 중,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1976년 월간 수필문학에 「치자목 한 그루」로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이며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와, 한국농민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수필문학, 한맥문학, 교단문학 등의 수필 분야 추천 심사위원이며, 다양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1989년 동양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에 「우물속 천국」이 당선되어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저서로 수필집『신택환 수필집 있습니까』『내 가슴에 자크가 있다면』 『파도의 속삭임』 『바다가 보이는 오솔길』 장편 에세이집 『도둑맞은 젊음』소설집 『깊은 함정』『돌아앉은 산』 등 다수가 있다. 대구수필문학회를 창립하여 초대에서 3대까지 역임하고 재임 중 대구수필을 5호까지 펴냈다. 한국수필가 협회 공로패와 제2회 한국수필상을 받은 대구지역 문단의 중진이다.



121, 정경수 한학자


230, 정영자(鄭英子) 신라대 교수. 평론가.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41년 10월 23일 북변리에서 출생하여 통영시에서 성장했다. 1964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와 1974년 동아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하고 1988년 동아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9년 현대문학에 평론「원형의 재생」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모윤숙 시의 연구』『손소희 소설연구』『한국페미니즘문학연구』(1999)『인간성회복의 문학』(1996) 『한국현대여성문학론』(1988) 『한국여성소설연구』(2002) 등 수많은 평론을 발표했다. 수필집으로『오를수록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2002)『한국페미니즘문학연구』(1999) 『인간성회복의 문학』(1996) 『한국현대여성문학론』(1988) 『나의삶 나의 사랑』 (2002) 『그립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2002) 『 솔바람으로 시를 살리던 날』 (2002) 등이 있다. 부산여자대학 국문학과 교수를 거처 현재 신라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다. 2006년 1월 20일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94년 부산시 문화상과 2002년 국제펜클럽 펜 문학상 수상했다.


\22. 정왕선(鄭旺先) 광포 시인 전 부산지방 국세청장


1935년 남면 선구리에서 출생하여 광포리에서 성장하였다. 1955년 남해농업고등학교를 거처 1961년 동아대학교 정치학과와 1963년 동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국세청 세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하여 제주, 진주, 인천, 남대문, 동대문, 서울 중부와 종로 세무서장을 거처 대전 및 부산지방 국세청장과 한국증권대체결제주식회사, 한국화재보험 이사장을 역임했다. 국내 재정 세금 분야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그는 문화 예술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인간의 도덕적인 타락을 막는 것은 문화의 힘임을 역설했으며, 문화예술을 통한 정서의 순화와 도덕성의 함양을 위해 노력했다. 1993년 8월 한맥문학에서 박화목 선생의 추천으로 시 「산(山)」을 발표하여 문단에도 데뷔했다. 그는 이 시에서 그는 자연과 어울린 인생의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 외 「윤회」 「용문사의 밤」등 주옥같은 수많은 작품이 있다. 1994년 1월부터 한맥문학에 에세이 「자유에 대한 변명」을 연재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 2006년 10월 14일 그의 문학적인 업적을 기리는 시비가 김진희씨 등 중앙 문인들의 성금으로 광포리 동 회관 옆에 세워졌다.


58, 최귀열 섬호 화랑대표

 

1952년 12월 3일 입현리 187번지 섬호마을에서 태어나 남해초등학교를 거처  남해중학교(18회)를 졸업했다. 현재 안양의 대표적인 화랑인 금산당 대표이다. 0193753286


9, 최민렬(崔旼烈) 섬호 서예가 국전심사위원 0112778895,0313865715


1951년 입현리 187번지 섬호 마을에서 태어났다. 1967년 남해중학교를 졸업했다.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 선생을 은사로 모시고 서예 외길을 걸어온 현존 남해를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1996년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원광대학교와 단국대학교 등에서 서예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대구예술대학 서예과 겸임교수이고, 대전대학교, 공주대학교, 경기대학교 서예과 교수이다. 1993년 동아 미술제 동아미술상, 2005년 서울 서예 비엔날레 인기상, 경기 미술상, 중부일보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고, 전국미술대회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 1997년 세계서예전전북비엔날레, 전라북도 미술대전 , 강원도 미술대전, 2003년 경상북도 미술대전, 2002년 대한민국한글 서예대전 등에서 심사 위원을 역임했다. 대한민국통일서예대전, 경기 미술대전, 관악 현대미술대전 운영위원장으로 큰 역할을 했다. 2006년 경향신문 주관 「고뇌하는 한국서예가 100인전」에 초대를 받았다. 그는 의지와 신념의 노력하는 서예가로 불리며, 편열중공(編列衆工) 착종군묘(錯綜群妙)의 경지로 그의 유려한 글씨는 기존의 유행하는 서체를 뛰어넘는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그의 독특한 서체는 그의 호를 따서 “밀물풍 한글꼴”로 불리고 있다.

  


91, 허순동 남해읍 출신으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남해시우회 제6대 회장을 지냈다. 율창지도



기관단체


92. 감춘영 죽산 제9대 남해축협 조합장

123, 곽종환. 평리 육군중령예편,  남해군관광발전위원회 위원장

11, 곽영우 재경향우회 테니스동호회장

134, 김준황 새마을 운동 남해군 초대(1984.3.12-1985 .5 23) 지회장

135, 김영호 바르게살기운동 남해군 협의회 초대 회장

145, 김상준

107, 김의원


139, 김귀식 서변 국가 사회 발전유공 1991년 16월 14일 대통령 표창


151, 김두철  새마을금고 이사장 0512427757,

5. 김봉용 재경향우


104, 김송이 2001년 1월부터 현재까지 대한적십자 남해군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남해군여성단체회장이다.


15, 김재성 재경읍향우회 3대회장

12. 김재전 죽산 재경향우회장. 재경 남중동문회 회장 서울시청 남해출신공무원 모임인 남시회회장 011-201-5272

6, 김종포  재경향우

9, 김태수 재경읍향우회장

131, 박희수 ,  전 제5대 남해군 예비군 중대장, 남해군재향군인회 회장

17, 

4, 박염수 북변 제12대, 제13대 남해군산림조합장

8. 이민석 재경향우

96, 이상웅 남해농협장

95, 이세규 제5대 한국농업경영인 남해군연합회 남해농협장

130, 이정배  서변 육군 소령 예편, 남해군 평화통일 남해군협의회 회장. 2007년1월 9일 대통령표창

94, 이춘송 북변 제 8대, 제10대 남해축협 조합장

3. 정영희 전군향우회장

158, 조규환 농협 부산감전지점장 0175704431

159, 조재현 구포성심병원 원무부장 0515207295

160, 조준탁 동주대학 총무과장 0512046146

210, 조세윤  전 환경연합공동의장

211, 조영일 재경읍향우회장

37, 최대영 서변 029662351

161, 최옥심 심천 1996년 12월부터 2000년 3월까지 제5대 남해군 여성단체 협의회장 역임


115, 최봉민 선소 군민대상수상

10, 최태수 재경읍향우회사무국장

13. 정삼영 재경남중동문회 사무국장 010-8000-7676




127, 김연대 열녀(평현)

133, 


138, 김백렬 효자


운천 김백렬 선생은 1873년 서변리에서 태어나 남해의 대표적인 효자로 칭송을 듣고 있다. 흔히 효자문 삼거리로 일컫는 남해군 삼림조합 인근 삼거리는 바로 선생의 효성을 기리는 영모문(永慕門)이 있기 때문에 불리는 이름이다. 영모문은 남해군 보호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있다. 선생은 어버이 섬기기를 모든 일의 으뜸으로 여겨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효행의 기본으로 집안사람과 주위에 타이르고 실천하였다.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어버이께 문안드리고, 하루 일을 여쭈어 승낙을 받아서 행하였으며, 저녁에는 그날의 일을 소상히 말씀드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혹, 어버이가 병상에 계시면 잘못 모신 점을 반성하고 손수 약을 달여 맛을 보고 드리고 지성으로 완쾌되도록 하였으며, 매일 저녁 급히 나서야 할 일에 대비하여 평상복을 입은 채 잠을 이룰 정도였다. 어버이가 집을 떠나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비바람을 무릅쓰고 늦은 시간에도 직접 모셔 왔으며 집안 뜰에는 어버이가 계실 별당을 지어 깨끗이 단장하고 꽃향기 속에서 늘 즐겁게 사시도록 배려하였다. 어버이의 손님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하여 편안하게 쉬어 가도록 하여 그 효행심이 널리 알려졌다. 1917년 4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나 그 효행은 지금까지 전해져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12, 하복만 전 새남해로타리클럽회장, 제4대 지방의회 의원 출마


체육


109, 곽찬규  전 대우 프로 축구선수


203, 고희진  고현 삼성화재 배구선수


1980년 7월 13일 태어나 남해초등학교와 고현중학교, 마산중앙고등학교를 거처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 프로 배구 선수이다. 키200cm,체중88kg의 장신 센터로  남해초등학교 4학년부터 배구를 시작하여 프로 명문 삼성화재에 2002년 12월 1일 입단하였다. 2003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을 수상했다.

 

128, 최동원 북변  전 프로야구선수, 야구해설가


1958년 5월24 북변리에서 출생하여 부산 토성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전 프로야구선수이다.

그의 ‘무쇠팔, 광속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야구사에 몇 안 되는 ‘문화적 아이콘(icon)’이라 할 수 있다. 최동원은 ‘롯데의 최동원’ 이기 전에 이미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최동원’ 이었지만 그가 남해읍 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평범하기를 누구보다 싫어했고, ‘야구인’ 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살아갈 것을 갈망했던 그였기에 그의 인생사엔 숱한 영광과 그림자가 동시에 있다. 20여 년 전에 ‘빠따’를 거부하고 숙소를 뛰쳐나왔고, 수 년 전에 선수들의 권익 부르짖으며 KBO와  최동원의 존재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영웅으로 묻어버리기엔 너무나도 특별했다. ‘기량과 깡다구의 만남’이 곧 최고를 뜻한다면 최동원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수였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전념하기 위해 국가대표선수들은 그해 출범한 프로야구에 참여하지 못하고 전원 아마에 잔류하게 된다. 자격시비 문제 가까스로 출전하게 된 대회. 우승이 걸린 마지막 일본전. 대표팀은 전날 호주와의 경기에서 이틀 동안 15회의 혈전을 치렀지만 몇 시간 휴식 후 바로 일본전에 나가야 했다.

당시 교과서 왜곡 파문으로 대일감정이 최악이던 시기여서 선수들은 각오를 다졌다. 피로 탓에 0-2로 줄곧 밀리다 8회 한대화의 3점 홈런으로 5-2로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국민들과 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를 외쳤다. 세계선수권 우승의 벅찬 감동을 안고 이듬해인 1983년 고향 팀 롯데에 입단해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대형 트레이드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선수회 결성을 주도한 보복성 트레이드의 성격이 다분했다. 더 이상 그는 야구를 하고 싶지 않았고 일부러 삼성과의 계약을 회피하고 미국으로 여행을 다녔고  1989년 6월 삼성과 계약하고 후반기에만 나섰지만 성적은 1승2패로 저조 했다. 쉬는 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 몸은 불었고 스피드는 떨어졌다. 1990년 100승과 1,000탈삼진을 기록하고는 은퇴를 결심한다. 은퇴 이후 해설 등 방송활동을 하며 야구인의 재능을 보여주고자 쇼프로 등에도 나가 입담을 과시했다. 그를 야구인이 아닌 방송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문에 야구해설 이외 모든 방송활동을 중단하고 2001년 한화 투수코치로 부임했지만 시행착오만 거듭하다 낙마했고, 2005년 다시 한화 투수코치로 돌아왔다. 불같은 강속구에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낙차 큰 커브, 그리고 무엇보다 연투 능력과 승부 근성에서 그를 능가하는 투수는 지금껏 없었다.

8년 동안 통산 103승73패 26세이브 방어율 2.46의 빼어난 성적을 남겼으나, 8년이라는 짧은 경력이 그가 얼마나 빨리 시들었는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의 연투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독식하며 롯데를 챔피언에 올려놓은 일은 프로야구의 고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7차전 동안 5경기에 등판한 그는 무려 40이닝을 던졌으니 롯데 마운드를 거의 홀로 지킨 셈이다. 아마시절에도 그는 1981년 실업 정상을 다투는 코리안시리즈에서 경리단을 상대로 6경기에 모두 등판할 정도로 철완을 과시했다. 그는 요즈음 같으면 한창 던질 나이인 32세의 나이에 아쉽게 유니폼을 벗었다.

1984, 85년 연속 20승을 넘어서고 86년에도 19승을 거두었던 그의 모습이 찰나에 사라진 듯 했다. 평범함을 죽음보다 싫어했고, '야구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갈망했던 그이기에 그의 인생사에는 그림자들이 깔려있을지 모르지만 남해인의 기상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최남수  1941. 4. 25 영지   행정고시 합격, 충북도경국장, 치안감, 치안정감

                                

1941년 4월 25일 영지리에서 태어나고, 난령초등학교와 남수중학교를 거쳐 남해수산고등학교(00회)와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대표적인 남해군 출신의 경찰 고위직이다. 1968년 행정고시에 합격, 정부부처 사무관으로 잠시 일하다 경찰에 몸담은 그는 누구보다도 경찰의 발전을 위해 힘을 쏟았다. 특히 재임 중 경찰관 자질향상과 형사민원제도 개선을 늘 강조해 왔다. 그는 치안본부 수사부장과 충북도경국장을 역임하고, 1991년 8월 경찰청 개청과 함께 형사국장을 맡아 열정적으로 범죄와의 전쟁 을 지휘해온 야전사령관이었다.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는 두 달 여를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민생치안 업무를 점검했고, 일요일인 사망 당일인 1992년 4월 5일에도 정상 출근해 일을 하다 오후 4시30분쯤  서울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구기유원지 부근에서 산책도중 과로로 쓰러져 종로구 평동 고려병원으로 옮기던 중 한창 일할 나이인 51세에 순직했다. 그의 죽음은 동료 후배들과 향우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고 당시 정원식 총리도 조의를 표했다.

 당시 경찰청은 순직한 최 치안감의 장례를 4월 9일 경찰청장으로 치루고 묘지는 동작동 국립묘지 경찰묘역이다.


  


최금경(崔金莖 독립운동가)

  

1909년 1월 25일 영지리에서 태어나 남해중학교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 재동경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연사로서 전국 순회 연설을 하며 민족 자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완바오산(萬寶山) 지역에서 한·중 두 나라 농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일제의 계략을 간파하고 조선총독부의 실정을 알리는 격문 약 2,000매를 인쇄하여 서울의 각 학교에 배포하여 동맹 휴교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받았다. 일제는 이 완바오산 인근의 수로 공사를 빌미로 한, 중 농민 간 이간질을 노리고 국내 항일정신을 반중 정서로 전환시키며 만주사변을 일으킬 책략이 숨어있었다.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5년 8월 15일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박정주  예비역 육군 소장 단국대학교 법학과 교수

영지리 1076번지에서 1949년 2월 10일 태어나 삼천포 문성초등학교, 제일중학교, 대구 능인고등학교를 거처 1971년 제 27기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83년 미국 센츄럴 미시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9군단 사령부 참모장과 1987년 제25사단장과 1991년 학생중앙군사학교 학교장 등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32년간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평소 외유내강의 정신으로 철저한 자기 관리와 꼼꼼한 경영 관리로 군내에서도 정평이 났다. 전역 전에는 학구파 장교로 1983년 미국 지휘참모 대학을 1년 연수하고 2003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 정책과정 제55기를 수료하였다. 전역 후에는 전공을 살려 2004년부터 단국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고 상훈으로는 1992년 보국훈장 삼일장, 1995년 대통령 표창, 1998년 보국훈장 천수장 등 다수가 있다.   



 

@최남수  1941. 4. 25 영지   행정고시 합격, 충북도경국장, 치안감, 치안정감

                                

1941년 4월 25일 영지리에서 태어나고, 난령초등학교와 남수중학교를 거쳐 남해수산고등학교(00회)와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대표적인 남해군 출신의 경찰 고위직이다. 1968년 행정고시에 합격, 정부부처 사무관으로 잠시 일하다 경찰에 몸담은 그는 누구보다도 경찰의 발전을 위해 힘을 쏟았다. 특히 재임 중 경찰관 자질향상과 형사민원제도 개선을 늘 강조해 왔다. 그는 치안본부 수사부장과 충북도경국장을 역임하고, 1991년 8월 경찰청 개청과 함께 형사국장을 맡아 열정적으로 범죄와의 전쟁 을 지휘해온 야전사령관이었다. 1992년 3월 24일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는 두 달 여를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민생치안 업무를 점검했고, 일요일인 사망 당일인 1992년 4월 5일에도 정상 출근해 일을 하다 오후 4시30분쯤  서울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구기유원지 부근에서 산책도중 과로로 쓰러져 종로구 평동 고려병원으로 옮기던 중 한창 일할 나이인 51세에 순직했다. 그의 죽음은 동료 후배들과 향우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고 당시 정원식 총리도 조의를 표했다.

 당시 경찰청은 순직한 최 치안감의 장례를 4월 9일 경찰청장으로 치루고 묘지는 동작동 국립묘지 경찰묘역이다.


  


최금경(崔金莖 독립운동가)

  

1909년 1월 25일 영지리에서 태어나 남해중학교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 재동경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연사로서 전국 순회 연설을 하며 민족 자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완바오산(萬寶山) 지역에서 한·중 두 나라 농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일제의 계략을 간파하고 조선총독부의 실정을 알리는 격문 약 2,000매를 인쇄하여 서울의 각 학교에 배포하여 동맹 휴교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받았다. 일제는 이 완바오산 인근의 수로 공사를 빌미로 한, 중 농민 간 이간질을 노리고 국내 항일정신을 반중 정서로 전환시키며 만주사변을 일으킬 책략이 숨어있었다.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5년 8월 15일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박정주  예비역 육군 소장 단국대학교 법학과 교수

영지리 1076번지에서 1949년 2월 10일 태어나 삼천포 문성초등학교, 제일중학교, 대구 능인고등학교를 거처 1971년 제 27기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83년 미국 센츄럴 미시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9군단 사령부 참모장과 1987년 제25사단장과 1991년 학생중앙군사학교 학교장 등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32년간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육군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평소 외유내강의 정신으로 철저한 자기 관리와 꼼꼼한 경영 관리로 군내에서도 정평이 났다. 전역 전에는 학구파 장교로 1983년 미국 지휘참모 대학을 1년 연수하고 2003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 정책과정 제55기를 수료하였다. 전역 후에는 전공을 살려 2004년부터 단국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고 상훈으로는 1992년 보국훈장 삼일장, 1995년 대통령 표창, 1998년 보국훈장 천수장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