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명란젓의 역사
일본어에서 명태는 맹타이(明太)라 흔하게 불린다. 물론 스케도우다라(スケトウダラ) 라는 원어가 있다. 명란젓은 명태라는 말에 알이라는 의미의 코(子)를 붙인 맹타이코(明太子)가 대세이다. 다라코(たらこ.鱈子)라 하기도 하며 실제 아래의 두 저자는 다라코라 해야 맞다고 한다. 여기에 고추라는 의미의 당신자(唐辛子)라는 말을 붙여 토가라시맹타이코(唐辛子明太子)가 정식 명칭이다. 명칭에서 보듯 명란젓은 일본에서 대유행이고 반찬으로 뿐만 아니라 레시비나 식품첨가물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우리의 명란젓과는 약간의 맛 차이가 있지만 소금에 절여 젓을 담기보다는 조미료를 탄 액을 뿌려 젓갈처럼 먹는 점이 조금 다르다. 좀 더 진화한 모습의 명란젓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젓은 일본어로 しおから塩辛이다.
2008년 8월 역사학자이자 충남대학교 초빙교수였던 이마니시 하지메(今西一)와 나카야마 미쓰오(中谷三男)에 의해 『명란젓개발사(明太子開発史)』가 출판되어 역사적인 자료에 기초한 명란젓의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로 보는 『세종실록(世宗実録)』에 “1424년 (한국의)감사가 명태알젓을 헌상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후 명태를 가공해서 먹는 식문화가 한반도에 널리 알려지고 일본에 전해진 것은 에도(江戸)시대이다. 일본에서도 예로부터 명태가 어획되었고 1903년부터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명태 어업이 본격화 되었다. 그 알을 젓으로 담아 자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21년에 걸쳐서 명태알에 빨간색 색소를 첨강하여 「紅葉子」가 개발되었고 단지에 넣어 홋카이도(北海道)와 야마카게(山形)、니가타(新潟)、토쿄(東京)、나고야(名古屋)、오사카(大阪)、시모노세키(下関) 등으로 출하되었다. 상기와 같이 한국에서는 예부터 명태 알을 젓으로 담아 먹었다.1800년대에 누가 고안할 것도 없이 고추를 넣어 담는 것이 정착하게 되었다. 1900년 다수의 일본인이 한국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1907년 일본인 히구치 이츠하(樋口伊都羽)가 어민들이 자가 소비를 하고 있던 것을 상품화하여 대대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히구치는 점포를 부산으로 이전하여 명란젓의 원조라는 상표로 판매했다.(1907년 당시 유력한 역사적인 자료는 쓰구치와 그 관계자들의 자료이다)
그 당시 명란젓은 고추가 들어간 것으로 조미액을 뿌려 만든 것이 아니다. 그 후 히구치 상점은 많은 명사들의 지원을 받아 아부 번창하게 되었고 종전 후 일본 명란젓의 중심은 시모노세키로 옮겨졌다 .러일전쟁 진후부터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철도성(현 JR 그룹)은 시모노세키와 당시부산간에 부관연락선(釜関連絡船)을 운항했다. 이 연락선을 경유해서 명란젓이 시모노세키로 수입되었다. 그 당시에는 고추와 마늘을 넣어 김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2차 대전후 시모노세키는 한국과 가까운 탓으로 홋카이도산 「모미지코(紅葉子)」가 대량으로 모였다.
1947년 종전 후 시모노세키의 유세이상점(油政商店)의 야마네 고죠(山根孝三)가「모미지코(紅葉子)」를 사 모았던 것이다. 더욱이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처갓집이던 홋카이도에서「紅葉子」를 사 모으고 고춧가루를 뿌린 명란젓을 연구해서 소량이지만 독자적으로 판매하고 잇던 타카이 에이이치로(高井英一郎)가 야마네(山根)의 지원을 받아 해산물 판매점을 열고 미야모토상점(宮本商店)의 마에타 이치오(前田一男)와 함께 고춧가루를 넣은 명란젓을 판매했다. 그결과 1954년 타카이가 마에타를 대표로 영입하고 등기부상 일본 최초의 명란젓 전문점을 시모노세키에 세웠다.
그 때의 명란젓은 통칭 산포형(散布型), 마부시형 명란젓(まぶし型明太子)으로 불렸다. 종래의「紅葉子」에 고춧가루나 주박을 뿌린 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원료는 화물열차로 운반되어 마부시형의 명란젓에 고춧가루나 주박등을 산보하는 것이 날짜의 경과로 인해 품질이 저하를 개선하는 측면도 있었다.
당시 상화을 아는 사람은 이 명란젓을 “개조명란젓이라 불렀다”고 설명한다. 또 유세이 상점에 이 명란젓이 엄청 들어왔고 술을 넣거나 2~3일 숙성시키는 등 맛을 내기 위한 실험이 행해 졌다고 한다. 1960년 타카이 상번이 돤하고 1961년 같이 근무하던 마에타이치오가 마에다수산(前田海産)을 설립했다. 1980년 타카이 상점에 근무했던 야모모토 다케시(山本剛)가 네우오식품(ねうお食品)을 설립했다. 같은 해 다카이의 차남 타카이 히데키(高井秀樹)가 "이리이치 식품"을 창립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의 일본에서의 명란젓을 말하면 하쿠다(博多)의 이미지이지만 2차대전 전의 명란젓의 취급량은 시모노세키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949년 1월 10일 하쿠다의 후쿠야에서 「타라코(たらこ)」라는 상품명으로 발매되었다. 그때 점포어귀에 진열된 것은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것이고 홋카이도나 시모노세키에서 제조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품명은 부산 것을 본 딴 「맹타이」였다. 꽁치 한 마리가 10엔이었던 시대로 복어 한 마리는 120엔이었다. 이때부터 후쿠야의 카와바라 요시오(川原俊夫)는 현재 조미액으로 절인 고추명란젓 스타일을 연구하고 있었다. 카와바라는 한반도에서 해산물점의 차남으로 태어나 명란젓에 대한 정이 깊었다. 1948년 10월 카와바라는 하쿠타의 나카오키 시장에서 식료품점인 후쿠야를 설립하고 그 다음해에 판매를 시작했다. 카와바라는 그 이후에도 중국 식재료를 취급하면서 고추명란젓을 연구하고 있다. 10여년 노력의 결과 1960년 개량된 고추명란젓이 “맛의 명란젓”이란 이름으로 발매되었고 레시비로 무료배포 등으로 하쿠다 중심으로 뻗어갔다.
이 후쿠야의 고추명란젓이 명란젓 업자의 급증으로 나타났고 1960년대 많은 명란젓 업자가 생겨났다. 1966년 나키우미야,1974년 야마모토물산,1977년 네후쿠가 창업하며 차차 창업자가 많아졌고 1980년 유수의 업자에 의해서 박스 제품이 제조되어 일본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최근에는 요정이나 오래된 장유메이커 등에서 명란젓이 취급되게 되었고 좋은 재료를 사용한 고급품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명란젓 업자의70~80%가 후쿠오카시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상 今西一,中谷三男 共著『明太子開発史』(2008.8. 成山堂書店刊)에서 일부 발췌.
여기서 주는 교훈은 이미 김치도 연구 개발 결과나 열의가 일본에서 더 높다. 때문에 국제 음식표준에서 홍역을 이미 치룬 바가 있다. 이제 우리나라는 간장이나 된장도 일본 눈치를 봐야 할 처지이다. 이 정도의 연구는 정말 놀라울 뿐이다. 국내에서 장유나 발효식품, 젓 등의 연구소가 있지만 아직 그 결과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불고기처럼 그 지위를 잃을 것 같은 명란젓이 안타깝다. 언젠가 현대판 부관페리호의 식당에서는 그 일본 명란젓을 신나게 한국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2009.09.27 14:19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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