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남해대교 역사
위치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 남해 노량리
건설기간 : 1968년 5월 10일 - 1973년 6월 22일
구조형식 : Two-hinged 현수교
교대 - 중력식 콘크리트 블록
기초 - Steel Open Caisson
보강형 - Orthotropic Deck Plate Box Girder
중앙경간장 : 404m, 측경간장 : 128m, 총연장 660m 형하고 : 25m
주탑의 높이 : 60.685m
주케이블 : 전직경 258mm, 7Strand로 구성, 소선하나의 직경은 5mm
노폭 : 2차선 차도 7.2m, 보도 양쪽 1.2m X 2, 총 9.6m
총공사비 : 18억 7천만원
등급 : 일반국도
완도, 강화, 안면, 거제도에 이어 다섯 번째로 완성된 연육교이며,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장대 현수교였다.
교량이 위치하고 있는 노량리 주변은 섬진강 하구가 약 10km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심이 36m나 되고, 조류가 빨라 사장 장대교의 건설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
1966년 4월 도진설계사무소에서 기술조사를 실시했다. 건설부 초청으로 내한한 일본 도로공단 구리하라 토시오(栗下敏男)와 니시오 미쓰오(西尾道雄) 씨 등의 자문으로 지지대 설치가 용이한 암반이 있던 현위치로 결정되었다.
현수교안과 트러스안이 논의되었지만, 결국 현수교안이 채택되어 한 번의 설계 변경과정을 거쳐 완공되게 되었다. 계약 설계는 건설부와 도진설게와 1969년 9월이고 11월에 설계가 완성되었다. 시공은 현대 건설(주)이었고 자재와 기술 제공은 신일본제철,이시가와지마하리마 건설,이토추상사 등이다.
설계활하중은 당시 AASHO에 규정된 가장 큰 하중인 HS 20-44를 사용했으며, 기본풍속은 25m/s, 온도하중은 기준온도에 대해 ±30℃, 지진하중은 설계계산에 사용하지 않고, 수평가속도 50g를 사용 안전에 대한 검사를 하였다.
주요 부재 사용량을 보면 강재 4,192t, 시멘트 269,000t이 사용되었으며, 연인원 405,843명이 동원된 대규모 역사였다.
남해대교의 완공은 지역적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남해섬이 육지와 연결되어 이 지방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특히 남해안의 아름다운 관광지로 부각되게 되었다.
남해대교의 완공은 우리나라의 교량사의 한 획을 긋는 대역사가 아니였나 생각된다.
비록 일본의 기술을 빌어 건설했고, 세계적인 수준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장대 교량뿐 아니라 일반적인 교량에 대한 기술력 또한 변변치 않던 시절, 기술 획득 등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했고 우리의 손으로 이런 교량을 건설했다는 자긍심이 있다. 교량 건설에는 남해 출신 정치 거목 금암 최치환 선생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이하 사진 출처: 남해대교와 최치환선생.사단법인 대한노인회 남해지부.1989>
상판을 옮기는 모습
상판을 가설하는 모습
상판을 옯기는 모습
상판 옮기는 모습
앵커부분 시설 공사
상판지지 선연결공사
상판 가설모습
교각을 세우는 모습
거의 완성되어 개통직전 당시 모습
남해대교의 아름다운 자태<사진제공: 필자사진>
착공예정인 제2남해대교 모습
<사진제공: 남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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