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탑(塔) 이야기
경주에 가면 석탑들이 많이 남아있다. 일부는 쓰러져 잡초에 묻혀 있기도 하고 잘 정비되어 인공미를 가미하기도 했다.
삼국유사는 경주를 가리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 있는 듯하다)고 했다.
우리에게 흔한 석탑은 종교적인 의미를 벗어나 우리 문화의 총체적인 진수가 담겨 있다. 이름 모를 석공의 시대정신과 시대적인 배경을 담은 고유문화의 대표성을 간직하고 있다.
불교적으로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 되었지만 우리만의 정형으로 석탑의 나라로 불린지 오래다.
한 조각 구름과 벗해 온 천년 무욕의 가르침을 찾아 정 자국에서 석공의 땀을 생각하고 일렁이는 바람에 시대의 무상을 느낀다. 단단한 돌로 나무 가구 짜듯 정교하고 흙 주무르듯 자유자재의 조형물 독창성과 우수성을 유지해 왔다.
한국미술사의 기반을 닦은 우현(又玄) 고유섭 선생은 이를 화엄사상인 즉여(卽如)라 하며 “개별이 전체에 포괄되며 개별로써 전체를 드러내는 특성이 있으며 신앙, 생활, 미술이 비분리되는 불이(不二)나 즉여(卽如), 크게 하나 됨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즉여는 인위적임을 배제하고 일체의 유(有)도 무(無)도 아닌 무엇을 암시하며 자연을 암시하면서 완전한 조화를 표현했다면 그 대표적인 것이 말없이 서있는 탑이다.
우리의 탑은 대부분 석탑이다. 질 좋은 화강암이 흔한 탓이다. 거기에 보존성, 전란이 많았던 우리의 상황을 대비한 조상들의 혜안이다.
우리나라 탑의 구조는 크게 기단부(基壇部)·탑신부(塔身部)·상륜부(相輪部)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기단부가 생략되고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략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 시기로,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 양식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樓閣形式)의 다층으로 건립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목탑의 유행에 이어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에서 석탑이 건조되었는데, 신라의 황룡사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빙되어 공사를 담당하였으며, 일본의 초기사원 창립에 백제의 사공(寺工)이나 와박사(瓦博士) 등이 건너가 공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entasis : 배흘림)를 표시한 장방형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가설하였으며, 다시 두공(枓慊)양식을 모방한 3단의 받침이 있어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이것 또한 목조 건물의 가구(架構)를 본받고 있는 것이다. 즉, 목조 가구의 세부까지도 석재로 충실히 모방한 한국 최초의 석탑으로서, 백제에서 석탑이 발생하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탑신부 몸돌 1층에는 보통 부처님을 보위하는 팔부신중상(八部神衆像)이 조각되기도 했으며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2층 위로는 새겨넣지 않았다. 몸돌, 즉 탑신 위에 기와지붕 모양의 돌이 얹어져 있는데 이를 지붕석 또는 옥개석이라 하고 표면은 마치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경사를 주었기에 낙수면이라 한다. 낙수면은 고려시대로 넘어 오면서 경사가 가팔라진다. 낙수면의 흐름이 처마 끝에서 위로 치켜올라가는데 이를 반전이라 한다. 이 또한 후대에 올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옥개석 끝에 구멍을 뚫고 풍경을 매달고 이를 풍탁(風鐸)이라고 부른다. 옥개석 밑에는 겹겹의 주름이 보이는데 흔히 옥개받침이라 하며 목조건물의 서까래를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옥개석의 낙수면과 낙수면이 마주하는 지점을 우동(隅棟)이라 한다. 또 몸돌에는 가장자리에 기둥모양을 조각했는데 우주(隅柱)라고 하고 일반 목조건물의 기둥을 본떠서 만들었다. 중앙에 구멍을 파서 사리공이라 하고 부처님의 사리나 고승대덕의 사리, 그리고 탑의 건축기록과 함께 사리함을 두거나 당대의 희귀물을 넣어 타임캡슐 역할 했지만 도리어 도굴의 표적이 되었다.
신라의 석탑은 전탑(塼塔)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의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으로 이 탑은 전탑 양식에 속하는 것 같으나 그 재료는 벽돌이 아니고 석재이다. 이 탑은 장대석으로 구축한 단층의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탑신부를 받기 위한 널찍한 1단의 화강암 판석 굄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탑재는 백제 석탑과는 달리 흑갈색의 안산암이다. 즉, 안산암을 소형의 장방형 벽돌같이 절단하여 쌓아올린 전탑형을 이룬 것이다. 이 탑은 634년(선덕여왕 3)에 건조된 것으로 신라 석탑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백제계의 석탑은 화강암만을 사용하여 목탑계 양식을 따른 반면, 신라는 화강암을 혼합하였으되 안산암을 주재료로 삼아 전탑계 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 또 양국의 초기석탑은 그 기본 평면을 정방형으로 하여 다층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석재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탑의 층수가 홀수(3,5,7,9...)으로만 되어 있는 이유는 불교적 사상과 음양오행설이 가미된 좋은 의미의 숫자이다. 불교에서는 홀수를 양의 수로 생각한다. “음”이라면 음은 잡귀와 부정과 난삽함을 뜻하고 어두운 측면이다. 당연히 양은 그 반대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10을 만(卍)이라고 읽는다. 최고의 경지를 뜻한다. 인간의 경지로는 9까지가 되고 10은 신의 경지이다. 바둑에서 중 최고의 고수를 9단이고 10단은 없다. 바로 불교 최고의 충족 개념이고 신의 경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고다 공원의 경천사지 탑은 10층으로 라마교의 영향으로 본다.
탑의 층수를 셀 때 기단부와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 중 지붕 형태의 옥개석만 세면 층수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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