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의미

책향1 2009. 9. 25. 15:26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의미


 진린(陳璘. 자는 조작, 호는 용애)은 중국의 대성으로 광동지방에서 대대로 진현유와 진현관을 배출한 명문의 후손으로 1597년(선조 30) 왜적이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이 위태롭게 되자 명나라에서 다시 원군을 보내어 왜적을 격퇴했는데 이 때 진린이 어왜도총관 전군도독부 도독으로서 수병 5천을 거느리고 그해 12월 20일 강진 고금도에 도착,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7월 16일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공 세워 무명을 떨쳤고, 이듬해 귀국하여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으며, 1602년 세상을 뜨자 태자소보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강(忠康)이라 하였다.
참전 초기의 진린은 충무공의 공을 가로채거나 적장의 퇴로를 열어주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진린은 사람들에게 충무공을 “이야(李爺)는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고 말했다. 이 때의 야(爺)는 윗어르신을 의미한다. 진린은 명나라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다”고 극찬했다. 또한 충무공에게 내린 팔사품을 받게끔 한 인물이다.(팔사품八賜品: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에게서 받은 선물인 명조(明朝) 팔사품(八賜品·)이 보물 제440호. 1966년 2월 4일 지정)
임란 당시의 명나라의 진린 장군에 대해 우선 알 필요가 있다. 진린 장군의 후손은 말년 한국인이 되었다. 그의 손자 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난징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후 다시 해남현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므로 광동 진씨의 뿌리가 되었다.
팔사품은 도독인·호두령패·귀도·참도·독전기·홍소령기·남소령기·곡나팔 등 여덟 가지 군대용 의장물로 구성돼 있다. 도독인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은 각 2개씩이어서 전체 유물의 수는 총 15점이고 충무 충렬사에 보관에 보관되어 있다. 팔사품을 그린 그림은 남해향토역사관에 병풍으로 보관되어 있다. 
 경천위지는 ‘천하를 잘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의 보천욕일은 설명이 좀 필요하다. 우선 보천욕일은 ‘어마어마한 공적’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중국 신화에서 비롯됐다.
 ‘보천’은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의 <남명훈(覽冥訓)>에 나온다. 옛날에 물을 다스리는 신인 공공(共工)과 불의 신 축융(祝融)이 싸워서 공공이 패하자 화가 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인 불주산(不周山)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갈라지며 홍수와 큰 불이 났다. 우주를 창조한 여신 여와는 강에서 ‘오색 빛깔의 돌을 골라 불로 녹여서 이지러진 하늘을 보수하고(煉五色石以補蒼天)’ 홍수를 막아 재앙을 다스렸다.
 『회남자(淮南子)』는 전한(前漢)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전 21권이다.
유안이 전국의 빈객과 방술가(方術家)를 모아서 편찬한 것으로, 『한서』 〈회남왕전(淮南王傳)〉에는 〈내서(內書)〉 21편, 〈외서(外書)〉 다수, 〈중편(中篇)〉 8권을 제작했다고 했는데 현재는 이 중 〈내서〉 21권만이 전하고 있다. 처음에 원도편(原道編)이라는 형이상학이 있으며, 그 뒤에 천문·지리·시령(時令) 등 자연과학에 가까운 것도 포함하였으며, 일반 정치학에서 병학(兵學), 개인의 처세훈(處世訓)까지 열기하고, 마지막으로 요략(要略)으로 총정리한 1편을 붙여서 방대한 내용을 통일하였다.

‘욕일’은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남경(大荒南經)’에는 나온다. 태양의 신 희화(羲和)에게는 10개의 태양인 10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쪽 바다 밖 탕곡의 큰 나무인 부상(扶桑)에 살았는데 10개의 태양은 하루씩 번갈아가며 하늘에서 감시했다. 희화는 그날의 일을 맡은 아들인 태양을 늘 수레에 태워 바래다 주었는데 매일 아침마다 수레에 오르기 전에 ‘태양들을 데리고 감연에서 깨끗하게 목욕했다(方日浴于甘淵)’고 전해진다.
산해경(山海經)은 중국 선진(先秦)시대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대표적인 신화집, 지리서로, 곽박(郭璞)이 기존의 자료를 모아 저술하였다.저자 곽박(AD317~420)은 동진사람이라 전해진다. 본래 산해경은 인문지리지로 분류되었으나, 현대 신화학의 발전과 함께 신화집의 하나로 인식되고 연구되기도 한다. 산경(山經)과 해경(海經)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 각지의 산과 바다에 나오는 풍물을 기록하였다. 내용 중에는 상상의 생물이나 산물이 있어서 지리서라고 하지만 전설 속의 지리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서라고 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산해경에는 중국의 역사로서 포함되기도 하는 황제 (전설), 치우, 소호, 전욱, 고신씨, 예, 요임금, 순임금이나, 조선, 청구, 천독 등의 실제로 있었던 지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산경(山經)」 5권, 「해경(海經)」 13권으로 모두 18권이다.
부상(扶桑)은 해가 뜨는 곳을 함지(咸池)는 해가 지는 곳을 말한다. 진린장군에 대해서는 동정마애비에 현란한 문체로 나온다.
정식 이름이 장량상동정마애비로 임란 시 명의 유격 대장 장량상이 기고만장하여 허세를 부린 흔적이 역력하다. 주위를 당초문으로 두른 이비는 도 유형문화제 제27호로  남해읍 선소리 바닷가에 있으며  높이 2.5m, 폭 1.5m 암각문으로 되어 있다.
정유재란 종전 해인 1598년 장량상이 새겼다. 삼전도비가 세워진 해로부터 꼭 47년 전의 일이다. 2003년 9월 13일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바닷가로 떠밀려 넘어졌으나 다시 세워 보존하고 있다.
1771년 귀양길의 유의양은 노량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나는 점심을 먹을 동안에 서원에 올라가고 싶기는 하였으나 나의 길이 죄명으로 바삐 가는지라 올라가 보지 아니하였다.” 던 유의양은 남해문견록에서 2월 14일 경 이 마애비를 보고서는“글씨가 명나라 고적이 완연하니 아동 사람이 대명 은혜를 어느 때인들 잊으리오?”라며 명의 은혜를 찬양했지만 바로 호란을 잊은 대 유학자의 공리 또는 명분 쫓기는 너무 지나치다.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태양을 목욕시키는 일, 신이 할만한 일로 충무공의 우국충정을 말한다.
우암 송시열이 쓴 이충무공묘비각의 보천욕일의 현판(사진)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다.

 


 

2009.09.25 15:26 남해.2009.10,1망운신문 게재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도(浮屠)란 무엇인가?  (0) 2009.11.20
일본 명란젓의 역사  (0) 2009.09.27
사진으로 보는 남해대교 역사  (0) 2009.09.22
탁본의 이해  (0) 2009.07.12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과 숭정기원후  (0) 2009.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