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탁본의 이해

책향1 2009. 7. 12. 10:54

 


 

탁본의 이해

 


이제는 탁본을 수월하게 볼 수 있다. 큰 박물관의 수장고에나 깊이 있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향토역사관에도 큰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한자가 많은 비문 탁본을 보고 어렵다고만 하고 자세히 볼 여유는 없다. 이곳의 탁본에는 나무결이 나타나 있고 탁본 원본이 나무임을 알려 준다. 체험의 일환으로 탁경 작업 즉 경문 탁본을 위해 화선지와 먹물,  솜방망이를 항시 비치하고 있다.

돌이나 나무, 금석 등에 새겨진 글이나 그림을 종이에 그대로 박아낸 것.박아내는 데 쓰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자 가장 오래된 기술 가운데 하나이다.탁본을 하는 목적은 대상이 마모되기 전에 원문을 보존하려거나 정확한 판독을 위해서다.서체연구가나 역사학자들에게는 문양과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 매우 중요하다.

  탁경도 탁본과 범주에 들어가고 작업의 성격이 비슷하다. 그 대상이 경전이라는 점만 다르다. 흔히  보는  어탁도 물론 탁본의 일종이다. 필자는 탁본에 대한 경험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울산 천전리 바위그림(암각화) 탁본이다. 이 그림은 1970년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발견 되어 국보 147호이다. 당시 30여 명이 동시에 작업할 정도로 대형 그림이었다. 

탁본을 하려면 물론 작은 대상은 앉아서 편하게 할 수 있지만 큰 대상은 사다리나 밧줄을 타야하고 한 두 사람이 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80년대 초 겨울방학에 경주 남산 미륵곡 보리사의 무명 마애불을 탁본했다. 한참 열심히 탁본을 하고 있는데 그만 주지 여승에게 들켰다. 스님은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학생들이 도리어 훼손에 앞장선다는 질책과 함께 탁본을 해서 팔아먹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고 정중히 사과를 올렸다. 그런데 땀 흘려 거의 완성된 탁본을 스님이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는 바람에 한 동안 그 아쉬움에 마음이 산만했다. 그 후 전 진성여왕 12지 탁본 등 수없이 탁본을 다녔다. 문화 유적이 비교적 산중에 있어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 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다. 통도사 배례석 탁본에서는 시대를 달리한 문양이었지만 누워 있는 원본의 성격상 쉽게 할 수가 있었다.

남해에서 무민사 앞 비문 탁본을 시도 했으나 허가 여부로 취소되었다.

탁본을 하기 전에 문화재일 경우 탁본에 대한 허가를 관공서로부터 반드시 받아야 한다.

탁본을 하기 위해서 솔 등으로 대상에 있는 이끼나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 그리고 분무기로 대상에 물을 뿌리고 한지 등을 붙이고 마르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물기가 있는 상태에서 먹물을 묻힌 솜방망이(탐폰)로 세밀하게 먹물을 입힌다. 이 과정에 종이에 물기가 너무 없으면 원본에서 떨어지기 쉽고 그 반대로 물기가 많으면 먹물이 번지는 현상이 있다.

때문에 종이의 물기가 적당히 건조 되었을 때 작업시간을 고려해 시작해야 한다. 먹물은 수분이 있으므로 잘 번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약품을 타기도 하지만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이 소금이다. 먹물에 소금이 들어 있으면 잘 번지지도 않을뿐더러 보관상 좀이 먹는 것도 예방할 수 있다. 소금 이외에 탄닌이 있는데 이 또한 번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다. 요철이 심한 부분 즉 양각이 심한 불상의 겨우 종이가 찢어지는 등 작업이 어렵기는 하나 배접과정에서 이어 붙이므로 별 문제가 안된다.

탁본에는 건탁(乾拓)과 습탁(濕拓)이 있다. 위의 방법은 습탁이다. 동전 등에 종이를 대고 연필심(탁본 먹)으로 문지르는 방법은 건탁이다.

한국 사람들은 탁본을 말하면 광개토대왕 비문 변조 사건이 연상된다. 설이 오랫동안 있었지만 최초로 공개적으로 알린 사람은 당시 메이지(明治)대학 강사였던 이진희 씨였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광개토태왕비 변조설이 역사 논쟁 테마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진희 씨가 쓴 「광개토왕릉비의 탐구」란 한 권의 책이 기폭제였다. 이진희 씨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광개토태왕비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에 온 사람은 현지에서 간첩 활동을 하고 있던 사코우 가케노부( 酒勾景信)중위라는 것과, 그렇게 들여온 쌍구가묵본을 이용해 일본 최고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참모본부가 임나일본부설을 창출해내는 과정을 추적하여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이진희 저, 이기동 역,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일조각)

비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한 사실은 현재 거의 기정사실이지만 아직도 변조여부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시인을 하지 않고 있고 중국학자 왕건군도 동조하고 있다. 비문해석에 따라 임나일본부설과 고사기의 진쿠여왕의 한반도 진출설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고 전전 일본역사 교과서에서 바다를 건너는 일본군을 바닷가에서 환송하는 진쿠의 모습과 80년 초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철자원의 확보를 위해 김해 지방에 진출”을 지도까지 곁들여 소개하고 있었다.

역사 왜곡에 철저한 일본인들이 100년 이후의 탁본에서 자획이 왜 더 명확한지에 대한 설명이 없고 그냥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구석기 시대 유물을 11점이나 발견해 일본의 역사를 BC7세기로 끌어 올린 "신의 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교수도 사코우나 별반 다름이 없다.

 그들의 역사 왜곡은 최근의 일이 아니라 유사이래 그들만의 전통이다. 그들만의 선민의식 강조에 역사적인 물증이 이용되고 그 중 중요한 것이 탁본이다.

 

2009.07.12 10:54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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