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구운몽 ‘남해 저작설’ 불충분한 논거와 주장 비판

책향1 2009. 9. 16. 14:53

 

 

     

구운몽 ‘남해 저작설’ 불충분한 논거와 주장 비판

 

구운몽은 유학자 서포의 몽환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저술지에 관해 지역에서 많은 논란이 있고 외부의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가 있다. 『구운몽』의 창작 시기에 대한 논쟁은 김만중이 선천 유배 시절 혹은 남해 유배 시절에 지어졌는지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된다.

지역에서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남해 저작설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관광을 녹색 성장 산업의 주축이라 할 만 한 남해 지역에서 남해 저작설을 주장하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만큼 서포와 남해의 인연을 강조할만한 여러 정황은 충분하다.

누구나 지역 정서에 반하는 주장은 공감을 얻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인간적인 질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글을 적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은 저술지가 남해냐 아니냐는 문제 보다 남해 저술지에 대한 정확한 논거를 제시하라는 요구를 하기 위함이다.

관광 분야에서 사실이 아니지만 관광자원화가 된 사례는 많이 있다. 덴마크의 인어공주라든지 겨울연가의 남이섬이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현상도 있다. 가공된 대상이라도 얼마든지 관광자원화 될 수 있다는 증거이다.

최근 전남 화순군에서 '방랑시인' 김삿갓,‥"화순서 6년간 머물렀다"는 논란은 "입증 자료 없다" vs "전해 내려온 이야기"로 조선후기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이 생전에 사망 직전까지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서 6년간 생활했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방랑시인으로서 행적이 뚜렷하지 않은 김삿갓이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 사랑채에서 6년간 생활하면서 주옥같은 작품을 남겨 이를 역사적으로 기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삿갓의 종명지(終命地 숨을 거둔 곳)를 논문을 통해 발표한 향토사가 문제선씨는 "김삿갓이 1841년과 1850년, 1863년 세 차례 화순을 다녀갔다는 사실은 김삿갓의 시와 글을 통해 역사적으로 확인됐다"면서 "그러나 유랑생활을 한 김삿갓이 한 곳에  6년간 생활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역사적 자료는 없다"고 말했다.(서울투데이. 2009. 9. 9.자 인용)

김삿갓의 작품 속엔 동복면과 관련한 시가 전해져 온다. 화순군에 따르면 그는 1841년 무등산~장불재~적벽을 지나 동복에 도착해 시를 남겼다.

김삿갓은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에 있고/적벽 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구나' 라며 적벽의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했다.

1850년 정치업이라는 선비의 사랑채에 머물던 김삿갓은 동복 관아의 협선루에서 시상을 얻어 작품을 남겼다. 그 때 썼던 시는 동복면사무소 앞 시비에 남아 있다.

이 김삿갓과 서포의 저술지 논쟁은 비슷한 양상이다. 명확한 역사적인 논증 없이 관광자원화를 해도 타당한지 여부이다. 다만 다른 점은 화순군내 향토사가의 논문에 의해 역사적 고증 문제가 제기되었고 반대로 남해에서는 고증은 명확하게 이루지지 않았지만 사실화하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학계의 주장을 반복하여 진리에 대한 편식현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문제의 단초는 지역 서포 연구가인 박성재씨의 논문성 기사에서도 언급한 오마이 뉴스 기사다. “남해군청은 (중략)이러한 추측을 바탕으로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남해군을 <구운몽>을 창작한 곳으로 홍보하고 있다. 관광 사업은 지역 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사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을 토대로 홍보할 때에는 수익성을 앞세우기보다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여러 학술자료들을 검토하여 고증된 사실만을 홍보해야 하는 것이 옳다. 자칫 지역의 발전을 위해 홍보자료로 쓰이는 역사가 왜곡된 것일 경우, 그 자료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그대로 역사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지역홍보에 앞장서는 각 지역자치단체들은 역사적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하고 확인된 사실만을 홍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오마이뉴스. 2004.5.24. 재인용)

핵심 내용은 남해군이 구운몽의 저술지로 고증되지 않은 채 수익사업인 관광 사업을 하므로 확인 된 사실만 홍보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위에 예를 든 문제선씨나 오마이 뉴스 기사의 주장은 사실상 객관성이 있는 주장이고 신뢰성이 있다.

저술지를 알기 위해서는 창작 시기를 규명하는 것이 빠른 길이다. 지금까지 저술지에 대해 장덕순교수는 남해 유배 시에 지었다고 보고 있으나(장덕순외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95), 정병욱교수는 10개월 미만의 시간을 보낸 남해보다는 14개월의 시간적 여유를 가졌던 선천 유배 시에 지었다고 보았다.(정병욱. 한국 고전의 재인식. 기린원. 1988) 또한 김병국교수는 여러 문헌들을 근거로 김만중의 남해에서의 말년의 모습을 정황적인 근거로 선천설을 지지했다.

이규경의『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이재의『삼관기』(三官記),김만중의 『선비정경부인윤씨행장』(先妣貞敬夫人尹氏行狀)등을 인용하여 국문학자 김태준씨가 ‘남해설’을 주장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이가원이 ‘선천설’을 주장하면서 두 설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가원교수는 김태준이 『윤씨행장』의 ‘영해(嶺海)’ 두 글자가 도암의 『삼관기』에는 ‘嶺南’으로 되어 있어서 활간(滑看)하여 남해의 피찬 시기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이 일어나자 이명구교수는 연대 고증을 피하려는 듯 그는 “두 사실은 서로 잇달아서 모부인에게 우사(憂思)를 끼친 연결된 사실인 만큼, 구운몽이 모부인을 위로하고자 지었다고 할진대, 그 저작 연대를 15년이라 단정 짓는 것보다 숙종 13년(1687년)부터 15년 사이라고 해두는 것이 무난한 태도”(김병국. 한국 고전문학의 비평적 이해. 서울대학교 출판부.1996.287쪽.재인용)라고 주장하였다.

여러 주장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결론지어지지 않고 ‘남해설’ 과 ‘선천설’이 양립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남해설’을 주장하는 김무조교수는『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보다『구운몽』이 늦게 저작되었다고 밝히면서, “서포가 인현황후 출척의 여화로 유배생활을 하였던 남해는 老莊思想에서 原流한 陶淵明의 무릉도원을 방불함직한 고장으로서, 서포는 거기서, 남해서 한국적 이상향을 발견했다는 주장이다.  서포가 그리는 憧憬의 마을은 도화가 피고, 청학이 와서 춤추고, 죽림에서 거문고를 타는 천년의 고장이었다. 거기가 바로 서포의 『구운몽』을 이룩하게 한 낙원이요, 무릉이었던 것이다.”(김무조,「金萬重」, 한국문학작가론2. 집문당. 2000.386쪽)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설성경교수 역시 ‘남해설’을 전제로 「구운몽의 구조적 연구(Ⅴ): 공간적 배경과 남해의 구전 소재」(설성경. 도남조윤제박사고희기념논총.1976.230쪽)는 불교적 성격을 지닌 전설류가 서포가 유배되었던 남해의 금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고, 주인공의 이름인 ‘성진’이라는 명칭을 지닌 지명이 남해에 세 곳이나 되며, 구운몽의 주요 사건인 석교상(石橋上)에서의 남녀 주인공의 만남이 용문사(龍門寺) 아래 있는 석교리(石橋里)의 돌다리 전설과 관련 있음에 주목했다. 이러한 ‘남해설’과 반대로 김병국교수는 「구운몽의 에피그라프 기몽: 서포와 그의 꿈」에서 『서포집』의 권1에 수록된 서포의 자기 체험적 시 「記夢」에서 『구운몽』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가원교수의 ‘선천설’을 잠정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러한 『구운몽』의 저술지 논쟁에서 결정적으로 ‘선천설’을 확증하게 된 계기는 김병국․정운채․최재남이 일본의 텐리(天理)대학에 소장되어 있던 『서포연보』를 발굴, 번역하면서 이루어졌다.

  

       <有詩曰 遙想北堂 思子淚 半緣死別半生離 又著書寄送 俾作逍遣之資 其旨 以爲一切富貴繁華

         都是夢幻 亦所以廣以慰其悲也>

 

부군이 이미 귀양지에 이르러 윤부인(尹夫人)의 생신(生辰)을 맞이했다. 시(詩)를 지어 이렇게 말했다. “멀리 어머님께서 아들을 그리며 눈물 흘리실 것을 생각하니, 하나는 죽어 이별이요 하나는 생이별(生離別)이로다.” 또 글을 지어 부쳐서 (윤부인의) 소일(消日)거리를 삼게 하였는데 그 글의 요지는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몽환(夢幻)이다.’는 것이었으니, 또한 (부군이) 뜻을 넓히고 슬픔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서포연보』(서울대학교출판부.1992.227쪽)에 있는 위의 글이 정묘년(丁卯年) 숙종 13년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서, 『구운몽』의 저작 시기는 선천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고 김병국교수는 「九雲夢 著作時期 辯論」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김병국의 연구로 ‘선천설’은 이제 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남해설’을 주장했던 설성경교수 역시 그의 논문 「구운몽의 주제와 표제의 의미망」에서 “그는 두 번째 유배지 선천(宣川)에서 유배지에서 보는 세상의 현실과 종교적 이념을 구운몽이란 소설 속에 투사시켰다.”(설성경. 구운몽의 주제와 표제의 의미망, 韓國民族文化. 2002. 145쪽)고 밝히면서 ‘선천설’을 인정하고 있다. 박성재 씨는 이 부분을 자주 인용하며  "몽환"을 구운몽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남해 저작설의 유력한 근거로 여기고 있다. 이와 함께 김무조교수는 '著書'라는 단어를 오늘날 의 책이냐 글이냐는 의문에 "심심풀이로 보냈다면 짧은 글일 수 있다"고 하나 전체 문맥으로 보면 "소일거리"라 함은 단순한 시편이기 보다 보다 긴 내용의 소설일 개연성이 높다.

지역 언론에 게재된 박성재씨의 논문성의 여러 글이 있었지만( 남해신문, 남해춘추8월호,남해문화휘보 창간호 9면, 남해시대 등), 그 글에서는 자신의 남해 저작설 주장에 대한 명확한 논거가 부족해 보인다. 또 주제나 내용이 거의 같은 글을 여러 매체에 싣고 있으므로 그 의도가 궁금하다. 

박씨는 「구운몽의 창작동기 및 사상적 배경의 단서를 엿볼 수 있다-⑥」에서 서포가 서새(西塞)에서 지은 적중작 시 5편을 전제하면서 "그 요지는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에 귀착한다는 것으로, 대부인의 근심을 위로하고자 하였으나, 대개 석가의 우언을 썼다’는 내용과, ‘구운몽은 서포가 유배시에 어머니의 근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하루 밤에 지었다’라고 한 내용 등에서 구운몽의 창작동기 및 사상적 배경의 단서를 엿볼 수 있다"(남해신문.2006.8.26)고 하며 저술지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창작동기와 사상적 배경으로 서새 즉 선천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박씨는 2009년 8월 20일경 필자와의  직접 면담에서 이런 여러 글에 대한 의문제기에 “서포연구 대가인 김무조박사가 그랬다”며 즉답을 회피했다. 당연하게 박씨의 글 구사 능력이나 연구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박씨의 글이 문제시 되는 점은 박씨 개인 주장이라기보다 김무조 교수의 주장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되풀이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박씨의 글에서 여러 차례 김무조 박사의 주장을 인용하거나 대변하고 있다.(위 언론사 글 등 참조)

박씨의 「구운몽의 저술지에 대한 한 남해군민의 소회」(남해뉴스.2009.9.13) 제하의 칼럼에서 “김무조 박사는 제317주기 서포선생 추모제 및 2회 학술강연회에서 주장하기를 ‘(전략)이 가운데 어머니에게 시를 써 보내면서 소일꺼리로 글을 보냈는데 ‘그것이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모두 몽환(夢幻)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이것이 바로 구운몽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夢幻“이라는 말이 바로 九雲夢의 주제와 같다고 하여 그렇게 단정하는 것도 남해(南海) 현지(現地)의 지리적(地理的) 조건(條件)에서 나오는 지명(地名)의 차용(借用) 등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고 했다. 또  남해춘추 8월호 「서포만필의 체제와 내용」에서 "사씨남정기가 먼저이고 구운몽이 뒤라고 밝히고 싶다며" 서포의 양대소설은 남해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몽환(夢幻)이 구운몽 주제와 같고, 지명 차용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선천 저작설을 부인하지만 이에 알맞은 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지명을 차용했다고 유력하게 남해가 저작설이 되는지 여부와 주제가 같아도 선천이 저술지가 아니란 점에 대해 논거와 설명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사료의 부족을 말하기 전에 선천으로 귀양 가기 직전 어머니에게 보낸 시 구절에 나타난 몽환이라고 해서 구운몽이 아니라면 왜 아닌지를 설명해야 옳다. 지명 차용도 남해와 관련 개연성은 충분히 있으나 차후에 그렇게 차용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연히 글을 적다보면 자신과 연관이 있는 지명이나 인명을 적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료가 부족한 점은 선천설의 김병국교수나 남해설의 김무조 박사나 마찬 가지다. 따라서 같은 입장에서 출발한 연구에서 정황을 추측할 수도 있다고 보면 김무조 박사나 박씨의 주장은 객관성이 부족한 주장임이 틀림이 없다. 지명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과 몽환이라는 말이 구운몽을 상징한다는 것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김무조 박사는 제317주기 서포 선생 추모제 및 제2회 학술강연회(2009.4.26. 용문사)에서 발표한 논문 「西浦小說 成立의 背景」에서

[盖我朝鮮 三面深海又多名山 往往有神異之蹟 皆其得名之所自也 即如長白山天池 金剛之山水 妙香之石龍窟 平壤之騏麟窟 漢拏之白鹿潭 智異之靑鶴洞 江華之塹城 鬱陵之絶島 阿斯達之三聖祠 扶蘚岳八仙之堂 築骨之求仙臺 牧丹之乙密臺等 諸名勝地名 不虛得也

여기에 보이는 天池, 山水, 石龍窟, 白鹿潭, 靑鶴洞, 塹城, 絶島, 三聖祠, 八仙之堂, 求仙臺, 乙密臺等은 모두 韓國人의 마음의 故鄕이요, 精神의 理想鄕이다. 西浦가 그리는 憧憬의 마을 桃花가 피고, 靑鶴이 와서 춤추고, 竹林에 거문고 타는 千古의 마을이다. 여기가 바로 꿈을 기르는 南海 龍沼와 花開, 龍이 바다와 육지로 오가고, 桃花가 떠서 龍門川으로 흐르는 濫觴, 거기가 西浦의 九雲夢을 이룩하게 한 樂園이요, 武陵인 것이다]에서

남해가 구운몽을 이룩하게 한 낙원이라 하지만 예문에서와 같이 서포는 조선의 명승지를 지명으로 곁들여 적었지만 이를 남해에 대입한 것은 결과에 맞추기 위한 억지로 보인다. 서포가 무릉도원을 노니는 선사상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예문에서 남해라고 적시하지 않았다. 구선대, 을밀대 등은 현존하는 다른 지역 명승지이고 단지 서포가 지향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같은 논문에서

[九雲夢 첫 장에 이르되 天下에 名山 다섯이 있으니, 東에 嵩山, 西에 華山, 南에 衡山, 北에 恒山이요, 그 가운데 泰山이니 이른바 五岳이다. …(中略)… 그 南便에 洞庭湖가 있고 北便에 瀟湘江이 들렀는데…(下略)

여기 南海 龍門寺 뒷산 遠山에 오르면 바로 五岳이 둘러 있는 것 같으니 四方에 솟아 있는 望雲山, 所屹山, 鹿頭山, 錦山이 天下의 名山의 縮小版같이 展開된다. 더욱이 龍沼는 龍門寺의 溪谷을 끼고 1㎞쯤 내려가면 瀑布로 이루어진 古然한 못으로, 옛 傳說에 龍이 살았다고 해서 龍沼라 했다 하니, 中國 南海 洞庭湖 龍沼와 偶然한 一致치고는 너무도 背景이 合當하다]라며 용문산을 중심으로 본 산세를 중국의 오악으로 대입하며 우연한 일치로 배경이 합치한다고 하나 개연성만 있지 우리 지명이 신라 지증왕이후 중국 지명과 유사하게 된 점은 간과하고 있다. 석교리에 관련해서 저자는 石橋里 古老에게 물은즉, ‘옛날 南海 바다 龍宮의 侍女들이 이 돌다리를 건너 昇天했다는 傳說이 있다하여 石橋里라 한다.’고 전한다고 하는 점과 결국 서포의 선사상을 인정한다 손 치더러도 지명의 차용으로 단정 짓기에도 역시 논리성이 부족하다. 남해 용궁과 석교리의 전언과는 일맥 통한다.

황패강교수는 『한국문학의 이해』(1991.새문사.335쪽)에서 “서포가 남해에 귀양 가 있을 때 어머니의 파한(破閑)을 위해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고 하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을 예로 들고 있기도 하다. 이 내용은 같은 책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부분에 나오고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로움과 근심을 덜어 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구운몽을 지었다고 기록했는데, 『서포연보』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로써 구운몽은 1687년(숙종 13) 9월~1688년(숙종 14) 11월 사이에 선천 유배지에서 지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문학사연구소, 한국 고전문학 작가론.소명.1998)는 주장에서 단순히 귀양지라는 말은 나오지만 남해라고 하지 않아 황패강교수의 주장도 당시의 설로 인한 오류로 보인다.

차라리 김성철씨와 같은 의견이 필요하다. “동정호와 비견되는 앵강만과 성진이 인간세계로 유배되는 빌미를 제공한 석교상의 8선녀와의 희롱(에 등장하는 석교가)이 현존하는 남면 석교마을 돌다리와 유사하고, 선천에서 어머니를 위해 지은 패설이 구운몽이라는 정확한 근거가 아직 없는 만큼 남해 저작설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구운몽이 여러 차례 개작된 것인 만큼 남해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됐을 것”(경남신문.2003.8.8)이라고 조심스레 주장했다. 그는 2010년 1월 5일 필자에게 "선천에서 습작을 지어 보내고 남해에서 완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라 했다.이와 같은 접근은 좀 더 객관적인 시각이라 할 수 있다.

[龍沼는 龍門寺의 溪谷을 끼고 1㎞쯤 내려가면 瀑布로 이루어진 古然한 못으로, 옛 傳說에 龍이 살았다고 해서 龍沼라 했다 하니, 中國 南海 洞庭湖 龍沼와 偶然한 一致치고는 너무도 背景이 合當하다]는 내용도 있다.

논문에서 다른 주장을 모두 인정한다 해도 저작설의 가장 중요한 논거가 되고 있는 지명 차용문제는 위에서의  ‘석교리’뿐이다. 물론 전반적으로 도교적인 선사상과 합치하는 경개 부분은 합당하나 모두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는 점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언어학적인 지명의 검토 없이 일부 합치되는 부분과 전체적인 환경의 비슷함을 과대 해석한 결과 지명 차자에 대한 논리가 미약하기 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서포의 남해 저작설은 많은 논리적인 문제가 도출되고 있음에도 무리하게 꿰맞추는 듯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일부 주장의 반복적인 확대 재생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노력을 게을리 한 모습으로 비교적 논리성이 다분한 논거에 대한 비판은 신뢰성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서포연보』와 관련 서적을 연구한 서울대의 김병국 교수의 선천 저작설이 객관적인 신뢰성을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박씨는 자신의 글에서 이런 상황임에도 하동 토지문학관의 경우와 대비하며 “남해를 1992년부터 지금까지 서포선생의 ‘구운몽’의 저술지 라고 홍보하지 못한데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라며 다소 감상적이지만 지나친 주장도 곁들이고 있다. 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다소 지나친 주장을 하고 있는 경우다.

심오하게 연구한 흔적이 없는 내용, 즉 규명되지 않은 사실로 지역민들의 애향심에 편승해 공감대나 얻으려는 모습은 서포 연구자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것보다 자신의 이름 알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결국 이런 논리로 인해 자신의 글에 대한 해명보다 다른 사람의 주장만으로 자신을 합당화 시키려는 결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남해 저작설이 인정받으려면 논리성이 부족한 내용으로 진실에 대한 "편식"을 줄기차게 주장할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이라도 획기적인 논거를 제시한 글을 발표하거나 여러 다른 주장도 함께 소개 해야함이 진정 지역 사회를 위해 마땅한 처신이다.국회 청문회에서 고관들의 논문 이중 게재가 도덕성에 훼손의 치명적 원인중의 하나이고 논란꺼리다. 지역적인 욕구와 친소 관계에 따라 무조건적인 지지나 반대도 지역을 위해서 사라져야 할 사족이다.

남해 저작설을 알리고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는 “오직 남해군민의 주인의식과 실천에 달려있다” 가 아니라 학술적인 논리성 확보가 우선이라는 점이 서포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자세임을 강조한다.

 

 

  2009.09.16 14:53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