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야나기 가네코(柳兼子)
한국의 아름다움은 “은근과 끈기”임에 틀림이 없지만 또 한사람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애상(哀傷)에 찬 자연미', '영탄(詠嘆)의 미'로 표현했다. 오사카 긴타로(大坂 金太郞,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장)는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慶州は母が呼ぶ声)』라 하며 식민지의 아련한 추억을 묘사했다. 야나기를 말하면 우선 한국인들은 이 말을 연상한다. “오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여라,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너의 왕국의 강력한 섭정대원군(攝政大院君)이 불굴의 의지로써 왕궁을 지키고자 남쪽으로 명당자리에 너의 주춧돌을 굳게 다졌다. 여기에 조선이 있노라 자랑하듯이 으리으리한 여러 건축들이 전면 좌우에 이어지고, 광대한 수도의 대로를 직선으로 하여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멀리 호응하고, 북은 백악으로 둘리고 남은 남산에 맞서 황문(皇門)은 그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차지하였다”
1922년 7월 4일 광화문을 없애려는 일제 당국에 대해 “사라지려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 내용 중 일부이다. 광화문은 어떤가. 얼마 전 광화문 앞 세종로에 광화문 광장으로 문화 공간이 조성되어 개방되었다.
1395년 경복궁의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1399년 궁성을 쌓을 때 세웠다. 처음에는 사정문(四政門)으로 불렀으나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5년(고종 2)에 재건했다. 1927년 일제 총독부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축소 이전시켰다. 현재의 문은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석축(石築)일부를 수리하고 문루를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중건한 것이다. 최근 자리를 바로 잡아 세울 때 현판인 한글로 된 광화문이 박 전대통령 글씨라 하여 많은 논란을 불렀다. 광화문 바로 뒤에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세웠고 1996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2005년 홍례문이 복원되었다. 홍례문, 근정문, 근정전이 일직선상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2005년 현재의 광화문과 경복궁. 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정문, 근정전과 일직선으로 서있다
야나기는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그 만들었든 서민 도공의 무심무작(無心無作)의 경지에서 만들어진 막사발에서 그들의 다도정신에 무한한 선(禪)의 의미를 부여했고 조선의 민화와 조선의 가옥과 조선의 석공과 생활 잡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미를 찾아내어 저술과 강연을 통해 널리 알린 일본인이다. 그나 오사카나 모두 우월적인 지배인으로서의 식민지에 대한 회상은 비난 받기도 하나 한국의 전통미에 대한 이해나 널리 알린 점은 평가 받을 만하다.
야나기는 1910년 가쿠슈인(學習院) 고등과 재학 중 문예잡지 『시라카바 (白樺)』를 창간했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철학과를 졸업했다. 유럽에서 종교철학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저술활동을 하는 한편, 1919~23년 도요대학(東洋大學) 종교학교수로 재직했다. 1924년 서울에 조선민속미술관을 설립하고 이조미술전람회·이조도자기전람회를 개최했다. 그는 한국의 전통미술과 공예품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한 평론 및 수집을 했다. 한국미의 원천은 한민족의 역사적 환경과 후천적인 정치풍토에서 연유한다고 했다. 1930년 이후에는 민예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1936년 도쿄 고마바(駒場)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해 일본 문화의 보존과 홍보에 노력했다. 저서로 『신에 대하여·』『조선과 그 예술』·『차(茶)와 미(美)』 등이 있으며,『 야나기 무네요시 선집 (柳宗悅選集) 』10권이 있다.
야나기 가네코(1892~1984)는 무네요시의 부인이고 일본의 유명 성악자이자 일본 최초의 리트 성악가이다. 그가 주목받는 것은 『월간조선』2009년 8월호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 夫婦 조선 사랑” 기사 때문이다. 1910년 도쿄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1928년 독일 유학을 하고 베를린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리트(독일 가곡)가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가 1920년 5월 6일 종로의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위의 기사에서 시인 남궁벽과 “사랑”을 양념격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최고 교양지라 할 수 있는 월간조선도 이런 기사에서는 상업성을 탈피 못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음악회는 1923년 11월 예정의 음악회는 가네코의 병으로 일정이 연기된 끝에 1924년 4월3일 경성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명확하게 연구가 필요하다. 그녀에 관해 2008년 말경 『야나기 가네코 조선을 노래하다』(다고 기치로 지음)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월간조선』에서는 부제로 “시인이면서 음악에 조에가 깊었던 남궁벽을 사모했던 일본 여인. 일제강점기 시절, 그녀는 일본정부의 강압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들의 가금앓이를 치료하기 위해 노래했다”고 했다. 낭만적인 묘사이다. 모두 과거지사이기 때문인 것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사람들이 여럿 있다. 이런 연분이나 감상적인 식민지 우월적 지위의 “낭만”은 지겹다. 실제로 낭궁벽과 유부녀인 가네코가 정분이 있었는지는 여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고 지금 정황상 추측이다.
개 돼지보다 못한 이미지의 조선인과의 사랑은 당시 현해탄 파고만큼 높았다. 남녀간의 사랑이 묘한 것은 지금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다.
아련한 식민지 사람들과의 사랑 또는 조선사랑이 사심이 배제된 진정한 조선의 미래를 생각 했다면 피압박민 한국인들만의 추측이 아닐까.
우치무라 간조 (內村鑑三 1861~1930)과 같은 순결한 종교인의 주장이 아니고 직업적인 사람들의 애상을 이제 이해하고 “조선사랑”으로 승화되고 있다. 물론 제국 군가를 부르지 않은 반동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가네코나 무네요시나 자신들의 업적 쌓기에 조선의 미가 이용당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지나친 감성적인 표현으로 그들의 업적을 미화하기보다 좀더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반한인사 미즈노 슌페이 같은 자가 다시 나오지 않고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대학살 만행도 일어나지 않는다. 조선의 완만한 곡선과 양반 기질이 그들을 비록 매혹했더라도 그들은 결국 일본제국에 충성을 했다. 조선의 석양은 위의 오사카 글처럼 지금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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