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의 현남초등학교동창회 참석기 2

책향1 2008. 11. 23. 11:38

나의 초등학교 동창회 참석기 2


초등학교 동창회라도 참석하려니 공직에 매인 몸은 빼기 참 어렵다. 물론 연가나 월차를 사용하면 되겠지만 휴가를 쓰는 문제가 아니라 업무적으로 빠진다는 것은 한 기관의 책임자로서 마음이 별로 편치 않다. 수차례의 전화가 오는 것을 보니 예년과 달리 참석자가 많지 않을 예감이다. 필자처럼 3시간 이상 차를 타고 가야 참석할 수 있는 입장이거나 경기침체로 경제적인 이유가 많을 것이다.

경기 침체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경제적인 심리 위축이 가장 문제다. 온통 불경기이고 체감 경기가 어렵고 실상 돈을 아껴야 할 판국에 소모적인 모임에 참석은 부담임에 틀림이 없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서 진주행 버스를 타고 좀 기다렸다 진주발 대구행 10시 30분 차 안에서 출발시간을 기다리며 노트북으로 글을 적어보는 것도 처음이다. 별로 손님이 없는 것은 시내버스나 장거리 버스나 마찬가지다. 썰렁한 최신형  버스가 안락해서 좋긴 하지만 장거리 버스는 가는 도중에 무슨 돌발 사항 즉 배가 아프거나 담배피우고 싶거나 아님 흔들림 때문에 참 답답할 경우가 많다. 제일 큰 매력은 내가 운전 안 해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안전함이다.

위사진: 필자사진. 경제 상황만큼 스산하고 황량한 모교 모습. 


12시 10분 대구 서부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점심을 먹을까 머뭇거리는 사이 학생풍의 어떤 젊은이 “이 아저씨 아니가”며 말을 붙이려 한다. 의아하게 쳐다보니 “아저씨, 지갑 안 빠졌어요” 한다. 그래서 바지 뒷주머니 느낌을 보니 전 재산이 들어 있는 지갑이 없다. 마침 떠나지 않고 있던 빈 버스에 올라보니 앉았던 좌석에 지갑이 그대로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겨우 집사람에게 참석 허가(?)를 받고 용돈을 받아 나온 처지에 알려준 그 젊은이가 무척 고마웠다. 


많이 남은 시간 때문에 현풍으로 가야 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술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친구 두 명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주인은 무려 두 시간 만에 겨우 생각해 낸 이름 미국영화배우 조디 포스터를 빼어 닮았다. 조디 포스터는 89년 "피고인"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았고 영화 "양들의 침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웃는 모습, 약간 큰 듯 한 입, 피부 등 놀라웠다. 이혼하거나 도망가버린 배우자들이 많은 시골 현실상 과부냐고 물어 보니 녀석들 낄낄 대기만 한다.

위사진 필자사진: 모교앞에서 본 비슬산 모습. 

 

 그러고 보니 생 배추와 콩나물국, 절임 깻잎, 멸치 볶음이 반찬의 모두였지만 입맛에 꼭 맞는 것이 고향을 왔다는 것을 실감나게 했다. 차천이라는 말은 수리천 즉 수레천의 한자 표기이고 과거 고속도로가 없을 때는 대구와 마산, 진주의 갈림길이었고 중학교 때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타던 곳이기도 하다. 그 때의 건물들도 남아 있지만 대부분 새로운 건물이 올라갔고 부동산 어쩌고 하는 가게들이 많이 보인다. 차천냇가 주변에 둑을 쌓았으므로 많은 자투리 하천부지가 생겼고 그 중 일부는 우리 논이었다. 이 냇가는 어린 필자의 추억의 장이기도 하다. ‘소먹이러’ 가면 옆 동네 아이들도 보고 멱도 감았다. 어떨 때는 사춘기 아이들의 만남의 장소도 되고 옆 동네 여자아이도 멱을 감아 처음으로 크고 허연 유방도 보았다. 다리 밑에 앉아 고스톱 친 아이도, 책을 읽은 아이도 있다.  그 다리 밑에는 숯으로 “자나 깨나 여자조심 자는 여자 다시보자” 를 비롯해 많은 낙서가 있었고 당연하게 멋진 여자가 누워서 다리를 벌린 그림도 있었다. 여름에 더위를 피하고 정담을 나누던 큰 다리 밑의 광경이었다.

위사진: 농익은 늦가을 풍취가 물씬나는 모교에서 본  현풍곽씨 12정려각 옆 모습.

 

 하지만 과거 대구 시내에 있던 제지, 염색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차츰 우리 논도 없어져 갔고 대신 그 자리에는 연기를 뿜는 공장들이 들어서 버렸다. 멀리서 보면 연기를 뿜는 모습이 근대화의 상징으로 보일 수 있는 굴뚝 산업이 즐비하지만 잃어버린 환경은 다시 볼 길이  없다. 이런 아쉬움은 전국적으로 비슷하지만 특히 대도시 인근이 심했다. '메기가 하품하면 홍수난다"던 그 너른 현풍벌은 고속도로로,  인터체인지로, 공장부지로 들어 가버리고 예전 집에서도 보이던 비슬산과 옆동네  전망은 둑이나 고속도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사진 촬영을 위해 모교로 갔다. 이게 웬 시츄? 아늑하고 조용한 모교를 그리며 갔지만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사판이 되어 있었다. 각종 파이프 등 공사 재료를 쌓아 둔 운동장 때문에 학교 흔적도 찾기 힘들다. 멀리 보이는 축구 골대나 게시판 정도가 그래도 학교였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위사진 필자사진; 유일하게 남아있는 모교 건물


5학년 때 심은 정문 오른 쪽 포플러 나무도 잘려 나간 지 오래고 삼태기와 호미로 흙을 파내고 세운 교사는 콘크리트로 건물로 변해 유일하게 남아있다. 4학년 때 호미를 챙겨가지 못해 벌로 필자 포함 몇 명이 운동장을 20바퀴나 돌았다. 무슨 일인지 맨발로 뛴 필자 다음날 발바닥이 전부 피멍이었다. 발바닥이 닭아버렸기 때문이다. 4학년 어린이들의“의자들기” 벌은 모두가 참 힘들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필자의 의자를 선생님은 옆에서 대신 조용히 들어 주시기도 했다. 그립도다. 그 박 선생님의 그런 감성적인 모습이 어린 가슴에도,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힘들었지만 과거의 교육은 인간성이 풀풀 묻어나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우시던 강 선생님은 필자가 지은 반공 관련 산문을 직접 검토하시고 이 부분은 고쳐야 겠다고 하시면서 짱구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6학년 담임이시던 허선생님은 임시방통으로 쓴 여름방학 숙제인 거짓말 투성이 일기를 글씨는 형편없지만 재미있다고 하셨다. 다른 아이에게 대필까지 시키시면서 "신문을 많이 읽어라" 라고도 하셨다. 지금도 선생님께 너무 죄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위사진 필자사진: 모교 운동장에 널부러져 있는 건축자재들. 


학교 앞의 저수지 크지 않지만 여름 철 호우일 때는 누런 황톳물이 무서웠다. 보통에는 수초가 많이 자라고 보이면 가물치가 연못가에서 하품을 하곤 했다. 민물 연못에서 자라는 말 즉, '마리"라 불렸던 것도 어려운 시기에는 식용이고 맛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수초를 이 못에서 다시 보기가 힘들 것 같다. 황폐해진 학교만큼 저수지도 황량하기 그지없다. 말을 연못에서 뜯어내기 위해서는 밧줄에 연결되고 무게를 좀 준 까꾸리를 못 안으로 던져 넣고 당기기만 하면 많이 걸려 올라왔다. 일본에서는 경상도에서 “신기”(물이끼)라고 불리는 민물수초를 식용으로 한다며 널어 말리는 모습도 있었다. 최근 라오스에서도 이것을 돼지고기와 넣어 요리해 먹는 광경도 TV에 나왔다.

과거에는 민물이 흐르는 곳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있었지만 공해와 더불어 이 흔한 수생 식물도 보기가 힘들다. 말리면 바다 파래와 모양도 같지만 어찌해서 민물에서도 자랐는지 알 길이 없다.

위사진 필자사진 : 학교앞 대리저수지의 황량함. 


5학년 그 때 꽁꽁 언 연못 위를 삽으로 긁으며 밀고 뛰어 다닐 때 걱정 많던 여선생이신 형선생님은 필자를 포함해 5명을 모셨다(?). 주의를 주려 모신(?) 와중 “백보리(뭐 비닐 같기도 하고 불에 닿으면 잘 녹는 옷)”를 처음 입은 그 위로 괜한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라.  

다들 반가운 모습들이 넓은 본동복어집 방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팔자에 없는 공직으로 나선 필자에게  향토역사관이나 동창회카페에 대해 설명 좀 하란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이 크게 작용했다. 

잠시 있다 필자는 다른 후배가 차를 갖고 대기 중이란 말에 나와서 다른 식당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깊은 얘기와 함께 경찰인 그도 어렵다고 한다. 좋은 부서에서 벌써 20년 가까이 된 그도 어렵다고 하니 동창들의 어렵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50중년의 동창들이 어려운 시기를 다 이겨냈지만 또 다른 외부적인 정황이 세상을 어둡게 하는 듯하다.

모두 새해에는 희망이 가득하기를 바랄뿐이다. 희망을 안고 사는 자에게 결코 좌절이란 말은 없으리라.

위(옆)사진: 필자사진. 모교정문 왼쪽의 게시판. 내용에 2004년 4월 20일(금)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누가  쓴지는 모르지만 모교의 마지막 유언장 같기도 하다. 

 

새벽을 가르며 진주 행 버스에 올라 다시 나머지 글과 사진을 정리한다. 이제 언제 반가운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인생처럼 기약 없는 삶을 영위하러 또 다시 삶의 터전으로 과거를 접고 발걸음을 옮겼다. 추억이 가슴을 저밀게 한 날이었다.

 

2008.11.23 11:38 남해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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