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연탄

책향1 2008. 11. 20. 10:42

연탄


활활 타오르는 연탄은 결국 재만 남긴다. 서민들의 삶도 애환이 녹녹히 서려 있는 연탄처럼 한 겨울에도 우리들 삶이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다. 연탄이라면 무엇이 연상될까. 다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소회가 많을 것이다. 최근 방송에서는 연탄에 대한 언급이 많다.

 

 아침방송에서도 연탄 이야기가 나왔다. 누구처럼 필자도 이에 대한 머지않은 추억이 있다. 새벽에 연탄 갈기가 참 귀찮은 일이었지만 갈지 않을 수 없었다. 벌건 불이 있는 연탄을 때내려면 집게를 잘 사용해도 되지만 못 쓰는 식칼이 참 유용했다. 마치 떨어진 어른 팬티가 우리 어머니들의 부엌  행주로 활용되던 만큼.  

 

 

과거 경상도 시골에서는, 특히 필자의 어린 시절 연탄을 때 본 경험이 없다. 시골에서 많은 농산물 잔재를 연료로 사용했고 시골집들의 엉성함 때문에 연탄가스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짚을 연료로 사용하고 지붕을 이기 위하여 마당이나 집 주변에 많이 쌓아두고 있던 모습은 지금은 회색빛 사진 모양 옛 풍경이 되어버렸다.

 

 

멀리가면 좋은 소풍이라며 멀리 갔던 초등 5학년 가을 소풍에 외진 마을로 오기 위해 달빛 어스름한 시골 자갈길을 혼자 걸어오면 나락을 쌓아 둔 모습이 황량하게 색인되며 무서운 마음도 주었다.

겨울이면 형은 새벽에 30리길 넘어 비슬산에 나무하러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게에 대나무 밥곽(도시락)을 매달고 옆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지게와 옷가지를 단속하고 나가는 모습은 어찌 보면 애환이라 할 수 있지만 도시민들의 출근 채비에 비유하면 될까?

 

 

그 어스름한 어둠을 뚫고 새벽에 나간 형은 짧은 겨울 낮 시간 오후 4시경이면 지게 양옆으로 1.5m나 나온 깔비(소나무 갈비)나 소나무 가지를 지고 논길을 통해 걸어온다. 가끔 지서 순경들이 소나무 벤 것을 단속하느라 나오면 그 무거운 짐을 진채 도망치곤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전에 본 월간 조선에는 북한의 모스크바 파견 외화벌이들이 한국의 산림녹화에 대해 한국의 취사 연료가 땔감에서 석탄, 석유로 가스로 바뀌므로 저절로 산림녹화가 되었다는 평가를 읽고 과연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이제 산림의 녹화와 함께 “석유곤로”도 연속극에서나 보이거나 “곤로”라는 일본말 자체가 사어화 되어가고 있다.

 

 

필자의 연탄에 관한 연상은 그다지 많이 없다. 그 이유는 중학을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자취를 하면서 비로소 연탄가스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고 비교적 연탄 잘 갖춰진 셋방에 있었기 때문에 애환이 되기보다 짚불 때기보다 편안한 생활이었다는 생각이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 한 장」이라는 시에서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며 자아를 연탄에 비유한 은유로 마음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세상을 덮이고도 정작은지 자신은 흰 재로 변하는 모습을 한 줌 재로 돌아갈 인간에 비유했지만 사실상 자신은 세상에 좋은 것을 남기지 못하리라는 점을 강조하며 인간의 못남을 꾸짖고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시인의 또 다른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다. 시인이 달랑 세 줄짜리 짧은 시가 반성의 사무침이 가슴 깊게 와 닿는다. 시를 읽고 필자도 곰곰 생각해보니 남에게 한 번도 좋은 일 해본 적이 없다. 

 

88올림픽 전에 미국의 언론에서는 한국에서 조심해야 할 것 중에 연탄가스이고 물은 ‘누런 물’ 즉 끓인 보리차를 마시라고 했다.

 

시골 다방의 연탄난로 위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는 보리차가 든 주전자도 정경이다. 서울의 밀집촌에서는 밖에 나있는 연탄 화덕에 타고 있는 연탄을 빼가는 바람에 밤새 오돌 오돌 떨거나 방 앞에 연탄재를 몰래 갔다버린 놈을 잡아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혈기 왕성할 때 이야기이다.


85년도 경주에서 문화재 발굴 작업을 하며 손님 때문에 추위를 피하러 들어간 경주역 새마을 대합실에는 큰 연탄 3개를 넣은 연통이 연결 된 연탄난로가 있었다. 때마침 가이드를 앞세운 일단의 일본인 관광객  무리가 우르르 들어오더니 연탄난로를 보고 “메즈라시이”를 연발했다. 물론 신기하다는 말인데 즉시 다른 일본인에게 물어보니 일본에서는 연탄이 그 당시 50년 전에 없어 졌다고 하였으니 신기하다는 말도 무리가 아니었다.

 

연탄가스 사고가 일간 신문을 장식했고 김치 국물이 특효약처럼 논의 된 적도 있다. 아스라이 스러진 역사의 편린을 안고 있는 연탄이지만 연탄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불황이 만든 신풍속”이라 할 만큼 우리 서민들에게는 결코 신기한 신풍속은 될 수 없는 삶의 한 방식이다. 

 

연탄이 전 국민의 연료일 때 연탄 공장은 대기업이 되기도 했다. 지금 1%가량의 연료로써, 연탄불 위 돼지갈비 맛으로 느끼는, 이북에도 가는 연탄이지만 자원 빈국 한국은 오일 쇼크 때만 찾는 연료로 아련한 추억만 아로새길 일은 아니다.

 

 연탄은 19세기 말 탄광이 많던 일본 큐슈 지방의 모지시(門司市)에서 사용된 ‘통풍탄(通風炭)’ 또는 연꽃연탄(蓮炭)가 그 효시이다. 이 지방에서는 주먹만 한 크기의 석탄에 구멍을 낸 탄을 목탄을 사용하였고 구멍이 뚫린 모양이 연꽃열매 모양을 닮아서 연꽃연탄이라 했다.

 

1907년경 제조기가 발명되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공명탄(孔明炭), 통풍탄(通風炭), 혈명탄(穴明炭), 연과탄(蓮菓炭)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평양광업소에서 제조하여 관급연탄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관제연탄은 벽돌과 비슷한 모양에 두개 또는 세 개의 구멍이 나 있는 연탄이었다.  대부분 일본인 가정을 중심으로 공급되었고, 1930년대부터 연탄이 본격적으로 제조되기 시작했는데, 부산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삼국상회가 프릭션 프레스기를 사용하여 9공탄을 제조하였다. 삼국상회는 1940년대에 삼국연탄주식회사로 성장하여 연탄제조기를 간단한 윤전기(輪轉機)식으로 개량하여 대량생산이 개시되었다. 현재의 연탄 1장 가격은 대략 450원이다. 최근(2009년 11월 1일) 연탄값이 21%나 올라 이제 연탄도 맘대로 못 땔 지경이 되었다.

 

2008.11.20 10:42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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