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금산에 올라
형형색색 속세의 무한 변화는 속 좁은 인간들의 마음 같다. 이 계곡 저 골짝에 안개가 자욱하고 음산한 구름장이 산허리를 감고 안개 병풍이 하늘을 가리며 쪽빛바다에서 누구나 시인이 안 될 수 없다. 기어이 산속 나무사이로 비가 내린다.
젖빛 같은 연무가 짙어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워도 일점 선도가 여기다. 우비 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니, 돌연 일진광풍이 기약없이 어디서 불어왔다. 솔바람 소리 내며 운무를 몰아가자 별천지 같은 정다운 수묵화가 주홍 주단 폭같이 뿌려놓은 붉은 옻나무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신으로 보인다.
바위와 단풍을 마치 이랑으로 짜놓은 씨줄 날줄로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펄럭이며 보리암에 흘러내리는 듯하다. 옻나무는 꽃보다도 진보다도 단풍이 배승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오를수록 우세는 맹렬하고 연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 속에서 현현하는 추경은 마치 영봉들이 새아씨의 볼같이 불그스름하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포로 쏟아진다. 봉수대와 크고 작은 봉우리가 단박에 창해로 변해 버리는 기세다. 피우하느라 물에 빠진 생쥐모양 봉우리 어귀의 절집처마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던 해탈한 듯 여승이 문을 열어 환접 하고, 붉게 타오른 술독 같은 아랫목을 둘러앉았던 순례객들이 틈을 양보해 준다.
절간의 인정이 따사롭기 그지 없는데, 밖의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듯 밧줄만 한 줄기로 변신하여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드니 금세 초겨울을 요동친다.
버림받은 땅처럼 비도 비싸게 구는 지역에서 하늘과 땅이 서로 다투는 것일까? 산신령이 부인내하는 걸까? 희뿌연 운무로 이렇게 삼라만상을 덮을 법이 어디 있을까 마는 못내 산 발치 쯤의 은모래비취는 끊어진 필름을 보듯 사라졌다 다시 눈앞에 흑백으로 홀연히 나타난다.
신의 노여움이 인간의 목을 죄 듯 했던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순식간에 잠든 파도같이 온순해진다. 변화도 극치에 달한 듯 누가 무쌍함을 탓할까 보다.
금산 최고점 암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뿐, 봉수 연기보다 더 진한 운해는 창해보다도 깊으리라. 흰 비단으로 창해를 덮어 따스함을 더 해갔다.
금산을 일망지하 굽어 살피며 꼭대기에서 허무한 운해만 보는 것이 애상을 더 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해발 701m에 키168cm를 더해 넓은 태평양을 발밑에 엎드리게 하였다는 겨우 기어오른 교만심에 더 바랄 것이 없다.
제석봉 아래 은모래해수욕장은 처녀 속살 결보다도 부드러운 차라리 평야였다. 소나무는 용트림으로 자아를 표현하고 평야같은 바다는 수줍은 듯 고요하다.
홀로 길이 저물어 지친 육신을 끌며 찾았던 태조도 원효 의상대사도, 서불도 윤필거사도 큰 걸음 무거웠으나 필부처럼 황혼에는 늘 고독했으리라.
너무 초라한 무덤과 상석도 없는 범인들의 무덤들과 풍우에 시달린 읽을 수 없는 비문들도 마음만큼이나 한량하며 바람같은 세월을 남은 자들에게 말없이 알려준다.
무심히 비에 젖은 만산홍엽은 이유없이 떨어지지만 공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것을 바라다보니 무심히 떠돌다 잠시 머무는 소복한 듯 한 그루 배롱나무는 한 결 같이 슬프게 서 있다. 눈물 머금은 초저녁달은 중천에서 서러워 한다.
500년 사직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속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 낙향할 때 대장부의 가슴속 흥망재천의 운을 뒤로하고 슬퍼만 한들 그 무엇하리.
천운을 슬퍼한들 무용하다. 사람에게는 스스로에게 믿음이 있으니, 500년 후, 유처 망국지한을 고행으로 여기지 않고 남해에 베푼 도타운 마음은 지금 비단 속처럼 따사롭다.
유구한 세월 속에 500 년 사직은 일장춘몽이었고, 태조가 가고 반 천년도 지났으니, 짧은 찰나에 오욕칠정으로 다투다가 결국 한 줌 부토인 인생을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유장하지만 허허로움이 그것이다.
2008.11.28 4시12분 최종 정리 남해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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