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불상이 없는 절 통도사

책향1 2008. 10. 24. 14:11

불상이 없는 절 통도사


부산행 우등열차 안의 광경이다. 초등학교 5,6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곱게 차려 입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우리나라 3대 절은 어디야”, “응, 불국사, 통도사, 해인사야” 불국사가 많이 알려져서 나온 대답으로 보였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3대 사찰은 통도사, 송광사, 해인사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3보 즉 불법승 사찰에 해당한다. 불은 부처님이고 법은 요즘의 법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을 이른다. 승은 스님이다.

통도사는 불상이 대웅전에 없지만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불보 사찰이다. 부처님 말씀 즉 대장경을 소장하는 해인사는 법보 사찰이다. 고승 대덕을 많이 배출한 송광사는 승보 사찰이다.

통도사는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마가다(magadha)국 왕사성 동북쪽의 기사굴산의 한역인 영취산의 모습과 닮았으므로 영취산이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승려가 이곳에서 득도한다(爲僧者 通而度之), 만법에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通萬法度衆生)고 하여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 지었다. 부처님 후반 대부분을 기사굴산에서 지내며 설법을 폈으므로 불교 최고의 성지이다.

통도사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기록을 보면 서기 643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모셨다고 한다. 속인이 보면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지만 자장이 누구로부터 받아왔는지 궁금하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통도사사리가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略錄)의 기록을 보면 「자장이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드리고 있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하여 자장에게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00개, 두골, 지절(손가락),염주, 경전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스승 석가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이며 뼈는 부처님의 머리뼈와 손가락뼈이다」고 있다.

이때가 부처님이 인도에서 입적하신 후 1100여 년 되던 해이다. 종남산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의 남쪽을 지키는 진산이다.

통도사 연기(緣起)는 「그대(자장)는 말세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문수보살)가 이것들(진신사리 등)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鷲捿山)에 독룡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고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를 품고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용이 사는 연못에 계단을 쌓고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를 면하며 만대에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며 그곳을 지키게 되느니라」여기서 취서산은 영취산의 다른 이름이고 신지는 현재의 구룡지이다.

조계종의 15교구 본사인 통도사는 경내가 넓다. 처음 보는 이는 크고 작은 가람배치에 압도된다.

대웅전에 들어서면 물론 부처가 없다. 바로 예불을 드리면 건물 바로 북쪽으로 향하고 그곳에는 진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다. 형상화된 부처상 보다 더 귀중한 예배의 대상인 진신사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임란 때 불에 불탔지만 1463년(인조 23년)에 우운 스님에 의해서 중건되었지만 석조물 즉 기단 등은 신라시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제시대에 만든 석책은 제외한다. 불교에서 금강이란 말은 가장 중요한 진리라는 의미이다. 마치 다이아모드가 강인한 광석인 것처럼.

1982년 학창 시절 탑전의 시대가 다른 두 개의 배례석을 탁본한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러면서 금강계단 중심의 석종형부도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이런 궁금점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기록을 보면 석종은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다.

삼국유사에 1235년(고려 고종 22년) 상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 유석(瘐碩)이 들어 올렸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때는 유리통이 금간 채 발견되어 예를 올리고 수정함을 기부하여 보관하였다고 한다. 1592년 임란 때 왜인들이 탐을 내자 의승장 유정이 진신사리를 대소로 나누어 담아 금강산에 있던 그의 스승인 휴정에게 보냈다. 그 후 하나는 통도사로 보내고 함 하나는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 갈반지가 현재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의 오대산 상원사 위의 금강계단은 아닐까? 학술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통도사 일주문은 넘어서면 속계와 선계의 경계선이 확연하다. 이 경계선 밖에는 온갖 유흥업소가 불야성을 이룬다. 한 때 명칭문제로 불교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건립한 놀이시설과 러브호텔의 불은 환하다. 속세에서 무슨 짓을 하던 성스러움을 곁에 두고 벌리는 인간들의 욕망은 자제력을 잃었다. 

유장한 범종소리가 멀리서도 그윽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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