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의로운 15세 소년의 죽음

책향1 2008. 7. 24. 18:46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라고 하지만 이처럼 죽음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삶과 죽음이 백지장 한장 차이라지만 어떻게 살아야만 길지 않은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 될련지 고민할 기회이다. 사는 것도 어렵고 죽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이라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헛되지는 말아야 한다.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은 참척(慘慽) 이다. 유교가 사회 규범인 우리나라에서 어린 아들의 죽음은 부모 가슴에 묻는 일로 치부되며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십오 세에 장가들어 아들 여섯 딸 셋, 생산은 푸짐하게 했지만 딸 하나 아들 셋, 눈앞에서 참척을 당해야 했다"(한무숙의 장편 소설  만남)  "네 모양이 이러한 것을 보니 뼈가 녹는 듯하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니, 참척을 보더라도 이렇게 원통치는 아니하겠다"(이인직의 개화기 소설 모란봉) 이런 문학 작품 속의 참척 역시 세태를 달리해도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듯 애닯음을 한 없이 표현했다.

3개월 전부터 용돈을 모은 185cm의 중2는 신발 한 짝 양말 한 쪽 남기지 않은 채로 성난 파도가 삼켜버렸다.

소년의 참척이 관심이 가는 것은 여러 정황과 조사 결과 의로운 죽음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견 어린이의 의로운 죽음이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고 명확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7명의 중학생이 지난 달 19일 오후 방학을 맞이하여 가까운 해수욕장으로 놀러갔다. 관계자들의 무관심 속에 고무튜브 두개를 빌린 그들이 북상하던 7호 태풍 갈매기의 영향으로 파도가 일던 바다에 들어갔다.

학교 공부에 열중하던 아이들의 해방감을 바다는 알 지 못 했다. 땅내음만 맡고 조용히 물러가야 할 파도는 연약한 아이들을 휩쓸었고 성난 입으로 한 소년을 잠재웠지만  이 소년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지인의 아들이고,  필자 둘째와 한반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의로운 죽음이었다는 점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확인한 관련 문서나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답지 않은 희생 정신을 발휘했음이 틀림이 없다.

같이 물에 들어갔던 동료중 한명이 파도에 휩쓸려 깊은 곳으로 밀려가자 소년은 주저없이 헤엄쳐 들어가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정작 자신은 파도에 휩쓸려 보이지 않았다. 동료들은  한결 같이 "니가 먼저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고 응급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으며 동료를 밀어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익수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을려고 발버둥치는 점을 감안하면 의외의 희생 정신을 발휘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평소 장남으로서 부모로부터 남을 배려하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어온 사실이 있고 그에 따라 절체절명의 상황하에서도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타심을 발휘한 것으로 이해된다.

평소 물에 익숙하며 책임감 강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위치가 죽음의 순간에도 작용했다. 이는 소년답지 않은 희생 정신의 발휘로 차라리 그의 의로운 죽음이 재해등의 예방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돼야 하며 헛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은 산자들의 책임이다. 행정당국의 효과적인 구난 구조을 위한 준비 예방 활동 또한 확실해야 한다.  

죽음을 두고 산자들의 자기 챙기기는 지양되야 하며 희생한 유가족들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학교나 관계당국도 옳바른 평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시는 감성적인 쪽빛바다에서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좋은 곳에서 상반된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망각하지 말고  평범하지않은 죽음에 바치는 박수는 항상 영예로워야 한다. "숨겨진 자원을 이용한 사계절 해수욕장"보다 안전한 해수욕장이 우선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부모의 심려를 멀리하고 먼저 간 불효를 논하기 보다 소년의 희생 정신은 각박해져만 가는 이 사회에 무언의 교훈을 남기고 있다. 

이지엽 시조시인이 2003년 중앙일보(11월 14일자 25면)에 살신성인한 사람의 추모글에서 그 가치를 "아무리 진창의 삶이고 더러운 역사라도 살신성인한 아름다운 사람들. 사람이 사람을 견디게 합니다."라고 했다.
 힘든 세상에서도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통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살신성인의 가치를 표현했다. 다 피어 보지도 못한 소년의 살신성인은 더욱 큰 의의를 지닌다.

 2006년 1월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일본인을 구하고 숨진 이수현씨가 의사자로 대표적이다.이씨나  이 소년이나 모두 결코 헛되지 않을 죽음으로 사회의 도덕성에 경각심을 일깨우며 좀더 효율적인 구난을 위한 체계적인 체제 구축에 기회를 주어야 한다.

성인도 힘든 소년의 의로운 죽음이지만 양자 모두 개인 가정적으로는 참척이 되어 버렸다. 눈까지 뜬 자식의 사체를 물에서 건진 부모의 심정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평소 개를 유난히  좋아하여 수의사가 평소의 꿈이었던 소년은 나래를 꺾인 채 금방이라도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할 것 같다고 한다. 목이 쉬고 수척해진 부모들의 모습만큼 이제 그 죽음을 먼 남의 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또 다른 참척을 막는 길이다. 

미래가 없어 두려운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며 남을 우선시한 고귀한 영혼이 각박해져 가는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의무나 업무가 아닌 자연인의 희생은 제대로 평가 받고 대접해야 한다는 점은 사회 정의감을 살리는 측면에서라도 당연하다. 

이는 소년 의사자로 그의 희생 정신이 오랫동안 기억되야 하는 이유이다. 말없는 유족을 대신하여 행정관계자들의 헌신적인 확인 노력에도 박수를 보낸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뼈가 녹고 창자가 끊기는 아픔을 부모들은 잘 이겨 내길 바란다. 마음 한켠의 애석함을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다.

 

 

2008.07.24 18:46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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