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일본 내셔널리즘과 한국

책향1 2008. 3. 3. 10:52

3월 1일자 동아일보는 20면에서 "내셔널리즘에 갖힌 '평행선'으론 내일 없다"란 제목으로 근간의 책을 평하며 한일 관계에 대해 잘 분석했다.비록 서평이지만 새 정권의 시작과 함께 대일정책에 맹목적인 편들기라면 거북스럽다.

 필자가 일본이란 나라를 생각하면 항상 개인적인 "친절함"과 양국의 역사가 우선 떠오른다. 평범한 한국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수적이라 할 수 있는 양국의 언론 논조는 항상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불러 일을키고 있다는 점은 숨길 수가 없다.

 과거 처음으로 역사 왜곡 문제가 공론화 되었을 때 한국의 가장 "일본적인 신문"이 반일에 앞장선다고 일본언론들이 보도했다. 당시의 관점에는 우리나라 신문들이 모두 일제 신문 인쇄기계를 사용하고 세로쓰기를 할 때이므로 그런 비아냥을 들어도 당연했다. 그들의 주장처럼 관제 반일 데모도 없진 않았다.

 일제 코로나 택시에 "일본인승차금지" 스티커를 보고 그들은 웃었다. 코로나를 대만에서는 일본차라 했지만 한국에서는 "우리 차"라 한다고 비아냥 댔다. 자국의 이익에 충실한 양국 언론들이 자국의 이해 관계에 맞춰 글을 적다보면 항상 전체적인 사실과는 다른 국민감정에 부합하는 결과를 발현했다.

 최근 이명박 정권이 출발하며 "미래와 실용성"을 강조하지만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 하다. 필자가 이명박 정권의 철학을 이해하거나 그의 정책방향을 미리 예단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실정 즉 우리나라에 대한 본색을 제대로 모르고 실용성과 미래만 강조한다면 항상 우린 일본에 대해 굴종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 속담의 "모난 돌이 맞는 다는 말"처럼 일본에서는 튀어나온 못은 박아야 한다. 돌출적인 모습은 실정에 순화된 관습의 망치를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한국이 못이다. 국제 사회에선 간혹 흑백논리 보다 '외교적인 수사'가 더 필요할 때가 많다. 우리사회가 혼네와 다데마에가 공존한다면 일본을 대하는 모습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다데마에로써의 친일과 혼네의 실속챙기기가 우리에게 필수다. 궁극적으로 흑백으로 양도 결단한다면 다데마에는 친일이고 혼네는 반일의 실리와 명분이지만 조화로운 대응이 중요하다. 복잡한 국제정치의 속성상 친일과 반일 모두 실리가 중요하므로 일단의 "친일적인 새정부의 실리 챙기기"가 이명박 정부의 다데마에로 바라고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

일단 혼네도 챙기지 못한 YS정권과는 달리 친일로 시작해서 실용성을 살린 실리가 실리면 금상첨화겠지만 대일문제에 대한 국민들 성향이 직선적이고 즉결 처분을 바라는 현실에서 정부의 고뇌도 없을 순 없다. 다만 일본의 변치않은 대한국관을 무시하거나 이해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그들이 유사이래 한국에 대한 시각이 바뀐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미래에도 같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근세의 우리나라에 대한 역사 왜곡을 말하지만 그들이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기,기(記,紀)"부터 역사 왜곡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애써 우린 잊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불만을 대외로 돌리고 그들의 욕구를 푸는 침략이 다반사이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한일합방이 그랬다. 그기에는 과거의 실패로 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냄비근성의 한국인들이 그들의 상대였다.

 예로부터 "신의 나라"라는 선민의식에 가득찬 그들에게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속시원히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간단하다 . 그들을 능가하는 국력을 만드는 일뿐이다. 따라서 명분보다 실용성이 대두 되는 것은 때 늦은 감이 있다. 

명분만 찾는 유교적인 잔재는 우선 기분은 좋고 자존심을 채워줄 지는 몰라도 국가 이익과는 동떨어진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가 대일문제에서 내셔널리즘을 부수면 일본도 상대적으로 부숴야 하나 그건 난망하다. 그 이유는 한국에 대해 손해볼 것이 없다는 고이즈미식 사고로 무장한 다수인 "만들어진 국민"이 일본을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일본 우익만의 사고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근저에는 그런 잠재의식이 있고 다만 고이즈미같은 돌출인사가 표현했을 뿐이다.

 간혹 한국을 아끼고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그들도 내심은 그렇지 않은 것이 나카소네 전총리가 대표적이다. 그가 한때 한일관계에 좋은 발언을 쏟아낼 때 한국여고생들의 인기"짱"이었지만 그가 젊을 때는 독도 인근에서 (준 전시상황인)실탄사격연습을 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편협함과 국익 우선의 자세는 한국출신 인사로 구성된 이른바 "고스트라이터"를 보면 담박에 알 수 있다. 최근 T.K生이 지명관 교수로 밝혀졌고, 고젠카가 등장했다. 물론 경우는 다르지만 저명한 지명관 교수부터 친일 어용작가들까지 모두가 잊어버린 것은 바로 일본의 국익에 완벽하게 이용당했다는 점이다.독도문제 제기로 한국을 국제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읊조으고 역사왜곡으로 자기만족을 하는데 일조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지명관의 경우 민주화의 열망을 국제사회에 알린 점은 나무랄 수 없으나 그의 경우 일본에서 그런 점은 두고두고 우리에게 뼈 아픈 자학이 될 수 있다. 그의 일본에서의 행동이 잘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의 고젠카나 철저하게 일본의 한국디스카운트에 일조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일종의 행동으로 군사정권이든 민간 정권이든 한국의 국가 이미지는 바로 한국인의 손에 의해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열국들이 식민지를 경영할 때 피식민지인을 앞잡이로 내세운 결과와 전혀 다르지 않다. 다만 방법만 다르고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 폄하가 얼마나 그들의 논리에 맞고 입맛에 맞은지는 그들의 혐한류 책들의 범람에서 읽을 수가 있다. 

 역사왜곡의 뿌리인 "기,기(記,紀)"부터 혐한류이다.작금의 혐한류에 부채질을 하는 것은 미즈노나 구로다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생활하며 시시콜콜한 것에서 부터 정치의 일부분까지 자신들이 목도하고 체험한 사실을 일본언론에 발표하여 한국인들의 부도덕성에 대해 논거를 제시하여 신친일매국작가들과 그 맥이 통하고 있어 일반적인 일본인의 눈에는 한국은 엉터리 국가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그 객관성을 더해 주고있다.여기에는 축소지향의 이어령이 있다면 반대 개념으로 광개토대왕비문 변조설을 주장한 이진희 교수가 있다. 

 이명박 정권이 실용적인 미래 관계를 주창하고 있으나 일본인들은 드디어 한국인들이 굴복을 했다고 자신들의 능력에 환호하고 있을지 모른다.이런 점을 명확히 지득한 대일관계의 출발은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우고 있으나 미리 적장에게 우리의 작전을 알려주는 효과뿐이다.

 최근의 한일관계의 소원함은 일본에서는 우익들의 준동으로 인한 문제라기 보다 단순히 인기없던 노무현 정권의 실책으로 만들기거나 반일정책은 한국에게 아무 이익이 없다는 점을 깨우친 쾌거일 수 있다. 국력이 담보되지 않은 대일관계는 항상 우리에게 굴욕을 안겨 주고 그들의 잔꾀에 넘어가는 우둔함만 알리는 개연성이 짙다.

과거 김치가 마늘 냄새로 비하되었지만 우리의 국력 신장과 함께 이제 좀 대접을 받는다. 일본이 날생선을 먹는다고 미개인 대접을 받다가 이제 뉴욕에서 200군데 이상의 초밥집이 고급외식의 대명사로 꼽히는 것은 그들이 날음식을 세계인에게 먹이려는 노력 이외에  국력신장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음식으로 비교하지만 음식에 내포된 국력을 우리는 이제 일본에 적용해야 한다. 근시안적이거나 즉결처분식의 대일 정책은 도리어 우리에게 마이너스이다. 따라서 당장 효과가 나는 대일 접근 방식은 지양하고 일본의 본색을 명확히 파악한 후 장기적이고도 치밀한 정책이 대일외교에 필요하다.

 또 일본사회의 한국비하 프로그램이 앞으로도 어떤 변수로 작용하며 또한 효과적으로 사용할 지 모른다. 그들이 국제적 도덕성이 없다는 점을 널리 알리고 그들의 본심을 꿰뚫는 혜안이 필요한 싯점이다. 그래야 자력으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3.3 12시 작성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