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와 다꾸앙3 김치를 한 때는 금치라 하기도 했다. 배추나 고추값 때문이었다. 고추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임란 후이다. 어떤 일본인에게 고추가 일본에서 도입됐다는 말을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아마 왜군들이 임란 당시 방한용으로 호주머니에 씨앗을 넣고 왔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어찌 되었던 간에 요즘의 우리는 고추가 없으면 밥맛을 잃을 지경이다. 처음으로 일본에 가서 슈퍼에서 파는 진공포장의 김치를 보고 놀란 경우가 있었다. 우리 백김치와 흡사한 김치가 진공팩 포장으로 팔리기에 그것을 숙소로 갖고 가서 일본 라면인 100엔짜리 야끼라멘과 맛을 보려니 너무 우리의 김치와는 그 맛이 달랐다. 그것은 모습은 우리와 꼭 같은 모습이나 식초를 넣은 듯한 이상한 맛이었다. 김치의 국제 규격에 식초(구연산)를 넣어 신맛을 낸 위와 같은 김치를 ‘기무치’로 하고 우리의 발효된 맛의 진짜 김치는 ‘김치’로 결정하였다. 일본의 유명하고 전통 있는 간장인 ‘기코망’은 우리의 유명일식집에서도 직수입한 것을 사용한다고 하고 서양에서도 널리 알려진 유명상표이다. 이 간장의 국제 표준을 둘러싸고 우리와 일본이 맛 붙을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개량간장 즉 우리가 부르는 왜간장의 제조 방법 등은 모두가 일본에서 도입된 점을 감안하면 국제표준 제정에서 우리의 ‘간장’이 밀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0여 년 전 어떤 지인은 필자에게 다꾸앙은 절대 먹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가관이었다. 대형 화물차 기사였던 그는 인천에서 수입화물을 운반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한번은 인천에서 대형 화물차에 수입물품을 가득 싣고 부여 백마강으로 간적이 있다. 가장 궁금한 점이 화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전화번호만 하나 달랑 갖고 충적토가 많은 백마강 둔치에 도착하여 전화를 하고 화물을 내릴 장소를 물어보니 비닐을 깐 포크레인이 서 있는 큰 구덩이 옆이라고 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백마강 인근의 충적토에서 재배되는 많은 다꾸앙용 무를 모아서 수입공업용소금에 절여 저장하기 위한 구덩이를 파놓고 있었던 것이다. 화주의 얼굴도 모르는 채 운반해 준 물품이 바로 다꾸앙 무 절임용 소금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직접 목도한 그가 다꾸앙을 먹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필자가 쓴 전편과 마찬가지로 김치 자체나 다꾸앙을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탄핵이란 소용돌이가 ‘국민의 뜻’이란 이름으로 온 나라를 장식하고 있었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갖춘 보통 수준의 한국인이라면 무엇이 잘못되고 누가 잘못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간파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잘못하고 있는 집단은 누구하나 뉘우침이 없는 점은 나라의 도덕을 생각한다면 참 큰일이 아닐 수 없다.역대 정권 하에서도 ‘정권의 나팔수’란 말을 수없이 들어온 어떤 언론은 그 부도덕함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나라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호들갑을 떨어왔다. 여론의 향배가 진정 국면으로 가자 이번엔 그 회귀를 방지할 목적으로 교묘한 프로그램 내용으로 더욱 처절히 움직이는 듯하다. 작금의 박대통령을 부정적으로 그린 프로의 많은 방영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사람 마음이 초조하지 않으면 다급해할 필요가 없다. 뭣 때문에 조급해하고 다른 영향력을 자기에게 유리한 작용을 하도록 유도하고 배려할 수밖에 없을까? 자신이 정치판에서 지면 퇴로가 없는 싸움을 해왔기 때문이다 . 퇴로가 없는 싸움 중에는 특히 말이 문제다. 능력이나 경륜이 부족하고 지식이 부족하면 항상 대중 앞에서도 막말이 쉽게 나오고 천박함이 배어나오기 마련이다. 천박하기 때문에 막말을 하게 되고 퇴로가 없는 격한 싸움으로 변질하고 있다. 우리 지역의 언론을 한 번 되돌아보자. 과거 선거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어 재미를 톡톡히 보았던 어떤 언론은 이번 총선에서도 그 버릇을 되풀이하고 있다. 많은 군민들이나 네티즌으로부터 지적과 비판을 수없이 받아 온 그 언론이 철면피하게 다시 군민들의 선택권에 영향을 미치고 현명한 판단력을 흐리는 짓을 하고 있다. 언젠가 경고하였듯이 우리 일반 독자들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작금에 어느 누구하나 나서서 잘못을 지적하고 대안을 말하는 분이 없다. 신문사의 기자는 공복이자 선민이다. 보통 우리 지역에서 보는 기자들의 모습이라곤 공복이라 하기에는 기가 막힐 정도이고 선민의식에 빠져 항상 우월감만 보여 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증거가 일반 독자들의 정중한 충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사고나 방식을 전파하는데 앞장 서왔다는 사실은 숨길 수가 없을 것이다. 사석에서 만나는 기자들의 모습은 기자 정신이나 지적으로 무장된 사람이 아니라 신문사 논리를 일반 독자에게 강요하는 선동대의 모습이다. 평소의 그 선동대의 모습이 선거 시기에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신문이 깨끗해야 사회가 깨끗해진다. 고급지는 바로 청결한 신문을 이름 한다. 신문의 지문도 비(非)와 사(邪)가 없이 깨끗해야 할 뿐 아니라 경영의 신념도 불순해서는 되고 경영방식 또한 추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이 지방의 일부 언론은 언론의 탈을 쓰고 경영자나 종사자의 자기 보호 또는 야심 달성의 수단으로 악용되거나 변칙적인 운영으로 스스로 언론권력에 도취되어 스스로 풀어준 언론자유를 묶어 왔다는 점은 숨길 수가 없다. 남해군청과의 갈등은 스스로 야기한 문제로 자신들이 자신들의 발을 묶어왔다. 한편 자신들의 지지자를 위한 끊임없는 여론조작 시도는 타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모습이다. 책임 있는 사회의 목탁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왔느냐를 자문해보면 신문의 나아갈 길이 보일 것이다. 좋은 언론이 되기 위해서는 경영자나 기자들의 확고한 소명관과 언론관을 가지고 성직자처럼 엄숙하거나 금욕적이지 않고는 독립적인 좋은 신문이 되기 어렵다. 기자는 선민이다. 선민이라고 해서 선민적인 사상을 스스로 가져서는 아니 된다. 이는 많은 덕목이나 교양이 요구되는 기자는 언행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영국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엔젤경은 “신문기자는 그 사회적인 책임에 비추어 의사나 변호사처럼 국가 시험을 통해 면허를 줘야한다”고 했다. 어차피 공개적으로 각사가 뽑는 기자는 공인의식의 고취를 위해서 고시제의 운영도 좋은 제도라 여겨진다. 사적인 감정으로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인사의 조그마한 허점이라도 캐면서 부도덕한 자파 특정 인사의 대형 허물은 덮는 일은 글의 특별한 목적성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항력이 전혀 없는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독자나 네티즌을 상대로 우월적인 위치의 신문이 기사로 바로 반박하는 일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우리 지역의 언론들도 이름하여 정론지도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정론지도 아니면서 고매한 얼굴로 가장을 하는 짓이 읽는 독자도 부끄러울 때가 많다. 정론지도 아니면서 정론지로 가장한 얼굴은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신문 자체의 본연을 신문은 본래 그런 것이란 인식을 심어 주어 결과적으로 양치기 소년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면 큰 문제이다. 맛이 없는 다꾸앙이 김치 행세를 하거나 장아찌 모습을 흉내 내서는 아니 될 말이다. 치자가 많은 우리 지역에서 곱게 치자물을 들인 진짜 단무지를 맛보고 싶다. 우리 지역에서도 표상이 될만한 정론지가 있어야 한다. 정론지는 양식이 있는 독자들과 더불어 이 지역의 바로 양심이 되는 신문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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