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 유배객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일본에서“학문의 신"으로 불리며 신사에 모셔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845~903)도 한 때 유배객 신세였다. 필자가 확인한 모든 일본 사전에는 녹봉과 직급을 받은"좌천"으로 구분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 관점에선 광의의 유배로 볼 수 있다.(실제로 유폐 상태지만, 좌천의 경우에는 봉록을 주고 사면으로 귀환하기도 하여 법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좌천이지 유배 아니다. 일어판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인용).
이름에서 해당 한자가 없이 "노(の)"가 붙은 것은 성씨에 고어가 많은 일본어 특성상 스가와라의 경우 "노"를 붙여 읽는 것이 정상이나 관례적으로 빼고 읽고 있다.(필자 주; 비근한 예로 일본성씨 井上의 경우 이노우에로 읽는다. 이 경우에도 "の"에 해당되는 한자는 없다.)
그가 중앙에서 지방 행정기관으로 좌천된 것은 맞지만 과연 유배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도나 오지가 아닌 지방 행정기관으로의 이소 때문이다.그는 헤이안 시대의 정치인, 학자였다. 학자이며 참의를 지낸 스가와라노 고레요시(菅原是善)의 3남으로 태어나 종2위에서 정1위 태정대신에 추증된 인물이다. 일왕 다이고(醍? 897~930)시기에 우대신에 오른 그가 좌대신으로 있던 후지와라노 도키히라(藤原時平)의 참소에 의해 다자이후(大宰府)에 좌천되어 2년 후 현지에서 죽었다. 다자이후는 7세기 후반 큐슈 지방의 행정 기관이었고 현재는 그 명칭대로 후쿠오카현의 시이다. 사후 덴만(天滿)궁에 천신으로 모셔져 있고 한국인 여행객들의 발길도 잦다.
『고지기(古事記.712년)』와 『니혼쇼기(日本書紀.720년)』에는 아메노히보코(あめのひぼこ)로 불리는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등장한다. 천일창(天日槍)은 여러 가지 기적과 전설로 신사 등에 모셔져 있고 스가와라를 그의 후손으로 추정하는 기록도 있다. 그의 작품으로 산문을 모은 『간게분쇼(菅家文草)』가 전12권으로 900년 간행되었다. 좌천 중이던 다자이후에서 쓴 작품을 모은 『간게고쇼(菅家後集)』, 우다(宇多)일왕에게 받친 왕의 와카를 한자로 번안한 『신센만요슈(新選万葉集)』의 편저자라고도 한다. 다른 작품집도 많이 있으나 그 중에는 위작 논란이 있는 작품도 있다. 학문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그도 정치 세계에 드는 바람에 원치 않은 길을 가게 되었다. 후지와라 세력을 누르려던 왕의 신임을 받아 출세했지만 결국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2차 대전 전, 왕실에 대한 충성이 강요될 때, 상징적인 충신으로 지폐에 초상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다자이후에서 왕을 미워하기보다 근신하고 성의를 다한 모습을 알리기 위해 문부성에서 창가로 만들고 불리기도 했다. 1928년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에서 발행한 잡지『킹』에 그에 대한 패러디를 게재했을 무렵 온천에 체재 중이던 사장 나카노마 세이지(長野間淸治) 숙소에 괴한이 침입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 만큼 스가와라의 충절을 중요시했던 시절이었다. 오사카 시의 아와지(淡路)나 스가와라(菅原)라는 지명은 스가와라가 좌천됐을 무렵, 당시 강 하류에 있던 섬에 상륙하였지만 아와지시마(淡路島)로 착각하는 탓에 남은 지명이다.
다이고 왕의 신임으로 승진을 계속했지만 중앙의 집권적인 재정과 권력 집중화를 싫어한 후지와라 등의 귀족들의 반발이 표면화 되었다. 현재 생활을 즐기고 유지를 바라던 하급 관리들 중에는 스가와라의 급진적인 정치 개혁에 불안을 느끼며 불편해 했다. 이런 와중에 제세(齊世)친왕이 왕위에 오르고 다이고 왕의 왕위를 찬탈을 꾀한다는 무고로 결국 다자이곤노소치(大宰權帥)로 좌천되었다. 그 이후 장남과 아들 4명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903년 다자이후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아래는 그가 교토를 떠나면서 읊은 시다.
東風吹かば にほひおこせよ 梅の花 主なしとて 春を忘るな. (万葉集)
"봄바람(동풍)이 불면 향기를 (그 바람결에) 보내주게 주인이 없더라도 너(매화)는 봄을 잊지 말게나"
유장하면서도 떠나는 마음을 짧은 시에 담아낸 솜씨가 범상치 않다. 시에 화답이라도 하 듯 이 매화는 하루 밤새 교토에서 좌천된 스가와라의 집 정원으로 날아왔다는 "도비우메전설(飛梅傳說)"도 유명하다. 스가와라 사후에 교토에서 이변이 자주 발생했다. 유해를 옮기려던 소가 움직이지 않아 그 자리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 소가 덴만궁 경내에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세이료덴(淸凉殿)에 벼락이 친 사건(필자주 ; 930년 기우제 실시 여부를 토의하던 궁내 청량전에 천둥 벼락이 친 사건)으로 스가와라의 원혼이 하늘의 뇌신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으로 유배를 갔던 그의 장남 등이 풀려났다.
화뢰천신(火雷天神)을 모셨던 교토의 기타노에 기타노텐만궁을 건립하여 스가와라의 원혼을 달랬다. 이후 큰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스가와라의 원혼에 의한 재앙으로 보고 두려워했다. 따라서 "텐진사마(天神樣)"로 추앙되고 전국으로 천신신앙이 전파되게 되었다. 각지에 모셔진 "덴진사마"로 인한 재난 위험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 스가와라가 생전에 뛰어난 학자, 시인이었으므로 천신이 “학문의 신”으로 변경되어 모셔지게 되었다. 시험을 앞 둔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유배객이던 "학문의 신"에게 합격을 기원하고 있다. 일본의 현 수상 간 나오토(菅直人)는 그의 후손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유능한 학자들이 정치 소용돌이에서 탄핵이나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간 것은 비슷하다. 다시 재기를 하기도 하고 사후에 명예를 회복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학문으로 지역민들을 교화하거나 가르침을 주기도 하였다.
2011.03.17 15:40 남해. 2011.3.24 남해시대 27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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