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배사.日本 島流し物語

일본 정토진종(浄土真宗)의 개조인 신란(親鸞)의 유배

책향1 2012. 2. 3. 10:47


일본 정토진종(浄土真宗)의 개조인 신란(親鸞)의 유배



신란은 호넨(法然. 헤이안 후기에서 가마쿠라 초기의 일본 정토종의 개조)을 평생 은사로 추앙했다. “법연의 맑은 정토왕생을 주제로 참진을 가르킴”을 계승, 훌륭한 일을 행하고 각지에 염불도량을 만들어 중생 교화에 힘썼다. 자신의 절을 갖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헤이안불교는 귀족들의 열성적인 귀의와 보호를 받아 귀족불교라 일컬어졌는데, 귀족들은 조정의 본을 떠 조사(造寺) ·조탑(造塔)에 힘쓰는 한편 기도(祈禱)와 법회를 자주 열어 그 권세를 자랑하였다.

이렇게 권력자들과 깊은 관련을 갖게 된 승려들은 세속적으로 권위와 결탁하게 되었고, 절은 귀족으로부터 기부 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승병(僧兵)을 두게 되어 많은 폐단을 낳는 근원이 되었다.

일본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가마쿠라[鎌倉] 시대이다. 말법사상(末法思想)을 배경으로 일어난 정토종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는 일만이 정토왕생(淨土往生)의 정정업(正定業)이라고 설하면서 급속히 교세를 넓히다가 기성종파의 반감을 사고 박해를 받게 되었다. 정토종을 확립한 호넨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 여러 종파로 분립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토진종(淨土眞宗)을 개설한 신란이다. 

신란의 염불집단이 융성하게 되자 기존 불교교단이나 정토종의 다른 파로부터 공격을 받는 등, 종파로서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점을 확실히 했다.

정토종이 창립된 것은 1247년이지만 신란의 사후이다. 일본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신란이 생전에 대한 공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신란의 종교적인 신심의 발로라고도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일부에서 신란이 가공의 인물이란 설도 있다.

1921년 정토종 본원사파의 본산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 교토에 있는 절 이름)의 창고에서 에쓰고(越後)출신의 처인 에신니(惠信尼.えしんに. 1182~1268?)가 교토에서 신란의 생활을 묘사한 막내딸에게 보낸 편지가 10통 발견되었다. 내용은 신란의 행동이나 습성과 일치하여 그에 대한 실존 논란이 일단락되었다.

1876년 메이지 왕에 의해 겐신다이시(見眞大師)란 시호가 내려졌다. 니시혼간지나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에 신란의 목상이 있고 “겐신”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그는 1173년 교토시에서 왕태후 보좌관이던 히노 아리노리(日野有範)와 하치만 다로요시(八幡太郎義)가의 손녀딸인 깃고녀(吉光女.きっこうにょ)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181년 교토의 쇼렌인(青蓮院. 교토에 있는 천태종 사찰)에서 덴다이자스 (天台座主)를 은사로 모시고 한넨(範宴)이라는 법명으로 득도 했다. 스승인 자원 스님이 득도를 하루 미루려고 하자 겨우 9세인 한넨은



「明日ありと思う心の仇桜、夜半に嵐の吹かぬものかは」


지금 아름답게 핀 벚꽃이 (내일은 볼 수 있을까)

(안심해도) 밤에 강한 바람이 불어 꽃잎이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필자역>


라고 시를 읊어 제행무상 인생을 문학적으로 아주 잘 표현하여 범상했다고 한다.

쇼도쿠(聖德)태자도「和国の教主」로 존경했고 관음보살의 회신으로 숭배했다.(일어판 위키페디아 사전 인용) 여기서 화국은 일본을, 교주는 석존을 이른다.

1205년 나라의 고후쿠지(興福寺)에서 그의 과실을 들어 조정에 전수염불 정지를 상소했다. 1207년 이를 듣고 분노한 고토바상왕(後鳥羽)은 전수염불을 금지하고 주렌(住蓮.じゅうれん.생몰미상) 등 4인을 사형에 처하고 호넨을 비롯한 신란 등 제자 7명을 유배 보냈다.

이 무렵 호넨과 신란은 승적을 박탈당했고 속명을 부여 받았다. 이 무렵의 그는 엄격한 금욕 생활을 했음에도 불교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했다. 천태종 승려로서 구원을 찾아 오랫동안 정신적 고뇌를 했는데 당시 천태종은 귀족계급과의 정치적 제휴로 세력이 약했었다. 게다가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가 시작되면서 귀족계급이 쇠퇴하고 정치적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귀족계급과 무사계급이 치열하게 다투어 격심한 현실적인 혼란과 고통에 중생들은 염세적인 역사관, 즉 부처가 죽은 뒤 세월이 흐르면 세상은 점점 타락하고 부처의 가르침도 영향력이 약화된다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호넨은 도사노구니(土佐國)로, 신란은 현재의 니이가다현 죠에츠(上越) 시인 에치고노구니(越後國) 고쿠후(國府)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이 무렵 신란은 속명인 “요시자네(善信)”를 사용하고 비승비속 생활을 했다. 신란은 에치고로 간 직후 에신니(惠信尼)와 결혼하여 파계했다. 당시 고위급 유배자들의 민폐를 방지하기 위해 처를 데려 가게 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그가 뿌린 노력은 나중에 정토신종 종단이 세워지는 열매를 맺었다.

20년 뒤 간토 지방을 떠나 교토로 갔는데, 그의 신자들은 호넨이 죽은 후 계속되는 탄압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1256년에는 믿음을 이단적으로 해석하여 종단을 장악하려고 한 큰아들 젠란(善鸞]과 의절해야만 했는데 이는 그의 수도자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충격이었다.

 신란은 정신적으로 낙담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가르침을 중생에게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저서를 편찬했다.

1221년 고토바상왕(後鳥羽) 자신도 죠규(承久)의 난(필자주;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벌인 병란에서 패했다)에 연루되어 오키(隱岐)섬으로 유배 갔다.

유배간지 5년 후인 1211년 쥰도쿠(順德)왕이 사면을 허하여 풀려났다. 이 때 처는 귀경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신란은 스승을 만나려고 했으나 눈이 많이 내려 그 지역에서 교토로 돌아오지 못했다. 

1212년 그의 스승이 80세의 일기로 입적하는 바람에 재회하지 못하게 되자 에치고에 머물렀다. 62세에 귀경하여 저작에 몰두하였으나 관동지방에서는 이변이 속출하기도 했다.

1263년 1월 동생이 방장인 교토의 젠보인(善法院)에서 89세로 입적했다.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고 외로움을 인정받는다는 신란의 가르침이었고  헌신적인 신도들은 모두 정신적 승려라는 가르침은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사회 개혁 및 종교 개혁에 정신적인 규범이 되었다. 신란의 전기(1295)에는  신란은 포교 활동으로 사회를 개혁시키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에치고를 떠나 일본 중동부의 관동 지방으로 가서 1212~ 1236 학문에 정진하고 믿음을 전파하는 활동을 했다.

유골은 도리베노 북쪽의 오타니(大谷)에 납골 되었다. 유죄로 생애를 보냈지만 비승비속의 신조를 끝까지 지켰다. 기독교 학자인 일본 난잔(南山)대학의 고쿠부 게이지(國分敬治)는 자신의 저서 「바우로와 신란」 (パウロと親鸞. 國分敬治. 法藏館. 1984)에서 "종교사상가로서 일본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2011년 3월 유명만화 「슬램 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井上雄彦. 1967~)가 신란의 수도 모습 등을 그린 여섯 병풍이 히가시혼간지(東本源寺)에서 동일본 대지진 돕기를 위해 공개돼 많은 호응이 있었다.

저서로는  한문으로 된 「教行信証」,「愚禿鈔」,「入出二門偈」, 「浄土文類聚鈔」등과 일문으로 「如来二種回向文」 ,「高僧和讃」「正信念仏偈」등 수 십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