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배사.日本 島流し物語

경오사변으로 유배 간 27인의 무사

책향1 2012. 2. 3. 10:32

경오사변으로 유배 간 27인의 무사



경오사변(庚午事変. こうごじへん. 1870)은 당시 도쿠시마(徳島) 번의 하치스가(蜂須賀) 가의 무사들이 가로(家老. 무가에서 최고의 가신. 일러두기 참조)이던 이나다 구니다네(稲田邦植. 1855~1931)의 저택과 공부하던 곳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도쿠시마 측은 청년 무사 800명 총사 100명 사수 100여 명  부사수 4개 대대, 포 4문으로 무장 공격했다.

1만 4천석 규모의 이나다(稲田) 가(家) 도쿠시마 번은 확고한 세력을 확보하기 이전부터 있었다. 막부 정권 말기, 막부 측에 반대하여 이나다 파는 존왕 파였다. 이나다 측은 막부 측의 활발한 활동으로 대립이 심해졌다.

 메이지 유신 후 도쿠시마 번의 녹봉 제도 개혁으로 도쿠시마 번의 가신들은 사족(士族)이 되었지만 이나다 측은 졸족(卒族)이 되었다.

 이를 납득 못한 이나다 측은 사족편입을 번에 요구하고 자신들의 본거지인 아와지(淡路)를 번에서 독립시키고 자신들도 사족이 될 수 있도록  이나다를 번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메이지 신정부에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행동에 들어갔다.

이나다 측은 막부 말기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인정하라는 요구였다. 이나다 측의 이러한 행동에 번 측의 일부 사무라이 들이 그해 6월 11일 이나다의 집과 번사 등을 공격한 사건이다.

그 전 날 이나다 측의 본거지를 불태우고 이나다가 있는 곳으로 처들어갔다. 이나다 측은 일체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집 25동이 불에 타고 자살 2명 즉사 15명 중상 6명 경상 14명의 피해와 300여 명 투옥 감금했다.

결국 정부의 조사에 의해 도쿠시마 번 측의 주동자 10명을 참수하고 번주 역시 할복했다. 하치죠지마로 종신유배형이 27명, 81명은 금고, 근신 형에 처해졌다. 이것은 일본 법제 사상 최후의 할복형이다. 

 1871년 조정에서 주인 이나다를 비롯한 가신 전원을 홋카이도(北海道)의 시즈나이군(静内郡)과 시코탄도(色丹島. 현재 일본의 북장영토. 러시아령)로 옮겼다. 다시 이듬해 히다카노구니(日高国)의 시즈나이로 옮겨졌다. 현재 명마의 산지로 유명한 시즈나이의 언덕 위에는 개척 100년을 기념하여 그들의 투쟁을 말하는 큰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이 사건은 2006년 일본아카데미상 수상작 2005년 개봉된 영화 『기타노제로넨(北の零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감독은 구마모토 현 출신 유키사다 이사오(行定勲(1968~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