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배사.日本 島流し物語

견당부사(遣唐副使) 오노 다카무라

책향1 2012. 2. 3. 10:30

견당부사(遣唐副使) 오노 다카무라



오노 다카무라(小野篁. 802~853)는 헤이안 시대 전기의 학자이며 가인(歌人)이었다. 그의 반골 정신 때문에「野狂」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신장이 6척 2촌(180cm 가량)으로 거한이었다.

 청렴결백하여 녹봉을 주위에 나눠주기도 했으므로 늘 가난했다고 한다. 견수사(遣隋使)였던 오노 이모코(小野妹子. 생몰연대 미상.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의 관료)의 자손이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따라 무쓰노구니(陸奥国)에 있었고 말 타기와 궁술에 능했다. 왕의 격려를 듣고 학문에 열중했다고도 한다.

쥰나(淳和) 상왕의 아들 쓰네사다(恒貞) 친왕이 왕태자가 되자 동궁 학사에 임명되었다.

 834년 견당부사(遣唐副使)에 임명되었지만 정사인 후지와라 쓰네쓰쿠(藤原常嗣(ふじわら  つねつぐ.796~840. 헤이안 시대 전기의 관료)의 전횡에 분개하여 칭병을 이유로 승선을 거부했다. 2번의 태풍으로 도해에 실패하고 3번 째 출발하던 순간 배에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한 후지와라는 배의 교환을 조정에 신청하고 받아들여졌다. 결국 정사와 부사의 배를 바꾸기로 결정되었다.

오노는 “배는 위험해서 견당할 수가 없다”며 견당을 비판하는 노래인 「西道謡」로 조정을 비판하는 시를 만들어 유행시키는 바람에 사가(嵯峨)상왕의 노여움을 사 관위가 박탈되고 오키(隠岐)로 유배되었다. 당시에는 사형제도가 없었으므로 최고형인 유배로 결정되었지만 840년 유배가 풀려 귀경하고 복직되었다. 이는 그 전해 정사의 무사 귀환 때문이다.

 교토시 기타구(北区)에 다카무라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 옆에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묘로 알려진 묘가 있다. 이는 애욕에 빠져 지옥에 떨어진 무라사키를 오노가 염라대왕에게 중재했다는 전설에 근거한 것이다.

무라사키는 생몰연대 미상이고 헤이안 시대 중기의 「겐지모노가다리(源氏物語)」의 작가로 추정되는 여성 가인이고 작가이다. 「겐지모노가다리」는 헤이안 중기에 교토를 중심 무대로 한 장편 소설. 당시의 생활상이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고전이다.

『経国集』이나『和漢朗詠集』에 그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는데 와카를 짓는데도 탁월했다. 『古今和歌集』18수가 있다. 아래는 그의 유배 무렵에 쓴 대표적인 와카이다.



わたの原 八十島かけて 漕ぎ出でぬと 人には告げよ 海人の釣舟(百人一首11番)


멀리 바다에는 많은 섬들이 눈에 보이고 지금 배를 저어 나갈 뿐이다 그렇게

전해주게나 교토 사람들에게 어부의 낚싯배여




泣く涙 雨と降らなむ わたり川 水まさりなば かへりくるがに(古今和歌集)


내가 슬퍼 우는 눈물이 빗물이 되어 내리니 바라는 바다 

그 때문에 삼도의 강물이 불어 저 사람은 건널 수가 없고 돌아오고 말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