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배사.日本 島流し物語

21세의 나이로 병사한 후지와라노 가네나가(藤原兼長)

책향1 2012. 2. 3. 10:26


21세의 나이로 병사한 후지와라노 가네나가(藤原兼長)




후지와라노 가네나가(藤原兼長. 1138~1158) 는 헤이안 시대 말기 정치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의 장남.

1145년 아버지 요리나가 보다 타다쓰나(忠経)라는 이름을 주었으나  할아버지 강경한 반대로 가네나가로 바뀌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할아버지는 조정의 명령으로 토벌된 다이라노 타다쓰네(平忠常. 헤아안 시대 중기의 무장. 1028년 자방의 여러 구니(國)들이 합세한 다이라노 타다쓰네의 난을 일으켰다)와 같은 격이라 여기고 불길하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 요리나가는 형 타다미치(忠通)부터 셋간가(摂関家)의 가도쿠(家督)를 장기적으로 상속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당시 유배되었던 요리나가의 장남인 가네나가의 순조로운 관운을 바랐다.

1148년 11세에 5위중장(五位中将)으로 진급했다. 백부인 타다미치(忠通) 양자가 되고 타다미치 관저에서 원복(元服 겐부쿠. 나라시대이후의 남자들의 통과의례인 성인식)을 했다.

1143년 장남을 얻은 타다미치가 내심 요리나가에게 가도쿠를 맡기는 데에 소극적으로 변하는 바람에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가네나가의 승진 등에 타다미치가 관여 할 수 없게 되었다.

타다미치를 대신해 1150년 후지와라(藤原) 가계의 장남이 되어 실권을 쥐게 된 친아버지의 후광에 의한 것이었다. 1153년 정2위 곤주나곤에 오르고 1154년 우대장을 겸임하게 됐다. 이 해 가스가사이(春日祭)를 상하 고관과 미나모토 다메요시(源為義) 등의 사무라이들과 함께 성대하게 치루기도 했다.

통통했지만 외모가 아름답고 마음 씀씀이도 온화했지만 이미 많은 상류 사회의  교육을 받았으므로 큰 행사를 잘 치루고 인물들과의 교유 관계도 잘했지만 예능에도 자질이 충분했다. 

그러나 요리나가 가(家)와 타다미치와의 대립은 왕실 내부에도 갈등을 촉발시켰고 1156년 호켄의 난의 발생의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가네나가는 형제들과 함께 우지(宇治. 현재 교토 남부의 도시) 지역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요리나가가 패배하고 전사 했다는 소식에 자수하여 이즈모노구니(出雲國)로 유배되어 그의 정치적 생명을 다했다. 2년 후 유배지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가스가사이(春日祭)는 3월 13일 행하지는 나라(奈良) 시 가스가다이샤(春日大社. 나라 현 나라 시에 있는 신사) 제례 의식. “가스가 마쓰리”로도 불린다. 첫 시작은 850년이고 859년 밤에 행사를 치룬 다음, 봄과 가을 상신(上申)일, 두 번 열렸지만 메이지 이후 3월 13일로 정해져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