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갑사 가는 길

책향1 2011. 6. 14. 13:36

갑사 가는 길



비가 지루하게 방학 내내 오던 82년의 여름 어느 날. 그 날도 싱그러운 서울의 인형 같은 아가씨 생각에 늘 들떠있었다. 펜팔로 만난 아가씨. 지금은 50중반을 넘기고 이빨도 빠지는 초로의 모습이지만 그때는 복학생 신분으로 공납금 마련을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할 때였다. 부업으로 가끔 시나 여행기를 잡지사에 기고하고 있었고 당시엔 필자주소가 글 밑에 들어갔으므로 많은 이들로부터 편지를 받았고 특히 여성들로부터 편지가 많았다. 간혹 서정적인 애상을 읊은 시라면 더욱 그러했다. 보통 라면 한 박스 분량 이었고 그 중 그녀는 글씨가 가장 예뻤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읽은 조선작 씨의 단편 소설 「여자줍기」는 청계천이나 무교동에서 젊은이들의 “여자 꼬시기”에 대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소설이긴 해도 당시 남녀 관계를 리얼하게 표현 한 점은 이 글과 마찬 가지로 작자의 경험담처럼 보였다. 그 글에서는 주인공이 동침한 한 여성은 결국 여관에서도 끝내 옷을 벗지 않았지만 그 이유가 성냥 공장 다니다 화재로 화상을 입은 몸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창작과 비평」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남자들이 오랫동안 공들여 꼬신(?) 여성이 그런 모습이었다는 의미이다. 여직원들이 “공순이”로 불리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 했다.


그런 시절 시를 보고 온 편지에 답신을 하는 계기로 오랫동안 서신교환을 서울 처자와 했다. 당시 대학 입시 준비로 학원을 다니고 있었을 때 시작하여 본격적으로는 신입생일 때 휴교령으로 1년을 쉬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대구와 서울의 중간 지점인 대전에서 만나기로 하고 대전 역전 왼쪽 지하 J다방이 만남의 장소였다.


만나면서 그 곳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계룡산 동학사로 오후에 버스를 타고 갔다. 동학사 앞의 상가지대에서 막걸리를 같이 마시다가 슬쩍 주인장에게 계룡산을 넘어가면 몇 시간 걸리느냐고 물어봤다. 2시간 쯤 걸린다 했다. ‘늑대’의 속셈을 감추고 산 넘어 공주에서 서울 행 막차시간에 2시간을 넣어 계산을 하니 빨라도 4시 정도에 출발해야겠기에 시간을 끌다 드디어 그때쯤 계룡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해 8월 한 달 내내 비가 오고 무덥기까지 했지만 간편한 여행자 차림에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하이힐을 신은 그녀와 함께 피곤한 줄도 모르고 남매탑을 대충 구경하고 전설을 음미하기도 전에 날이 어두워졌다. 지금도 남아 있는 헬기장을 내려서니 앞도 보이지 않고 너무 캄캄한데 그녀의 하이힐 뒷축마저 빠져버리는 게 아닌가? 아뿔싸 참 큰일 났구나 싶었다.


엉큼한 도둑놈이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의외로 밤의 등산길은 보통이 아니다. 경사 길에 날카로운 돌, 나뭇가지 등이 발에 걸리고 찌른다. 그래도 즉시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그녀에게 신기고 맨발로 산을 룰루랄라 잘도 내려왔다.


 이상보 선생의 “갑사 가는 길”이란 수필이 과거 고교 2학년 국어책에 있었다. 어쩜 그 글을 쓴 작가라도 된 양 했지만 거기서는 그렇게 낭만적인 구도의 길이 밤에는 어쩜 저승 가는 길 같기도 하고 양말만 신은 맨발로 바위를 차기도 하고 밟기도 하고 가시에 찔리기도 했지만 참았다. 순전히 늑대 같은 남자들은 그 기분 잘도 아실 거다.


갑사 쪽에 내려오니 밤 10시 경 다된 밥(?)이였다. 날은 어둡고 막차는 이미 떠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찾으니 딱 한곳에 불이 켜져 있는 집이 있었고 거기로 들어갔다. 일반 민가에서 그냥 하는 민박집. 그 땐 정비가 되지 않았고 돌담 집인 그 집 앞에는 소주병을 성인키만큼 쌓아둔 기억이 남아있다. 주인이 자는 옆방에 들어가서 밥을 달라니 그 야밤에도 주인장이 장작으로 재래식 솥으로 밥을 해서 갖고 오고 절인 깻잎과 호박나물로 함께 맛나게 먹었다. 주인장의 참 순박했던 모습이 오랜 기억과 함께 살아있다.


둘이서 방에 누우니 그녀나 나나 그때까지 제대로 이성과 뽀뽀도 못해본 처지였으므로 참 어색했다. 키스를 해도 그녀는 입만 크게 벌리기만 하고 또 나는 경상도 남자 특유의 조급성을 발휘해서 고상함도 없이 갑자기 거칠게 안고 뭐 그렇게 저렇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저에게 “그렇게 거칠었다”고 했다. 모두 경험부족 탓이려니.....


2002년 쯤 그곳을 지나다 들러보니 그 민박집을. 관광지 정비로 집이 없어졌지만 많은 보상을 받은 주인장은 절 밑의 상가지역에서 큰 식당을 하고 있었고 그 때의 기억을 저 혼자만이 하는 줄 알았더니 그 분도 그 때의 일을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필자의 갑사 가는 길은 그렇게 험했고 해탈의 길은 고통이었다.


그렇게 시작하여 몇 년이 흘러 결혼 말이 오가고 상견례에 허연 백발에다 굵게 패인 주름과 거친 손, 시커먼 시골 노인인 어머니와 형님들을 보던 순간, 그녀 가족들은 즉각 "노"를 외쳤고, 나와 가족들을 내려다보던 그녀 어머니의 좀 모멸 찬 눈길 등을 눈치 챈 그녀는 울고  불고했다. 그 후 설득이 끝나갈 무렵, 그래도 나도 학교 졸업하는 해에 결혼하려고 노력하며 둘이서 그때 처음 생긴 흑석동 강변의 좋은 예식장도 예약하고 날짜까지 잡았지만 예상외의 난관에 또 처했다.


 나보고 “돈보고 결혼하려 한다”, “집안이 그 꼬라지...” 운운하는 것은 예상은 했다. 집안에 관한 것은 정말 참기 힘든 모욕이었지만 이상한 오기가 복수심으로 변해 올라오는 것도 참았지만 결국 남자인 내가 차였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내가 다닌 대학의 총동창회장에다 집권 여당의 3선 국회의원이었지만 결국 Y.S 정권 때 정치자금 문제로 물먹었다.


내가 언론사 정치 담당으로 있을 때 자연스레 그를 만났지만 할 말이 없었고 "미안하다" 는 딱 한마디만 들었다. 그렇게 당당하던 분이 기자 앞에선 왠지 수그러진 모습이었다.


땡전 한 푼 없이 6개월을 하루에 라면으로 두 끼를 채우던 투박하기 짝이 없던 경상도 시골 출신 고학생에게는 그녀는 너무 무리였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항상 등록금 걱정으로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고생을 했지만 벌써 30여년이 흘렀다.


이제 아름다운 기억은커녕 어떤 미련도 없다. 그녀에게 첫 남자였으므로 그녀 자신은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두 번이나 비싼 등록금을 마련해준 그녀였지만 지금 고마웠던 마음 외에는 추억이니 사랑이니 하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상대의 마음에 남기는 일도 남는 장사(?)라고 도둑놈 심보의 남자들은 말한다.


이제 나를 잘 이해해주는 너무나 평범했던 집사람이 좋은 탓이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채고 가끔 반응을 보려 물어보기는 해도 “기억날게 뭐 있어야지” 다.


하지만 계룡산 갑사 앞 민박촌의 설레던 그날 밤은 기억난다고 하면 아마 전쟁이 일어나겠지.



2011.6.14 13:36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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