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쓰나미 성금”과 굴욕적인 한국인
망언 제조기 이시하라 신타로가 어쩜 오랜만에 망언 아닌 망언을 했지만 결국 사과하며 꼬리를 내렸다. 지금까지 그의 한국에 대한 망언은 일본인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일본인들의 이기주의에 대한 “천벌”을 말했지만 결국 그 이기주의에 백기를 든 꼴이다.
일본의 쓰나미가 몰려 왔을 때 필자는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이 먼저 떠올랐다. 자연재해임에도 자국 국민들의 불만에 또 희생양을 찾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조선인을 구분하기 위해 어려운 발음을 시키고 곧바로 죽창으로 찌른 잔인한 일본인이다. 오죽하면 『국화와 칼』이란 일본 연구서의 제목이 탄생했을까. 토인비도 ”조센진“이라 부르며 원주민이나 열등민족으로 보고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유포한 일본 관변들은 역사상 최악의 범죄 집단이라 했다. 거기다 명성황후 시해는 문명국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정부가 나서기 힘든 일은 항상 민간인 대역이 있었다.
중국이 기증한 판다 곰의 건강에 전 국민이 노심초사한 여린 가슴의 국민이기도 하다. 최근 중국과의 사이가 나빠졌을 때 온 판다에게도 마찬 가지였다. 이런 때 판다는 재일 조선인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의 식민지 강점 당연 논리로 인한 한국비하는 역사적으로 『일본서기』부터다. 약자가 자존심을 버리고 굴복하면 약간의 동정심이라도 내비치는 섬나라 사람이지만 굴복 아닌 반항을 하면 사무라이 정신이 어김없이 발휘된다. 단체의 불의가 언제나 정의가 되어 버리는 일본의 이중적 잔인성은 “민족적 회춘이 불가능”(허문도 글. 월간조선 3월호 인용)할 것이다.
이런 양면성을 지닌 국민성에 한번 실패하면 일어나지 못하는 무수한 일본인과 그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재일동포를 보면 불굴의 정신은 한국인들이 월등하다는 리영희 교수의 지적이다.
최근 국내언론들의 수많은 일본 쓰나미 보도에서 일본인들의 질서 정연한 행동을 본받으라는 식의 보도가 많다. 맞는 말이다. 외견상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가공된 외형적인 모습, 엄격한 교육으로 비인간적인 모습을 본받으라면 할 말이 없다. 거기에는 명성황후도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영혼 따위는 없다. 철저히 감춰진 이중성 중에 왜구적인 잔인성을 먼저 보아야 조상들에 대한 약간의 예의다. “경이로운 절제, 배려정신... 일본은 있다”(중앙일보 2011.3.16일자)가 사실이라면 조선인에 대한 손톱만한 배려라도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두루뭉술함은 대일관계에서 한국인의 약점이다. 벚꽃 원산지가 한국이라고 독립기념관의 벚꽃이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의 악행과 쓰나미 성금은 별개라고 한다면 역시 대범한 한민족이다.
교복자율화를 보던 구로다 야스히로는 극히 일본인의 눈으로 (일본 학생에 비해) 비정형적이고 자율화 도수가 높은 한국학생들이 교육 자율화로 더욱 자율화가 될까 걱정을 했다. 이 말은 일본 학생에 비해 (사회적인)구속력이 약하고 비교적 자유분방하던 한국학생들에게 더 큰 자유를 주니 걱정스럽다는 말이다.(구로다 야스히로.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
최근 외국 가수들의 한국 공연을 선호하는 까닭 중에 하나가 가수와 같이 노래를 합창하며 몸을 흔드는 한국 관객들의 열의였다. 조용히 앉아서 노래만 감상하는 일본 공연과는 다른 분위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남에게 폐 끼치면 안 된다”와 “다데마에와 혼네”의 표출이다. 그들만의 혼네를 알지 못하고 다데마에에만 놀아나는 여론 메신저인 우리 언론들이 더 큰 문제다.
또 흔히 한국인들은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일본인들을 보고 대단하다는 칭찬을 많이 한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것도 비참하다.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은 결과 부엌일에 서툰 한국의 장년층도 있다.
물론 양국의 양상을 보면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유교영향으로 가식적으로 곡을 해야 하는 문제도, 울음이 나오는 것도 속으로 삼키는 것도 문제라는 말이다.
방송사에서 모금운동과 정신대 할머니, 한류 가수들의 기부에 역사적인 사실이 자꾸 연결된다. 일본의 각종 현상을 단순히 보는 노력을 해야 하고 재난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과 결부된 일본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언제 자신들의 잘못을 한국을 향해 풀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튀어나온 못은 박아야 하는 순응적인 일본 국민도 일본정부도 문제다.
독도 영유권 포기 주장의 일본 의원이 여론에 굴복하거나 하늘을 찌를 듯 하던 이시하라가 백기를 드는 모습은 과연 일본의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늘 일본의 국제 도덕성이 문제다.
사회적인 교육에서 항상 한국보다 제약이 많은 일본 국민들이 정말 자기들이 쓸 만큼만 물건을 사고 줄을 길게 잘 섰을 수도 있다. 우리도 홍보만 잘 한다면 언제나 그럴 수 있다.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월등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제약에 좀 더 익숙하다는 의미이지 결코 일본인들의 도덕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방송의 이웃돕기 활동이 곱게만 보이지 않는다. 초를 치자는 말이 아니라 방송사에서 자발적으로 이런 운동을 하는 것 자체가 필자는 굴욕적으로 본다. 여러 사내들 앞에서 옷을 벗은 여자 꼴이 우리 언론드르이 모습이다. 일개 판다 곰보다 못한 냄비근성의 통 큰 한국인들이 거두는 성금을 일본 우익들이 고마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조롱의 대상이 성금을 거둔다고 하면 그들이 기분 나빠 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시하라 같은 자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차분한 보도인 일본 언론만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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