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장고에서의 3개월

책향1 2010. 10. 22. 10:52

수장고에서의 3개월


지난 8월 23일부터니 꼭 수장고 내에서 근무를 한지 3개월이다. 항온 항습설비가 갖추어진 곳이라 환경이 좋을 것이라는 예단은 금물. 단 폭염하의 여름은 좋았다. 더위를 피하는 욕심에 24시간 돌아가는 기계소리도 자장가 정도였으니.

수장고라 하면 박물관 등의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전 근무지인 향토역사관을 떠나온 유물들이 유배문학관 수장고에 모여 있다. 사람도 같이 따라온 격이다.

이사 당시에는 유물의 파손과 분실 등을 우려했지만 이제 정리가 문제다. 이사 온 유물들이 아무 기준 없이 자유 분망하게 놓여 있으므로 목록 대장과 확인 후 순서대로 정리 정돈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망실한 물품이 없어 무척 다행이라 여긴다. 하지만 미등록 유물이나 착오 등록도 많고 새로운 고서류 들이 8박스 입고되어 짧은 한자 실력으로 분류 작업을 하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선다. 진작 한자 공부를 좀 열심히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보람된 일은 아직 분류 해석이 되지 않은 물품들의 번역과 분류 작업이다. 그리고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없는 물품을 찾았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번호대로 정리하다 보면 한개만 못 찾아도 전체 작업을 멈춰야 한다. 찾고 넘어가야 미등록 물품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넓은 유배 문학관 중에 하필 수장고로 유배 온 느낌이다. 꽉 막힌 이곳에서 분류 작업이 끝나면 언젠가 떠나야 한다. 보직도, 앉을 책상도 사무 용품도 마련되지 않은 곳에서 옛 유배객과 같은 처량함을 이 가을 날씨만큼 느끼며 살아간다. 가끔 일이 벅차 낡은 선풍기처럼 앓는 소리도 낸다.

 오늘이 있기까지 무사함에, 숨을 쉼에 감사하며 직업병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다. 가끔 퀴퀴한 냄새를 피해 무성한 잡초를 캐며 내일을 낚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혼자 하며 스스로 보람을 느끼려 노력한다. 걱정하는 지인들의 눈망울을 기억하면 인내력을 발휘해야 한다. 인사치례든 위선이든 문학관을 방문한 어떤 해설사 분은 조곤 조곤 말을 한다. "선생님을 위해 지은 문학관이다"란 말에 모든 것을 참고 넘기려는 용기를 얻었다. 이런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서 이미지 조작이나 하는 못난 장사꾼도 있는 모양이다.

돈과 명예에서 늘 명예 쪽에 섰으며 정의 편을 들었던 나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는 유배객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현실적인 아픔이 묻어난다. 사표를 던지고 싶을 때 맘대로 던지지 못하는  아픔이다.

내일은 내일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회색 수채화 속의  모습으로 기계적인 삶을 탈피하고 싶다. 

 

2010.10.22 10:52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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