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관(釜關)훼리와 현해탄(玄海灘)

책향1 2010. 7. 14. 11:30

부관(釜關)훼리와 현해탄(玄海灘)

 

대한해협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규슈) 사이의 해협을 말한다. 일본식 표현인 현해탄( (げんかいなだ)이라고도 하나, 올바른 표현은 아니다. 역시 훼리란 말도 나룻배란 의미의 영어 Ferry의 일본어식 표기다.독도 동북방 항금어장인 대화퇴(大和堆.やまとたい)이고 대화는 일본의 미칭으로 사용해선 안 될 말이다.

대한해협 즉 현해탄을 생각하면 윤심덕이 배위에서 몸을 던진 사건과 이병주 선생의 역사소설『관부연락선』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개화기를 주도했던 여성 예술가 세 명을 꼽자면 시인 김일엽(1896-1971), 화가 나혜석(1896-1948), 그리고 성악가 윤심덕(1897-1926)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에 유학 가서 신문물을 접한 후 당시 여성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승려이자 시인, 수필가인 일엽스님은 이화학당 졸업 후 일본 유학을 했으며 1920년에 잡지 <신여자>를 창간, 여성해방을 주창했다. 여성에게 족쇄처럼 채워진 유교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연애를 주장했으나 결혼에 실패한 이후 환멸을 느껴 스님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화가 나혜석(1896-1941) 역시 일본에서 공부를 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회부터 5회까지 입상을 했으며 여성화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도 열고 소설도 썼다. 나혜석은 현모양처보다는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1929년 이혼을 당했으며 이후 1933년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연재하는 등 기존의 관습에 항거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은 앞의 두 여성 예술가와는 좀 다른 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한 재원이었으나 유부남인 김우진과 동반자살로 세상을 들썩이게 한 것이다.

윤심덕이 1926년 자살하기 직전 부른 대중가요 ‘사의 찬미’는 윤심덕이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관부연락선은 해방 전까지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 사이를 운항하는 연락선을 일컽는다.

1905년 9월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만주·몽골·중국 등지로 진출하기 위하여 만든 국책해운회사였던 산요(山陽)기선주식회사에 의하여 처음 개설되었다. 이 연락선은 일본의 한국침략의 한 수단이 되어 수많은 한국인을 징용으로 싣고 갔다. 가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의 배경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대다수 다른 여객선들과 같이 이 소설 속의 연락선 곤론마루(崑崙丸)도 징발되어 전선에 투입했으나 , 1943년 12월21일 새벽 2시 반경 미군의 기뢰를 맞고 때마침 불어 닥친 거센 풍랑에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만다.1천수백의 사망자를 냈다고 전해질뿐 , 정확한 수치는 아직도 발표되지 않고 있다.

그 후 1945년 3월부터 사실상 두절된 상태였으나, 1970년 6월부터는 부관페리호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관부연락선』은 동경 유학생 시절에 유태림이 관부연락선에 대한 조사를 벌이면서 직접 작성한 기록과, 해방공간에서 교사생활을 함께 한 해설자 이선생이 유태림의 삶을 관찰한 기록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 기록이 교차하며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장이 이선생인 ‘나’의 기록이면 다음 장은 유태림인 ‘나’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유태림의 조사를 통해 관부연락선의 상징적 의미는 물론 중세 이래 한일 양국의 관계가 드러나기도 하고, 이선생의 회고를 통해 유태림의 가계와 고향에서의 교직생활을 포함하여 만주에서 학병생활을 하던 지점에까지 관찰이 확장되기도 한다.

작가가 시종일관 이 소설을 통해 추구한 중심적인 메시지는, 그 자신이 소설의 본문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당시의 답답한 정세 속에서 가능한 한 양심적이며 학구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 진지한 한국청년의 모습”이다. 능력과 의욕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 하기로는 유태림이나 우익의 이광열, 좌익의 박창학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일제 시대를 지나 해방공간의 좌우익 갈등 속에서도 교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으며,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으며, 좌우익 양쪽 모두의 권력에서 적대시될 때 어떻게 처신해야 옳았겠는가를 작가가 질문하는 셈인데, 거기에 이론 없이 적절한 답변은 주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작가는 다만 이를 당대 젊은 지식인들의 비극적인 삶의 마감-유태림의 실종 및 다른 인물들의 죽음을 통해 제시할 뿐이다.

작가에게는 제3의 길로 그 막힌 출구가 『관부연락선』였던 것이다. “시모노세키는 푸른 산을 등에 지고 뚜렷한 윤곽으로 꿈을 안은 항구와 같고 부산은 벌거벗은 산을 배경에 두고 이지러진 윤곽으로 그저 펼쳐져 있기만 한 멋없는 항구이다.”

관부연락선을 탄 태림의 눈에 비친 한일 양국의 풍경이다. 당시의 상황 즉 우리의 실상이 들어났다. 벌거벗은 산은 가난의 상징이다. 1940년에서 1950년까지, 해방 전후 10년간을 다룬 제1권. 이선생인 '나'와 유태림인 '나'의 기록이 번갈아가며 수록되어 있다. 동경 유학생 시절에 유태림이 관부연락선에 대한 조사를 벌이면서 직접 작성한 기록과, 해방공간에서 교사생활을 함께 한 해설자 이선생이 유태림의 삶을 묘사한 부분에서 작가의 의도나 시대적 상황이 잘 묻어나 있다.

우리 역사에는 너무도 많은 유태림이 있으며 그들의 아픔과 비극이 오늘날 우리 삶의 뿌리에 맞닿아 있다. 이 명료한 사실을 구체적 실상으로 확인하게 해주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것은 또한 이미 수 십 년 전에 소설로 등장한 이 역사적 파고의 기록을, 오늘날 우리가 다시 찾아 읽어야 하는 가치를 지니기도 하다.

 

2010.07.14 11:30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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