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로운 비문 해석
이제 서면을 떠날 때가 다가온다. 오는 화요일(8월 17일) 유물 포장과 이사를 할 예정이다.
서면에 온지 3년째 뭐 보람된 일을 지역 사회에 한 적이 없다. 그래도 어디서 오는지는 모를 씁쓸함은 숨길 수가 없다. 어느 고을에 가나 군청이나 면사무소 앞에는 옛 비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남해에도 산재해 있던 비석을 남산 입구에 모아 비림을 형성 했다.
외침으로 인해 기록문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우리 나라다. 비석 하나 하나는 모두 옛 기록들로 생생한 삶을 전해 준다.비석은 대좌와 비문, 지붕격인 이수 등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산 입구의 비석들도 최근 길 확장으로 바로 옆으로 옮겨 세우면서 어쩐일인지 그나마 남아 있던 대좌부분이 다 사라졌다.그냥 일하기 편하게 바닥에 콘크리트를 하고 그 위에 비석을 그냥 꼽아둔 격이다. 일꾼들이 비석 대좌부분의 중요성을 알리 만무하지만 담당자들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하다.
경주에 가면 대좌부분인 거북이 많이 남아 있다. 귀부(구부)라고 불린다. 하지만 비문이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
귀부와 이수부분만 남아 있어 안타깝다. 만약 경주의 비석들을 귀부를 없애고 이수부분만 콘크리트위에 올려 놓으면 참 볼만 하리다. 비문은 정변과 외침이 많은 탓에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내용에 따라 후손이 당하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남해군)서면 면사무소 경내에 외롭게 홀로 서있는 비석에 관심이 갔다. 내용이 뭔지 보니 일제 시대에 세운 면장에 대한 송덕비이다. 내용은 필자가 해석을 했다.
앞면 : 西面長 鄭**頌德不忘碑
(남해군) 서면장 정** 송덕 불망비
我公莅務 十有五春
業勤振政 風敎學隣
慈祥厥修 勸洽修普
歌以不忘 貞珉是樹
우리 공이 오셔서 공평무사하여 선정을 베푼 지 15년 하고 봄이다.
일삼아 급료로 남 돕기를 하고 풍속과 학문을 이웃에 가르치고
섬세하게 자애를 베풀고 공부하기를 다하였고
모두가 잘 살도록 노력하였으며 널리 베풀었다.
이를 잊지 못함에 노래하노라 단단한 옥돌을 여기에 세운다.
뒷면 : 昭和四年 五月 十五日面民一同立
1929년 5월 15일 면민 일동이 세우다.
2010.08.14 14:08 남해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천 다랭이 마을 CNN 선정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곳 3위 선정 (0) | 2012.01.20 |
---|---|
호구단자란? (0) | 2010.12.18 |
경주이공단향소(慶州李公壇香所) (0) | 2010.02.07 |
경주이씨 양평공파 학재사(금송) (0) | 2010.02.07 |
우리나라 탑(塔) 이야기 (0) | 2009.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