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부, 그 피 묻은 장부
역사적으로도 살생부는 존재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책사 한명회(1415~1487)는 두 딸을 왕후로 만들고 영의정까지 올랐다. 강남의 금싸리기 땅인 신사동 주변은 그의 호를 딴 압구정동이 되었다. 1455년 계유정난에서 그의 치밀함과 계략은 빛을 발했다. 5일 동안 작성한 생살부(生殺簿)는 수양대군에게 건네지고 정적에게는 생사여탈권을 지닌 실세로 군림했다.
언제부터인가 살생부로 바뀌어 과거나 현재나 선거를 앞두거나 정권교체기에 위력을 발휘하는 공통점이 있다. 붕당 정치에서 꼭 살생부가 등장했고 현대 정치에서는 정보정치가 심각할수록 자주 등장하곤 했다.
김만중이나 정몽주나 성삼문, 백이 숙제가 추앙을 받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사실은 각각의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킨 의리와 정절이 높은 가치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은 다르다. 철학이 다른 권력을 수용할 수 없었던 그들 나름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고 칼자루를 쥔 쪽에서도 설득 가능성이 적은 정적을 가장 현명하게 처분하는 방식으로 통했다. 그 결과 대부분이유배를 가거나 처형되거나 굶어 죽었다.
어떤 정권이든 자신의 철학에 따라 동의하는 과정이 의리 또는 철학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현 정권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전 정권의 방향을 고집하거나 현실 정권에 대한 문제점 찾는데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없지않다.
전 정권과 철학을 같이 했던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를 따져보자. 본인은 물론 새 팀을 짜는 입장에서도 도움 될 일이 없다. 서로 다른 철학과 안목이 존재하는 한 국정 운영에 있어서의 엇박자는 불가피할 것으로 지레 짐작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 부담이 되기 십상인 점도 고려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현장에서 보이지 않게 손길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정권하에서도 제대로 된 증거는 거의 없다. 외압이나 정권 탄압에 대한 반발이 도출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는 어쩔 수 없는 정황이 있다.
두 명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은 “이명박 정권의 문화 정책의 슬픈 샴 쌍둥이"라 했다. 과거 국립극장장의 경우는 특이하다. 참여정부시절 신기남 전의장의 누나인 신선희 전서울예술단장이 여러 사람들의 추천 등 절차를 거친 인사에서 동아일보는 “잡음 끊이지 않는 국립극장장 선임”(동아일보. 2006.1.6)으로 질타했다. 지금은 더한 일이 벌어져도 꿀먹은 벙어리 꼴이다.
“유인촌 장관 '기관장 물갈이', 또 졌다”(오마이뉴스.2010.4.14)는 기사는 13일, 서울고법 행정9부(재판장 박병대)는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국가를 상대로 낸 계약해지무효확인 청구소송에서 "채용계약 해지는 무효"라면서 "해지 이후 계약기간 만료시까지의 급여 합계 8193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정권 출범 이후 계속돼 온 기관장 물갈이 인사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김윤수 전 관장은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과 함께 "지난 정부의 정치색을 지닌 기관장"으로 찍혔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임기 중 해임된 분들이다. 1심 판결에 따라 김정헌, 오광수 두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의 '한지붕 두 수장' 사태가 고법의 판결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즉 다시 일단 위원장 직무가 정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철학을 가진 사람들로만 채우는 것도 문제가 많다. 효율적인 측면으로 수월해질 수 있겠지만 일방통행식의 정책운영에 대한 폐해엔 속수무책이 될 수도 있다. 철학의 편향성은 정권 유지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미래사회의 가장 큰 덕목인 포용성과 다양성 포기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점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정책의 편식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다양한 문화 예술 특질을 감안하지 않은 인사에서는 더 큰 문제다. 권력의 가장 큰 적은 오만함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치졸한 살생부에 의해 예술단체 기관장이 임기 중 해임되는 불상사가 이중 한 가지임에 틀림이 없다.
지역에서도 “살생부”가 나돈다는 소문이다. 필자가 3번째에 올랐다니 영광이다. 춥고 배고픈 문인에게는 더 큰 영광이라 다행이다.
2010.04.14 16:20 남해
'책향의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파성이 증명된 남해지역 언론 (0) | 2010.05.20 |
---|---|
가방모찌 (0) | 2010.05.11 |
『N문화휘보』를 읽고 (0) | 2010.04.11 |
N문화휘보 기사 비판 (0) | 2010.04.10 |
없어져야 할 불법주차 (0) | 2010.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