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어려운 외국지명 표기
영국에는 왜 꽃부리 영(英)자를 쓸까란 의문이 가시지 않을 때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당연히 미국의 아름다운 미(美)는 아름다운 나라이므로 라는 편의적 생각으로 의문을 누르고 있었다.
어느 날 흔히 쓰는 ‘야꾸 죽었다’에서 ‘야꾸’가 일본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김소운 선생을 설레게 했던 심순애와 이수일이 거닐던 곳이 대동강변이 아니라는 사실만큼 충격이었다.
어느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진열된 과자 포장지를 보니 일어투가 수두룩했다. “빠다”코코넛 쿠키에서 “웨하스” “산도” 등 그 자리에서 서너개를 지적했더니 마주 앉아 있던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일본어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왜 일본말인지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군지를 편집하면서 일본어투의 직역 문장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아무리 연세가 드신 분들이 집필을 했더라도 일본어를 잘 모르는 분들로 보이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일본어식 표현 방법은 “의”와 “것”의 남용이다.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두 단어가 일본어에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 지 잘 알고 있다.
일본 자매도시인 오구치가 어쩐 일인지 오오구찌 등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냥 ~이다로 표현해도 될 말을 무슨 일인지 "~함으로 ~한 것이다"란 표현이 많은 곳에서 등장했다.
한참 전 우리나라 대법원의 인명용 한자에 일본국자(일본에서만 사용하는 한자 모양의 글자) 峠가 들어 있었다. 일본어에서 이 글자는 독음이 없고 훈으로만 읽는(훈독) 글자로 고개라는 뜻이다. 우리말에서 한자를 훈독하는 경우가 없어 이해가 어렵겠지만 한글 워드 아래하 2007에도 "상"을 치고 한자를 검색을 하면 이자가 나온다. 당연히 이자는 "상'자도 아니고 우리 글에서 사용할 필요가 없다. 대신 고개란 뜻의 峙를 쓰면 불편함도 없는데 일본어에 대한 친절함이 지나쳐 과례에 해당된다.
국어사전에 어휘 수를 늘리려고 일본어 사전을 베끼고 도스토예프스키소설을 중역한 채로 본 사람들이 기성세대들이다.
교과서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병원 사무실에서 아프리카 체체 파리에 대한 병리학 책을 보다가 “쩨쩨”파리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필자가 오류라고 지적을 하자 그 원인을 모르는 옆에 있던 임상병리사는 끝까지 맞다고 우기는 현상이 발생하여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어를 모르는 병리사에게 음원의 상세한 설명은 시간낭비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발전의 3대 장해 요인으로 지적한 체체파리는 흡혈 파리이고 사람에게 수면병(睡眠病)을 전염시키고 가축에게도 병을 옮긴다. 아프리카에서는 '소를 죽이는 파리'라는 뜻의 체체(tsetse)라고 부른다. 이 체체(tsetse)를 일본책에서는 흔히 ツェツェ(쩨쩨)로 표기 한다. 그러니 그 책에서 원음을 몰랐을 저자는 일본어 음 그대로 ‘쩨쩨’로 표기했음이 틀림이 없다.
과거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외국의 나라 이름 표기에 대해 지식이 없는 것인지 초등학생들은 몰라도 되는 것인지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아 늘 궁금한 채로 있어야 했다. 최근 지자체의 군가에도 “정말(丁抹)”이란 말이 나와 성인인 지금도 무척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덴마크의 취음이라고 한다. 이 어원을 따져보려 중국어 사전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 우리 선조들이 개화기에 그냥 가져다 썼을 리는 없다. 나라 이름을 비롯한 외국의 고유명사가 한국어에 대량으로 흡수된 것은 19세기 말 이후다. 물론 그 이전의 문헌들에도 瓜蛙(자바 『고려사』)니 波斯(페르샤 김만중의 『西浦漫筆』)니 英吉利(영국)니 亞非里加洲(아메리카주)니 하는 지명들이 보인다. 프랑스는 佛蘭西, 法蘭西, 法國, 프랑쓰 등으로 표기되었다. 佛蘭西는 앞서 말했듯 일본인들의 한자 음역이다. 그리고 法蘭西는 중국인들의 한자 음역이고 法國은 法蘭西의 준말이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프랑스를 法國으로 표기한다.
어려운 시기 문물을 도입하면서 따라 들어온 외국표기어들은 이제 서서히 버릴 때가 됐다. 일본어에서도 한자 표기 보다 음대로 후랑스(フランス)로 표기하는 쪽이 훨씬 많다.
“화란”이라는 말의 용법은 앞서 말한 “영국”의 용법에 비견할 만하다. 화란의 원어인 홀란드는 네덜란드 왕국의 서부 지역을 의미하지만, 한국어에서 화란은 홀란드를 포함한 네덜란드 왕국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오란다オランダ (和蘭)로 읽고 쓰는 영향이다.
한때 세상에서 널리 알려진 동백림 사건에서 백림은 베를린이다. 이것 역시 한자음으로 표기 한 것으로 한자로만 보면 무슨 의미인지 선뜻 이해가 가기지 않는다.
관례나 습관 탓으로 특히 신문 등에서는 아직도 중국 취음이나 일본어식 표기 지명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중국식과 일본식이 혼재해 있다.
이 기회에 외래어 표기법에 맞고 외교적으로 상대국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원음대로 읽고 표기하는 버릇을 길러야 한다. 몽골이 몽고가 될 수 없지만 몽골에서 우리나라는 솔롱고스(무지개 뜨는 나라)이다.
2010.02.11 10:33 남해
'우리말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루메의 어원 (0) | 2010.03.11 |
---|---|
“도요타”냐 “토요타”냐 (0) | 2010.02.25 |
신라시대 사극에 나오는 왜말 (0) | 2010.02.03 |
립스틱 (0) | 2009.12.12 |
“신나”와 “판넬” (0) | 2009.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