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불만 해소 상대는 언제나 한국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2009년 2월 2일 대규모 리콜 사태와 관련, 나고야(名古屋)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 사죄했다. 도요타의 사사키 신이치(佐佐木眞一·품질 담당) 부사장은 "설명이 늦은 것을 용서받고 싶다"며 "세계의 고객들에게 심려를 끼친 점을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특히 사사키 부사장은 한국 자동차회사(현대차를 지칭)의 코스트 경쟁력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마치 최근의 공격적인 부품원가 절감이 한국차와의 경쟁 때문이라는 인상의 발언을 했다. 도요타 본사 고위임원이 한국차를 자사의 경쟁상대로 직접 지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필자는 이런 일본인이 한국을 그 원인의 하나로 지목하는 것에 대해 심히 불쾌하다. 일반인들은 한국 자동차의 위상이 이 정도였나 하며 자부심을 가지기 쉽다.
하지만 일본인 내지 일본사회 자체의 불만의 해소 상대가 언제나 한국 또는 한국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 사건이 떠오른다. 당시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 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가진 일본인도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 받아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 할만큼 잔악했다.
여기서도 조선인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 약탈하는 사람들”로 규정되었다. 이 또한 일본내 사회불안을 조선인에게 화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임진왜란은 1590년 일본 열도를 통일, 정권을 잡고 오랜 전국 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 자리를 그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내정을 맡게 하고 스스로는 타이코(太合)라 칭하며 그의 야망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 했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일본은 오랜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의 억제를 위하여 대륙을 침략하게 되었다. 국내의 불만 세력의 눈을 외국으로 돌리게 되었고 그 대상이 조선이었다.
과거 일본인끼리의 살인 사건 현장에 북한 군대의 계급장을 일부러 떨어뜨린 일본인이 있었다. 그가 왜 북한군 계급장을 살인현장에 두고 갔을까. 그건 사건해결에 혼선을 두기 위해서 였지만 사실 우월 의식에 젖은 “가축”에 지나지 않는 일본인들은 결국 살인사건에 조선인이 개입된 것처럼 연출했던 것이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이다. 일본의 한국 멸시 사상의 원조는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신라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이 왜곡된 정사 기록을 남겼고 이를 원용한 일본주류들의 손쉬운 우월감 창조에 텍스트였다. 백제왕조의 유민과 근친관계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역사 왜곡이나 한국인 멸시가 순간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그 기저에 잠재한 일본인 자신들의 열등감에서 나온 “다데마에”일지 모른다. 열등감의 교묘한 미화와 그 반증으로 한국인들의 잘못이 있으면 반증으로 삼고 즐길 의도이다. 따라서 일본 국내 모든 사건의 진앙지는 한국이라면 그들은 속이 시원하고 그 해원으로 한국인을 멸시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
국제 도덕성이 없는 일본이 세계를 향해 평화를 주창하는 것은 우습지만 일본이 자랑하는 도요타가 문제가 생기니 그 원인 중의 하나가 한국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방편이고 역시 그 희생양은 한국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현대자동차를 높이 사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결코 기뻐할 수 없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도요타는 이미 1966년부터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었다. 다만 이름만 신진자동차였다. 1966년 5월 26일 시판에 들어간 신진자동차의 '코로나1500'은 일본 도요타와 기술제휴로 선보인 신차였다.
코로나는 열악한 우리나라 도로 사정에 알맞다는 평가를 받으며 말하자면 오리엔트 시계처럼 거의 독점적인 위치에 있었다. 1972년 11월까지 4만4,248대가 생산된 뒤 생산이 중단됐다.
이전에 독일의 그 유명한 할슈타인 원칙이 있었다. 1955년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서독의 외교상 원칙이다. 이것을 응용하여 경제적으로 서서히 일어서려던 중국의 주은래는 중국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나라까지도 거래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주은래 4원칙'을 발표하자 중국 진출에 뜻을 두었던 도요타가 그해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해 기술과 부품 공급을 일절 끊었기 때문이다.
기술과 자본이 약했던 우리나라 기업은 속수무책이었다. 도요타는 그 예의 탐욕적인 상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경제규모나 구매력으로 볼 때 한국에서 철수하고 중국에 진출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본주의 영리회사의 속성으로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나 그들의 무지비한 횡포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별로 없다. 이런 비굴한 회사가 또 다시 한국을 걸고 넘어지다니 혼줄을 내야 한다.
2010.02.03 12:00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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