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세상읽기

중앙일보의 박근혜 비판을 보고

책향1 2009. 11. 18. 08:55

중앙일보의 박근혜 비판을 보고

 

개인적인 중앙일보와의 인연은 오래 전이다. 필자가 50대 중반이니 40년도 넘은

중학교 시절 읽었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 마지막 어진화가였던 김은호 선생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중앙일보는 누가 뭐래도 고유의 유연성과 개혁성이 단연 돋보인다. 이런 말은 신문사 자체적으로 듣고 싶은 말과는 어긋날지 모른다. 일반 독자에 지나지 않고 무명 시민인 필자의 판단이 대기업 중앙일보를 평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따름이다. 무명인 필자가 나서서 이런 글을 적을 수밖에 없는 현실 또한 안타깝다.

연일 중앙일보는 박근혜 내지는 친박계 의원들을 깎아 내리기에 분주하다.

언론에서 친박계 아니라 어느 누구도 비판 할 수 있다. 그만큼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지만 금도를 넘은 듯 중앙일보는 자신들의 언론자유만큼 자아비판과 비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최근 중국 전문 기자가 금배지가 아깝다한 기사와 대기자의 원칙에 갇힌 운운의 박근혜 비판 기사는 단연 금메달감이다.

금배지 운운 기사는 금값이 오른다고 하는 사족으로 자신의 의향이나 지론을 편 탓에 기분 풀이에는 적당했을지 모른다.

기자들도 정치 상황과 닮아 과격해지는 경우는 관심 밖이다. 물론 유행가가 시대를 나타내는 상황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과거 조선일보 또는 월간 조선이 한글 전용을 주창했다가 최근 한자 혼용을 주창하는 변신은 시대상의 반영으로 이해해야 맘이 편하다.

그러나 중앙일보의 두 분 기자들은 국내 정치 전문가도 아닌 분이 여러 예를 들어가며 박근혜나 친박계 의원들 비판은 “힐난"에 가깝다.

중앙일보가 예의 공식적인 껍데기에서 벗어나려는  많은 실험들을 했다. 그 실험들은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로 좀 더 살갑게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들이라 여긴다. 파격으로의 실험은 항상 오버와 일탈이 있다. 그중에는 판형의 변형도 하나이다.

이런 ‘일탈’에서 정치적인 색깔의 일탈이 박근혜 비판도 그 중 하나로 보인다.

원론으로 돌아가서 “법을 지키자”는 사람이 대원군의 척화비로 비판을 받을 대상이라면 그럼 “악법도 법이다”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다. 더구나 수구적인 형태로 원안을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알파이다. 여기는 중앙일보도 자랑하는 유연성을 가미한 것이고 현실에 맞춰 최선책을 찾아보자는 주장이다.

어느 사회라도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 비판을 받는 경우는 사회의 도덕성에 의문이 간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정치 현실, 정치 철새와 마타도어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원칙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데 신문이 그 역할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고소고발 사건이 일본의 몇 배인 줄 아시지 않는가? 이런 현상은 과격한 국민성에만 맡겨 둬서는 될 일이 아니다. 사회 전반적인 불신 풍조와 사회지도자격인 사람들의 행태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주연들의 행태에 그것을 전파하는 언론들의 보도 태도와 많은 연관성이 있다고 보인다.

이런 판국에 중앙일보까지 금배지가 아깝고 원칙에 갇혔다고 하면 언론의 가치판단 기준에 의지하는 대다수 대중들은 정부가 시키는 일은 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정부와 국민이 따로 노는 아주 원치 않은 결과의 양산을 초래한다.

두 분은 아주 알맞은 고사를 인용하면서 비판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인터넷에 수없이 많은 과거 두 분의 기사를 그들의 고사 인용처럼 인용할 수도 있지만 참는다.

박근혜의 주장을 비판하려 엉뚱한 논리로 합리화는 기본이 잘못 됐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소신이라 한들 누가 믿겠는가. 반대정파의 논리가 식자층의 입을 타는 마당에 유연성이 곱게 발휘되지 않았다.

좀 더 기자 정신을 발휘하려면 너무 개인적인 소신만이 아니라 일반인 대부분이 수정안에 반대하는 여론에도 그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또 중앙일보의 위상만큼 공적인 책임이 있다는 자신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09.11.17 14:06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