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신문의 진로와 역할
군민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고뇌해야 할 지역 언론에 대해 독자들이 도리어 우려할만한 상황은 앞으로는 벌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은 독자들이 지역신문에 바라는 무리한 요구는 아닐 것이다. 다시는 소수인 신문사 관계자들이 건전한 다수 독자들의 정신 건강을 혼란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 인터넷 상으로 강한 반대성향의 글을 올린 필자로 추정하여 일부 기자들이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감정적으로 항의하는 일이나 일부 개인에 의해 암묵적으로 신상 파악을 위한 시도는 절대 없어져야 하는 일종의 린치로 이를 통해 반대 성향을 가진 독자들의 정신적인 위축을 노리고 기를 죽이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런 반대 성향을 가진 독자들의 의지를 무산시켜 싹쓸이 한 후에는 과연 지역신문이 노리는 의도는 무엇일까. 지역 신문사 자체의 논리가 이 사회 전체의 정의가 결코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지역 사회에서의 절대적인 영향력 확대 의도라고 해도 무방하다.
언론이 제 아무리 잘 조직된 법인이라 할지라도 오도된 논리로 필력만 믿거나 기자 개인의 지나친 공명심은 언론사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 일부의 원동력으로 필요할지 모르나 지역 언론 역시 사회 규범과 실정법 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지역 신문의 그 충실한 궁극적인 역할이 지역 사회 발전이라는 명제에 대의명분을 부여 할 수 있다면 자신들의 위상 강화에 중점이 있었다는 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따라서 ‘편집권 독립’은 사회의 발전과 부여받은 사명에 충실할 때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고 그 당사자가 ‘전가의 보도’로 이용할 때는 또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방신문 특별법의 편집권 독립 규정은 바로 지역 신문의 역할과 기능을 웅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나라 중앙일간지를 비롯한 많은 신문들이 편집권 독립은커녕 언론보도의 자유가 대내외적인 절대적인 영향으로 인해 제대로 운위되지 못한 상황을 비롯해서 뿌리 깊은 기사의 편향성을 예단한 결과 명문화된 것이지 기자 개인의 방어벽 구성에 초점이 맞춰져있지 않다. 편집권 독립이란 자유 언론의 산 증거이다. 여기서의 언론 자유는 물론 선정주의나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상업성 경쟁으로 인해 독자들에 대한 아부근성과 방종은 우리나라 신문들의 치부였다.
사실상 지역 신문의 지난 몇 년은 터전을 잡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시기였고 자체 갈등의 과도기이자 편파적인 정치적인 편향성에 따른 편 가르기의 시기로 비판받아도 변명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가장 보편타당하고 기본적인 룰인 신문사 자체의 정관을 한 번만 읽어보아도 될 일을 먼 길을 되돌아 온 느낌이다. 정관 내용 그대로 군민들이 진정한 주인이 돼야 할 것이다. 이런 기본 자료를 이해하고 이에 충실했다면 한번쯤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스스로 키가 자란 만큼 기자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하고 고급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지역 신문들이 진정 지역 사회의 공기(公器)로 거듭나려면 아전인수 격의 자체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과거 ‘기사’처럼 쓴 글이 광고 표시를 냈다는 변명 하에 기관으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도 얼마 전 동업종의 다른 신문에 기관광고가 몰렸던 현상을 ‘편파적’으로만 우긴다면 기본적인 신문사 자체 양심의 상실이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쉽게 비판하는 이중성은 심각한 모럴 해저드다. 영국 자본가들의 불법행위에 분개하며 공산주의 이론을 소리높여 주창했던 마르크스는 정작 자신이 데리고 있던 불쌍한 하녀에게는 단 한 푼의 임금도 지불하지않고 쫓아 내는 등 노동자 착취를 한 두얼굴의 이중 인격자였다. 명성에 가려진 치부를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이다.
양심적인 기자 즉 도덕성이 높은 기자를 발굴하고 교육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반적인 성향과 오타가 아닌 단어 선택의 오류는 기자 개인의 실력부족이거나 법인 자체의 교육이 전무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자아비판 기능의 결핍과 무늬뿐인 오피니언란은 엄밀한 의미에서 큰 의미가 없다. 편협한 기자들의 사고가 없어지지 않는 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비판만 수용하는 기사 취사로 한계에 부딪힐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과감한 오피니언란의 활성화를 통해 강력한 비판의 수용을 통한 건전한 반대 의견에 대한 인내력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반대 의견의 수용은 신문사 자체의 편파성과 편협성을 희석시키고 객관성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문사 자체 홈페이지의 자유 게시판 등의 글 올리기에 대해 일부 특정단어나 특정인사를 제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독자들의 비판적인 의견을 막고 있는 것은 신문사 자체의 편협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으면서 언론사란 이유로 자신들은 비판을 맘대로 하는 꼴이다. 비실명일 때의 군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은 지역 신문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자주 올라 온 적이 있다. 신문에 관한 내용은 신문사 자체의 홈페이지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비판적인 기사의 글을 아예 올릴 수 없도록 하고 있고, 또한 비판적이거나 기사에 대한 반박 내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야하고 공익적이기도 한 신문이 지면도 할애하지 않아 신문에 대한 비판의 분출구나 마땅한 제어 장치가 우리 지역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명백한 신문 기사의 잘못은 일주일이 지난 후 마지 못해 조그마한 "정정보도문"으로 면피(面避)했다.
건전한 비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신문사 자체의 자아비판 능력이 함양되지 못하면 신문사가 자신들만의 논리적인 철옹성을 쌓아 자만하는 결과가 된다. 기자는 지역의 대표지(代表紙)를 위해서라도 기자로서의 소양이나 능력 이전에 의식 수준의 한 계단 격상이 절실하다. 오늘의 지역 언론현실을 자책하고 고뇌하는 기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철옹성을 쌓고 타성(惰性)에 안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언론 권력에 도취되어 스스로 언론에 대한 자의식이 마비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신문이 매주 발행되고 나면 신문에 대해 회의(懷疑)해야 하고 정도(正道)였는지 정론이었는지를 반성해야하며 정확성에 무책임했다면 신문기자로서의 정신박약이다.
진실로 기자들은 신문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칼집에 든 자신의 칼이라 할지라도 손잡이가 없는 서슬 퍼런 칼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기자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특전이 있고 기자증과 녹음기가 주어진다고 해서 권세가 아니라 도리어 기자의 신분은 공복(公僕)에 가깝게 보인다. 바로 이 점이 신문이 사회의 목탁이어야 하고 결코 몽둥이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독자들이 위임한 알권리를 위해서 선동적이고 부정확한 신문에게 언론자유를 승인하지 않았다. 공익기관과는 거리가 먼 신문이 권력 기관화하는 일은 월권행위일 것이다. 1832년부터 신문이 발간된 터키에서는 한 때 반정부적이고 불경(?)스러운 기사는 잘리거나 가차 없이 개작이 됐다.1903년 세르비아 왕 부부가 살해 됐을 때 터키의 독자들은 소화불량으로 죽은 줄 알고 있었다. 1901년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되었지만 그저 탄저병으로 죽은 것으로 보도했다. 이런 사실에서 신문의 매끄러운 문장력보다 진실 보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게 한다.
한때 군청의 홈페이지에서 일부 신문의 편파성 논란이 심할 때 어떤 네티즌이 올린 그림 한 장이 많은 눈길을 끌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젊은 여자의 젖을 허겁지겁 빨고 있는 그림이었다. 당시 설명에는 푸에로토리코의 독립기념관 입구에 걸려 있는 그림이고 중년의 남자는 유명한 그 나라의 옥중의 독립투사로 (고문으로 인해)배가 고파 마침 출산을 하고 면회 온 딸의 젖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노로 보일만 한 이 그림이 주는 교훈은 보는 시각에 따라 진실이 얼마나 달라 질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6월 3일자 지역신문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국회의원과 군수가 갈등만 빚는 것처럼 잘도 묘사해 기사화 했다. 간담회 자리에서 설마 갈등을 빚는 그런 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국도 19호선 노선문제로 읍민과 고현 면민이 마찰만 빚은 것도 역시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곧 시작될 전선 지중화나 가로수 교체공사도 자신들 신문에 광고 까지 나온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공사 과정을 자신들 입맛에 맞는 군홈페이지 글들을 유효적절하게 잘 인용하며 감상적(?)으로 군민들 머리를 또 한번 복잡하게 하고 있고 마치 지역 사회의 작은 갈등이라도 있으면 참 즐거운듯하다. 기자들의 개인적인 사신(私信)이 아니라 돈을 받고 팔리는 유가지(有價紙)가 전반적인 내용을 도외시 한 채 일부 지엽적인 문제를 일면부터 제목으로 하는 것은 철저히 상업적(성)이거나 정치적이다.
광고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 신문이 권위가 없으면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성을 잃고 광고수입도 줄어든다. 지역신문의 특성상 가장 큰 광고 고객인 지자체로부터의 독립은 항상 필수요건이다. 경영상 살아남기 위해서 적당히 윤색(潤色)된 기사는 지역민들의 눈을 멀게 하고 적당히 조탁(彫琢)되거나 편파적인 시각의 정치성 기사는 신문사의 존립 의미를 의심케 할 뿐이다. 신뢰성이 있는 신문은 독자들이 존경한다. 상업성과 공익성을 잘 조화시켜 존경받는 지역 언론이 돼야 할 것이다. 열악한 경영 상태로 인한 상업성이 사회적인 책임일 수 있는 공익성을 저해할 때 지역 대표지로서는 자격을 상실한다. 공익성을 유지할 때 경영 압박으로 인해 광고주들의 눈치만 봐서는 안 될 일이다.
최근 미국 뉴저지 주의 남부 FM 방송에서 백인 진행자가 “아시아의 소수 인종이 미국의 선거를 좌우해서는 안 된다. 미국인은 미국인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에디슨 시의 시장 후보 경선을 앞두고 가장 유력한 한국계인 준 초이(Jun Choi) 즉, 34세의 최준희를 겨냥한 인종 차별적인 방송이었다. 방송이 나간 후 아시아계나 소수 민족의 항의가 이어져도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완강하게 사과를 거절하다가 이 방송사의 주요 광고 고객인 현대차가 문제의 발언이 방송된 후 광고를 중단하자 자유를 외치던 언론이 결국은 자본의 압력에 굴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기본적인 자유와 자본과의 관계에서 사회 통념을 깬 내용의 방송은 결국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여론은 항상 린치(私刑)”란 말이 있다. 인간의 열성(劣性)에 야합하여 고관의 목을 날리고 부자들을 발가벗기는 일이야 말로 대중들에게는 통쾌한 구경거리고 재미나는 카타르시스이다. 이런 경우 상업주의 신문은 선동하는 삐라가 되어 그것을 줍는 사람 머리수만 헤아리게 된다.
지역 신문이 지역을 대표하는 고급지로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지켜보고 도와 줄 것이다. 우리가 지역의 발전과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건전한 언론에게 자양분을 줘야 하는 이유가 우리 모두에게 지역의 발전이란 명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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