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현태 남해군수에 대한 "언론"의 도를 넘은 “석고대죄”

책향1 2009. 6. 19. 16:12

 

정현태 남해군수에 대한 "언론"의 도를 넘은 “석고대죄”

 


정부 청사나 기관 앞을 지나다 보면 1인 시위를 가끔 본다. 현재 국회 의사당 정문 앞에서는 구속된 서청원 의원의 아들이 부친의 억울한 구속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집시법 위반이 아닌  시위로 변형된 시위 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문득 왕조 시대의 시위 즉, 석고대죄가 과거보다  현대판 버전이 높아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문화라 한다면 감성이 없는 자칭 "언론"이 문제다.

조선 시대에는 이 방법 말고도 자신의 청원이나 탄원 방법이 여럿 있었다. 신문고를 두드리거나 육조거리나 관청에 방을 붙이는 방법이다.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북이나 징을 치기도 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짚방석 위에 엎드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임금의 처분이나 명령을 기다린다. 간혹 자신의 충정을 알아 달라는 의미도 있었다.

머리를 풀어 헤친 것은 마음을 비웠다는 의미이다. 의관을 풀어 백지 상태인 자신을 맘껏 처분하라는 의미이거나 진정한 자신의 충정을 받아달라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니 (마음껏 처벌하라는)처분을 기다린다는 의미이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폭력성도 없고 화염병도 없고 언론들의 가시 돋힌 폄훼도 없다. 네 탓을 강조하는 오늘의 정치 상황과도 사뭇 다른 모습이다.

권위 있는 언론에서 타인에게 석고대죄를 줄기차게 요구하면 뭔가 생각해 볼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떤 언론도 사회 통념상 타당해야 기사화 할 정도이고 지역에서는 더욱 악영향 파급을 신중히 판단해야 옳다.

가장 객관적인 재판에서 무죄 판결 확정된 사안을 언론이 일탈하여 정치인 개인에게 무한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횡포이고 감정이다.

이 지역 언론들이 정치적인 사건 보도 일수록 일반 여론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판단은 늘 상투적이거나 고유의 편향성을 드러내곤 했다.

지역에서 대표적인 “식물군수”운운은 자신이나 정파적인 이해관계를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몇몇 주위 사람들의 말만으로 보편성을 얻거나 객관성을 담보하기에는 너무 미약해 보인다.

또 다른 "언론"에서는 지나친 사실 왜곡과 정파적인 기사로 남해읍 네거리에서의 “석고대죄”를 요구했다. 자신들을 되돌아 보지 않은 맹목적인 사죄요구는 어쩌면 개인적인 기죽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인 언론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윤리성도 갖추기 전에 당사자에게 가혹해 보이고 개인 명예를 훼손할 수 있고, 진행 중인 사건 결과를 예단하며 섣불리 달린 입으로 떠드는 것은 보기가 민망했다.

어떤 문인도 수많은 사과 요구에 일체 응하지 않은 사실은 그 분의 강직한 품성에 명예훼손에 대한 최종심 판결문 때문이었다. 그 분 역시 법적으로 무죄 판결이 난 사안에 끝까지 사과 요구는 타당치 않다는 양심 때문에 끝내 사과를 거부하였다. 아무런 진실성이 없는 기사는 선량한 독자들이나 지역사회에 잘못된 선례를 남기고 못된 지역에서 외설일 수 있다. 개인 입장을 감안하면 가장 객관적인 판결문 등에서 무죄이면 부질없는 "언론"의 사과 요구는 개인 양심을 해치는 일이다. 

지역에서 공익을 잊은 채 설치는 언론관계자들이 상황에 따라 기사에 의한 지역 가치의 마이너스도 정의감보다 앞 설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길 바란다.

물론 자신들의 정의가 최고의 선이 아니라는 점까지도.

필자는 비슷한 사안에 인간이 사는 세상임을 담보로 립 서비스나 도의적인 사과는 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진실성이 있을 수 없는 영양가 없는 립 서비스를 과연 지역언론이 요구 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스스로 "언론"이라 한다면 사실, "석고대죄"를 운운하기 전에 자신들은 잘못된 기사를 스스로 전국에 알린 원죄가 있다. 이런 사실을 스스로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전체 군민 명예를 운운하는 것에는 숨겨진 자신들의 의도를 먼저 밝히는 것이 언론으로서 우선이다. 자아비판을 꺼리는  지역언론은 그 전도가 자명하다,

지역의 언론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를 노림은 자신들로 인한 지역에서의 부정적인 역기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주민 소환을 주창한 용감(?)한"언론"이 있었다. 방종은 사회악이다. 약간의 짐작만으로 만약 그들 주장대로 이루어 졌다면 "언론"은 역사의 죄인이다.

그들에 대한 사회 양심들이 공격에 나서야 하고 궁극적으로 자연도태가 돼야 한다.

진정 그들이 지역 사회를 위한다면 그 지독한 정파성을 씻어야 하며 더러운 과거에 대해 우선 반성이 급선무다. 개인인 자신들의 부각 또는 정치성향 전파나 정파적인 이익을 노린 얼치기 "언론”의 부작용에 대해 성찰해야 함이 마땅하다. 다른 신문도 그렇다라는 손쉬운 핑계거리에 스스로의 정당성 부여는 통하지 않는다.

스스로 모르면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는 알면서도 군민들을 우롱하려면  언론을 자처하지 말아야 하며 영향력 행사 시도는 즉각 그만둬야 하는 얼치기임에 틀림이 없다.

과거 음주운전자 공무원의 구제를 위한 기사나 특정업체를 위한 기사는 공익을 망각한 언론의 망발에 가까웠다. 지나친 언론들의 안하무인은 자신들의 살길 찾기에 지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언론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 의문에 해명 한 번 없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시류에 적당히 왔다 갔다 하는 정체성은 개인이 아닌 언론들의 기사자체가 가치 없다는 의미다. 

어설픈  “언론”이 남을 향해 부르짖는 "석고대죄"는 내 탓이기보다는 “네 탓”이 사고의 근저에 잠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지역 "언론"은 정말 무엇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 후안무치에 자만하고 있다.

지역에서 언론을 제어할만 한 역설적인 세력이 없는 점을 이용하고 있다. 언론이기보다  성향 풀이와 그 공급에 급급한 자칭 "언론"들의 역기능에 대해 이제 제재가 필요하고  그들의 지역사회에서의 순기능이 의문스럽고 정말 말 할 단계에서는 잠만 자고 있었다.

공직자에 대해서  개인적인  비방이나 하면서 언론으로 자처한더면 뭔가 부족해 보인다.

지역에서 좀 더 솔직해야 하는 언론자체부터 복심을 드러내는 것이 정론직필이 아닐까? 스스로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 그 이유는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성균관 유생들이기는 커녕 직업적이고도 극히 상업적인 “언론”이면서 진정 참언론의 길이 무었인지 모르면서 언론인이라 자처하는 그들의 오만함에 묻는다.

 

2009.06.19 16:12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