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현태 남해군수 높은 도덕성과 지역언론의 가벼움 비판

책향1 2009. 6. 4. 12:44

 

 

정현태 남해군수 높은 도덕성과  지역언론의 가벼움 비판

 


“비판”이란 용어는 숟가락으로 밥 떠먹을 힘이 남아 있음을 나타내고 비판 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올리고. 판단력을 높여주어 사람이나 사물, 이치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게 한다. 논리적일 경우 구체적인 사실에서 일반론을 끌어내는 것이지만 과학적이 아닌 일상의 것들은 흔한 사실들에서 구체적인 것을 도출하는 것이 더 설득력과 이해력이 크다. 또 그 반대적일 수 있는 세상의 이치의 귀결은 곧 한 줌 흙이다.

대제국의 징기스칸조차 별 수 없었고. 양귀비도 클레오파트라도 예외가 없었으며. 대일본 제국도, 대청도 티무르제국도 비껴갈 수 없었다. 이태백도  물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당대의 석학 원효도 자연이치를 물리칠 수 없었고, 윤선도, 김만중도 병에 걸린 것이다.

사상과 형색만 다를 뿐이지 생명 있는 한 한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 지역에서 부정되고 있으니 그것은 아직도 지역언론 관계자들이 몸은 이미 제도권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우상으로 남으려 하고 이데올로기가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가 주는 이름을 얻고 그 유,무형의 혜택을 받고 있다면 그는 필경 제도권사람인 것이다. 이 경우 필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제도권  밖은 언제나 비교적 신선하고 자유롭고 생동감이 있다. 모든 작가들이 등단하기 전이나 정치인들이 정치 입문하기 전의 학자 등의 모습으로서 유교의 가르침대로 비굴하지 않은 것이 바로 비제도권 사람의 도드라진 자세이다. 소설가 이외수도 대한민국시인 김관식도 귀천의 천병상이 그렇고 걸레 스님 중광 역시 그렇고 매월당 김시습이, 김병연이 그렇다. 이들은 언제나 일탈을 꿈꾸며 속된 것을 부끄러워한다. 세련되고 노회하지는 않지만  함축미가 있고 신선함이 듬뿍 들어있다.

진리는 독점될 수 없음을 믿으며, 사물을 규정하지도 않았고 사고력의 한계는 아예 없었다. 이들은 지식을 권력으로 보지 않고 유식의 횡포나 작품으로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식이나 문학을 횡포로 알고 억지라고 인식할 때 이것이 바로 지식인의 현실참여의 경계인 것이다. 이를테면 기준을 정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가장 속물일 수 있는 정치적 판단력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희화화가 필연이다. 지역에서 비주류란 말이 정확하다. 비주류의 소외감이 거친 감정적인 단어로 표현되었다면 비굴이고 자신들의 부각이고 정치적인 계산이다.

문학이든 다른 부문이든 성공한 사람들의 결점은 자신을 부지부식 중에 전지적 인간으로 상정하고 착각한다. 도리어 실패한 형태는 도가 넘은 막말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필요성을 느낀다.

이런 것이 세상은 넓어 오늘 우리가 아는 지식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당장 폐기처분될 수 있으므로 뜻을 세워 평생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훼절될 수 있는 것이 더욱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를 보고도 전체를 보았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진정 반성이 따라야 하지만 지역에서 양심적이지 못한 언론환경이 없어야 할 공직자의 도덕성을 훼손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그것이 횡포로 비쳐지고 시위로 나타나며 유세로 보인다면 그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서 지역의 일부 자칭 언론인들이 해당된다.

문학은 다른 분야와는 달라 항상 긴장해야 한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딴 생각한다는 공산 이론은 이 경우는 옳다. 공자의 자리는 항상 따뜻하지 않았다. 옛사람들을 목탁(木鐸)을 삼으려 한다면  하이데거 표현으로 공자는 “궁핍한 시대의 시인”인 셈이다.궁핍한 시대의 공자로부터 「주역」을 펼친  문왕(文王)이 있으며,이소(離騷)의 굴원(屈原),「사기」(史記)의 궁형 당한 사마천(司馬遷)이 있다.“발분저서”(發憤著書)의 풍습을 구양수(歐陽修)의 궁이후공(窮而後工)에서 궁여지책(窮餘之策)이지만 그런 교훈을 지역에서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지역언론의“가벼운 대중성”에 기대하지 않았다.

대충 권력은 문사를 박대한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화려한 박대라도 받을 많한 문사는 지역에서 찾기 힘들다.

  구부러지고 휘어진 나무가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아 굵어지고 울창하면 곧 새들이 날아와 노래한다. 잡목에 가까운 나무가 수양을 하거나 면벽하지는 않았지만 혹 신령하다하여 인간들이 금줄을 달지 모를 일이다. 지역에서 분열과 질시가 마음을 비우지 못한 자들의 속된 짓이 큰 틀에 묻혀 가고 있다.  필자는 지역에서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우리가 도외시하는 이름이 아닌 또 하나 극복되어야할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사회 분열과 감정의 열정, 즉 지역 발전으로 승화시키기에는 뭔가 마음이 허전함을 숨기기 힘들다. 휘어진 나무 보다 못한 인생이다.

궁이후공도 모자랄 판국에 진리를 논해야 할 지역 언론은 여기서도 강너머에 있다.

 

2009.06.04 12:44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