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현태 남해군수에 대한 지역"언론"의 치기와 사실 왜곡

책향1 2009. 5. 16. 11:22

지역"언론"의 치기-사실 왜곡과 도 넘은 막말의 향연

-정현태 남해군수에 대한 지역"언론"의 치기와 사실 왜곡-

최근 지역 “언론”이 단연 화제다. “***군수 장기집권 운동”과 ” , “부남회 핵심인사 남해춘추창간”, “직권남용으로 만들어진 *군수 탄원서", "부남회 특명 *** 일병을 구하라" , "***군수는 본지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황급히 빠져 나가는 ***군수 모습", "남해군 공무원조직을 움직이는 부남회", "*군수주변의 똥파리들을 쫓아내라!" 등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인터넷을 장식하고 있다. "식물 군수"운운한 또 다른 언론은 그 정파성이 극에 달했음을 그대로 나타냈다. 정파성이 아니라면 기사작성 능력부족이든가 아니면 정정파에게 유리하게 할 목적으로 보인다.

이들 기사들의 공통점은 제목부터 자극적인 점과 내용이 극히 편향되고 확정된 사실보다 추측에 의존하여 편파적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제목과 내용이 상이한 일부 기사는 글의 목적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기사들은 공직자에 대한 비판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피와 살이 되는 쓴소리가 아닌 감정의 교묘한 표출과 정파성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글은 일상의 기록이고 시대의 기록이다. 물론 사실에 대한 기록은 해석하는 사람에 다를 수 있다. 이런 개연성을 이용한 편향성 짙은 글을 "언론"이란 이름 하에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이 나올 수 없다. E. H. 카는 “역사학자가 정확성을 기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의무”라고 했다. 이 말에 물론 역사학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공적 개념이 있는 언론 종사자는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양자모두 사실을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 진실의 매개체인 언론이 진실 전달보다 다른 부수적인 이익을 노린다면 또 다른 풍파가 인다.

해방 무렵 국내 독립운동가인 여운형이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로 부터 수권 교섭을 받았다. 그가 현재 민족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으나 사실 친일분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임정 시절 일본 밀정에게 임정 기밀을 누출하고 총독으로부터 자금을 받기도 하며 황국신민 선서도 했다.

또 다른 예는 1932년부터 신문이 발간된 터키에서는 한 때 반정부적이고 불경(?)스러운 기사는 잘리거나 개작이 됐다. 1903년 세르비아 왕 부부가 살해 됐을 때 터키의 독자들은 소화불량으로 죽은 줄 알고 있었다. 1901년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되었지만 그저 탄저병으로 죽은 것으로 보도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젊은 여자의 젖을 허겁 지겁 빨고 있는 그림이 있다.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니지키스 박물관에는 죄수의 몸으로 아랫도리만 수의를 걸친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이 한 폭 걸려 있다. 원제목이 「Roman Charity」, 화가 루벤스(1577-1640)의 그림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늙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애정행각을 묘사한 이 작품에 불쾌한 감정은 포르노라 비난하기 쉽다. 이런 야릇한 그림이 어떻게 유명 박물관의 벽면을 장식하는지 의아심을 갖는다.

수의를 입은 노인은 이 젊은 여인의 아버지(Cimon)이고, 커다란 젖가슴을  드러내 놓고 젖을 먹이는 요염한 여인은 바로 노인의 딸(pero)이다. 아버지인 Cimon은 고대 로마의 독재 정권에 반발하여 독립운동을 했던 투사였다.

 중년의 남자는 유명한 옥중의 독립군으로 배가 고파 마침 출산하고 면회 온 딸의 젖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노로 보일만 한 이 그림이 주는 교훈은 보는 시각에 따라 진실이 얼마든지 달라 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이 사실의 알림과 달리 정파적인 이해로 인한 유불리 현상이 발생하면 글을 취소해야 한다. 성급하게 글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글에 대한 비판에도 귀를 막고 있으면 글의 목적이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왜 지역에서  이 '정치성' 지속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정파적인 이익을 얻고 반대편에게 개인 감정 표현으로 불이익을 주고자 한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사실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점을 이용하거나 양심 감각이 둔감하고 무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언론"이라 외쳐도 거의 대부분의 간부들이 특정 후보를 위해 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지역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다. 그 상대방이 보궐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이라면  그 목적을 더 선명하게 하고 당사자들은 먼저 자중하는 게 옳다.

이러한 과오가 일부 세력에 의해 미화되거나 부추김으로 지역 선거문화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 누구나 비교적 창업이 쉬운 인터넷으로 쉽게 "언론인"이라 자처 할 수 있고 자신의 혈연관계나 지면 관계로 사실상 홍보 작업을 해도 법적인 제재 방법이 없다. 또한 언론자유를 이용하여  누구나 인터넷을 창업하여 보복 시도도 가능하다.  결국 여론과 독자들의 양심에 따라 자연스런 도태나 해결을 요구하는 법정신은 너무 나약하다. 얼치기 언론의 횡행은 사회의 건전한 도덕성만이 막을  수 있고  자연 도태도 시킬 수 있다.

필자가 이런 경우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지역에서 또 다른 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적인 보복은 항상 실권자가 그 실권을 잃었을 때 발생한다. 그럼 재임중 상대방을 줄기차게 몰아세우지 말아야 권력을 잃었을 때 편안하다. "언론"도 평소에 잘해야 한다. 언론이라 자처하며 일부 대중의  속성과 일부 지지자들의 환호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지나치게 편향된 기사는 결국 사회적인 보복이 필연이다.

이런 사실을 간과한 채 마구잡이식 부정적 기사는 자신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층 더하고 종국적으로 사회의 독이 될 수 있다.

 지역 ‘언론’의 얼치기 기사에서 정파적인 이익에 집착함으로써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글을 쓰는 감을 준다. 공자는 “思而不學則殆矣”라며 생각은 많으나 책을 안 읽는 사람을 가장 위험하다고 했다. 독자들이 위임한 알권리를 위해서 선동적이고 부정확한 언론에게 언론자유를 승인하지 않았다.

공익기관과는 거리가 먼 '언론'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실 왜곡 월권행위이다. 언론의 기본인 비판 기능에 덪붙은 개인 감정 풀이 도구가 언론이라한다면 이 나라의 언론은 다 죽었다. 일부 대중들의 휘발성 관심에 기대어 자신들에게는 관대하면서도 타인에게는 명예훼손을 감수한 비판은 "외강내유"이고 야비하다. 여기에는 지역언론도 중앙언론 재벌도 그렇다.

정파적인 생각보다 기본 양심과 양식이 중요하다. 정파적인 이익 대변은 오히려 한참 다음이다. 남해 여론을 앞으로도 주도 하겠다는 미망(迷妄)에 집착해서 일을 그러치고 있다. 무모한 용기는 이런 일에 발휘되지 않기를 바란다. 도 넘은 막말의 향연이  지역사회를 향한 양날의 칼이다. 개연성과 추측으로 언론자유를 들먹이며 의도적으로 자행되는 개인 도덕성에 대한 난도질은 당장 그만 둬야 한다. 비판도 감정적이지 않을 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2009.05.16 11:22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