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적인 지역“언론”의 속성

책향1 2009. 5. 2. 11:10

정치적인 지역“언론”의 속성


지역에서 많은 관심이 가던 일칭 “뇌물사건”이나 “선거법 위반”이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자가발전식의 자충수에 정파적인 편견으로 자작극 처럼 보이기도 하여 많은 걱정을 불러왔었다. 

필자는 이 일이 모두 연관성을 지녔고 거기에 정치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모든 정치 사건이 명확하게 밝혀 진 일이 없다. 그 이유는 심정만 가지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이용하여 우선 저지르고 보는 편파성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사회적인 많은 풍파가 예상되는 정치적인 일의 시말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런 화두에 그냥 넘어가지 못 할 몇 가지 교훈이 있다.

사안에 정치적이라 함은 쉽게 말해 정파적인 이익을 위한 상대방 죽이기를 말한다. 거의 모든 정치적인 사건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상대의 치명적인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한 상처만 만 남았다. 사실 이런 점을 노리고 ‘언론’이라 자처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은밀함이 노리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불이익을 최소한으로 하고 상대방 도덕성 훼손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나팔수 역할을 하는 언론 비슷한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든 언론이 있어야 공개적으로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지 않으면 정치에서 정치적 음모가 효용이 없다. 최근 언론사 설립이 용이 해지고 그 중에서 별로 자본이 들지 않고 즉효성  때문에 인터넷이 애용된다. 일반적으로 작은 지역 신문 창립에도 법인화를 해야 하고 거기에는 일정 자본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즉석효과를 노리는 정치적인 상대방 이미지 훼손을 위해서는 인터넷이 유용하다. 비교적 인쇄 매체에 비해 인터넷은 자극적인 용어가 많고 효과적인 여론 전파가 용이하다.

언론이라 하면서 기사작자의 실명도 밝히지 않으면 기존의 인터넷 익명성을 더하고 언론 자유를 들먹이면서 자신들 입맛대로 기사 작성을 할 수 있다. 또 끼리끼리 다는 댓글을 이용해 자극적인 용어 구사도 가능하므로 정치 모리배들이 이용하기에는 인터넷 언론이 아주 적합하다.

이런 경우에 법적 제도적인 제약이 있긴 하지만 현실적인 방안이 되지 못하고 있어 그 실효성이 의문스럽다. 결국 사회에  그 판단을 맡긴다면 그 독성이 다 퍼지고 난 이후이다.   

예를 들면 특정 정치인이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을 이용하여 인터넷 언론을 창간하고 지속적인 개인 홍보를 해도 특별한 제약이 없다는 점이 맹점이다. 다시 말해 이런 맹점을 이용한 인터넷언론 관계자들의 친소 관계에 따라 특정인 도덕성 훼손과 특정인 부각을 막을 길이 없다. 특히 그 대상이 지역이라면 최근의 남해지역의 정치적으로 보이는 사건의 보도에서 그 편향성과 “X파리”로 대변되는 무절제와 난폭성은 차후의 정치적인 보복보다도 정치인들이 이런 엉터리 언론을 이용하면 좋겠구나라는 안이한 생각과 창간 과정의 편이성으로 인해 또 다른 인터넷으로 인한 보복이 이어질 경우를 상정해보면 정말 나쁜 선례를 지역사회에 남겼다. “석고대죄”해야 한다고도 보도한 “언론”은 그것을 전파한 자신들에게 더 큰 원죄가 있는 줄 몰랐다. 기자 회견에 부르지 않았다고 “언론 차별”이라고 하고 공직자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했다. 이런 보도는 일부 인터넷 종사자들은 자신의 선이 사회 최고의 선으로 착각하고 실질적으로 그 반대인 경우를 몰랐기 때문이다.

충고를 해도 언짢아하는 경우나 도리어 시비나 거는 우둔함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자신만이 옳다는 치명적인 모순은 불필요한 자만심을 불렀고 다른 잡지의 적시하지 않은 일반적인 창간기사부터 시비를 거는 경우에서 증명되고 있다. 자신들은 성역인양 비판을 허용치 않고 타언론을 먼저 비판하는 경우다.

언론이든 개인이든 자신들의 오류가 무엇인지 심오한 반성이 없는 경우 잘못된 생각이 눈덩이 굴러가듯 커져 도리어 자신도 수습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언론이 기관의 감시자 역할을 자처하려면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지녀야 독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평가는 무시하고 비판자만 나무라는 자신들에게는 도리어 무한한 포용력과 신뢰를 갖고 타인에게는 싸움닭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모든 사실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말로 타인의 양해를 얻기 힘든 논리 부족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이든 공직이든 거만함을 용서치 않는다. 그런 정서를 도외시하고 자신만 옳다는 난독성은 치명적인 지병일 개연성이 있다. 팔이 안으로 굽는 논리는 당연 객관적이지 못하다. 객관적이지 않으면 신뢰성이 없다는 말이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들의 잘못은 "이현령 비현령"식 논리 전개가 다반사이다.

순간순간의 일부 타당한 논리가 전체를 그르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잊기 쉽다. 어느 사회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비논리가 있다. 어느 마을이나 새벽에 구판장을 두드려 술을 사려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인이 타인에게 피해를 줘도 안 될 판국에 “언론”이라 자처 하면서 공익을 해칠 수 있는 공적인 의미가 부여 된 사람들의 정파적인 이해에 따른 논리 전파 행위는 사회악이라 해도 무방하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언론 자유니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객관성과 다양한 정보를 섭렵해야 한다. 자신들 논리에 맞는 일부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여 정파적인 이익을 얻으려는 자세부터 고쳐야 한다. 이런 점을 생각지 못한 폐쇄적인 사고력과 팔이 안으로 굽는 논리만으로 객관성을 얻고 신뢰성을 얻기는 나무에서 고기 구하기이다. 이러한 간단한 기본이 정파성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 경우 맹목적인 정파 선전도구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의 보편적인 상식과 경쟁에서 경쟁력을 잃고 도태되는 경우를 법에서 방관하는 듯하다. 즉 쉬운 창업에 따른 경쟁에서 자연 도태를 유도한다고 보인다. 이럴 경우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들로 인해 정확한 평가에서 멀어지고 자신들의 아집이 더해져 아전인수가 되어 버린다. 엉터리 정보를 제공한 속 보이는 짓을 한 정치 언저리들도 이 기회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 선거 때마다 발호할 수 있다.

한때 뚱딴지 같은 여론 조사로 개인적으로 재미를 보았다고 해도 잊혀진 일이 아니라 군민여론을 오도하려 영향력을 시도한 원죄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공적인 언론을 개인 사리에 이용한 나쁜 선례는 지역 언론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설가 공지영은 산문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욕설(거짓)은 아무리 하잖은 의미라도 하지마라 네가 한 거친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이 지구 위로 떠돌다가 나무에게도 냇물에게도 눈송이에게도 내려앉아 스며들 지 아느냐고 우리는 그 나뭇잎이 길러낸  과일을 먹고 그 물을 마신다” 고했다.

최근 지역을 달구었던 정치적으로 보이는 “사건보도”들은 일부 정파적인 이익에 눈 먼 정치 활극에 지나지 않고 이를 계기로 지역 최고의 선이 무엇인지 모두에게 큰 화두를 남겼다. 지역의 건전성이 황색 “언론”을 도태시키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도덕성은 살아있다. 거만한 아집을 스스로 버리게 하는 도덕적 채찍이 아직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지 모르겠다.   

 

2009.05.02 11:10 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