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두 일본인

책향1 2009. 4. 17. 11:19

 

 

두 일본인

 


과거 우리 언론들이 일본 외무성 장관과의 외무 회담을 “외상 회담”이라 오랫동안 표기하다가 일본 언론들의 조롱을 받고 이제 “외무회담‘이란 표현을 한다. 일반인도 아닌 언론들의 주체성은 누가 시켜서 할 일이 아니다.  일본 언론은 우리처럼 한국 외무부를 지상에서는 ”외무성“으로 부른다. 우리 언론들은 원어 원칙에 일본 외무성을 그대로 부르고 있다. 한 때 북한에서는 일본식의 여성 이름자 중 ”자“자를 모두 뺐다.

어제 인터넷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오래 된 사진 제목에는 그냥 ”박정희“라는 단어가 제목 속에 들어 있었다. 김정일에 관한 표현에는 꼭 국방위원장이라 한다. 우리 사회의 좌경화를 우려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라 우익 쪽에서도 말한다.

이런 용어를 정치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고인에 대한 존경심이 없더라도 원칙적으로 직급을 붙여 부르는 것이 공적으로 노출되는 인터넷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직함이 있으면 직함을 붙여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공적으로 노출 되는 곳에서 직함을 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사자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 한국인 비판』에서 국내에 오래 거주한 지한파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는 “내 앞에 가는 꼴, 절대 못 봐”라며 한국의 자동차 문화를 나무랐다. 또 그는 (자동차 등의) “배터리”를 한국인들이 왜 “밧데리”로 발음하는지 궁금해 했다. 다시 말해 고쳐 쓰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가 일본인이므로 당연히 “밧데리”가 일본어식 표현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거기에는 “빵구”도 있다. 이케하라는 또 한국과 일본과의 차이는 100년 정도라 했고 점점 그 차이가 벌어진다고 했다.

그가 쓴 내용이 약간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그 글에 아무도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했다. 이 “100년” 이야기를 빼면 거의 맞는 내용이었고 어찌 보면 그가 충정어린 충고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독도 문제에서도 그는 상대적으로 감정적인 한국인들을 나무랐다. 이성적인 일본에 비해 너무 감정에 흐르는 국내 실정을 지적한 것이다.

16일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파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쿄 도지사는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장”을 했다.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재학중에 기성의 가치에 반발하는 전후 세대를 그린 『태양의 계절』로 아쿠타가와상(介川賞)을 수상했다. 그가 소설가 출신이므로 말도 소설식으로 하는 것은 그의 특질이다. 이전에도 그는 명언(?)으로 유명했다.

이 두 일본인을 보면 일본에서 국수적인 면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이케하라의 경우 비교적 이성적인 판단으로 한국의 국익이 될 만한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진정한 한국의 상품은 비록 리니지 게임과 김치라고 했지만 사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시하라의 경우 그의 정치적인 입장 강화를 위해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는 듯해서 속이 편치 않다. 그가 무슨이유에서인지 박대통령을 거론해서 보기가 민망하다.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으로 외교문제가 될 만한 발언에 신중하지 않는 것은 그의 개인 취향을 벗어난 일종의 일본인들 속내의 표현일지 모른다. 역사가 개인의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과 일개 국가가 개인 정치에 이용되는 것이 일본 정치의 저급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 정치의 저급성을 나무랄 정도가 되려면 깨끗한 정치가 우선적이어야 하나 뭐 묻은 개에 지나지 않는 국내정치 상황을 보면 아직 “100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지금은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지만 옛날에는 조선이 도시였고, 일본은 시골이었던 적이 있었다(중략) 역시 일본의 옛날은 조선과 똑같았다.  조선의 풍속과 느낌이 그대로 후지와라나, 헤이안 조에 모방되어 갔다(중략) 조선은 비유해보면 메이지 10년 전후의 상태인 것으로 생각한다(후략)." 이글은 자연 주의 작가 타야마 카타이(田山 花袋:1872~1930)가 1914년에 쓴 여행기에 나오는 말이다. 대충 메이지 10년 전후라면 1886년 전후이므로 40여년이 늦다는 말이다.

우리는 '극일(克日)'을 수없이 외쳤다. 80년대의 일본인들의 한국 이미지가 학생데모에서 프로 야구가 생겨 변환의 계기가 되었고 올림픽 야구 우승에 WBC 준우승은 극도로 우승에 만취한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인상을 제대로 업그레이드 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들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것은 조선산업과 반도체 산업이 여실히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산업들은 정치나 정부가 잘해서가 아니라 기업체가 잘 해서 올린 성과이다. 다시 한번 우리의 과거를 곰 삭여 생각해 볼 필요를 이시하라 녀석이 다행히 일깨워 줬다.

 

2009.04.17 11:19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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