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 100주년과 시
올해는 신시 100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현대 한국연극 역시 그러하다. 지난 11월 1일은 ‘시의 날’이었다. 1908년, 육당 최남선이 신체시「해에게서 소년에게로」를『소년』지에 처음 발표한 날을 1987년 11월 1일 ‘시의 날’로 정하여 해마다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한국시인협회에서는 ‘신시 100년’과 한국시협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과 방언시 낭송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는데 당사자격인 시인들이나 국민들의 의외의 무관심이 못내 씁쓸 했다.
이처럼 시의 날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일반인은 고사하고, 시인들이 많다는 점과 시의 날을 그냥 간단하게 기념식이나 하고 지나가는 문학단체들의 관성이 문제이기도 하다.
문인협회와 시인협회, 펜클럽 등이 공동으로 이날 하루만이라도 시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시인들과 시애호가들이 함께 접할 수 있는 행사를 벌이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이다. 여기서 시 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시심을 열게 하는 접근이 용이한 문화예술의 길은 멀기만 한 것인가를 자괴하게 했다.
일반인들이 문화예술이라 하면 고리타분한 사람들이 세상을 논하는 자리로만 여기는 현실적인 문제의 본질은 물론 시인들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의 책임이다. 청소년들의 문화예술을 통한 심성 교육과 일반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 수만은 방안들이 강구 되었지만 경제적인 한파의 일차적인 영향이 이런 예술에 미친다면 문화예술계 전반의 비극이다.
각종 문화행사의 개최빈도나 단체가 집중된 서울이 이 모양이라면 지역민들의 문화예술 갈증을 제대로 해소 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지역민들에게는 사치에 가까운 일이다. 사실 시인이라는 사람들도 서점에서 시집 한 권 사보기 어려워하는 판국에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문화행사는 문인들이나 예술인들 자신들의 잔치로 끝나기 시상인 것이 현실이다.
문학 소년들의 소박한 꿈을 채워줄만 한 문화 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은 결국 감성과 이성이 사라지게 하고 있다.
독백언어에서 한계를 넘어 사람에게 안온함과 정신적인 소양을 채울 시가 시로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문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경제난으로 인심이 각박해져가는 시기에 시향의 효험을 느끼기에는 어렵지만 지적이고 감성적인 소양을 기르고 정서적인 양념은 문화의 힘이고 문화는 고래도 춤추게 할 수 있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는 공자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메마른 정서에 감성을 주고 아름다운 사회정서를 기르는 문화의 정수는 문학이고 시이다.
시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심이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혹은 미학적 실험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일반인의 정서를 위무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으로서의 시의 역할이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하다.
시의 현실적인 소외보다 더 큰 문제는 시 장르에 대한 문화적 관심의 약화이다. 시가 문단과 저널리즘의 화두에서 밀려나는 것은 그만큼 상업적인 논리가 문단 안에까지 깊숙하게 개입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젊은 문학 에너지가 시에 대한 관심도의 저하 현상을 낳기도 했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시 장르의 팔자라고 할 수 있다. 문화산업이 급성장한 90년대 이후 소설이 문화상품으로서의 우위성이 두드러진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문학시장에서의 시의 소외는 역설적으로 시의 문학적 순결성과 우위성을 나타내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시는 시장의 논리에 저항하는 순수문학의 자율적인 공간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있다.
문화상품으로서의 시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하더라도 문학동호인의 공간 안에서의 시의 영역은 오히려 확대된 측면이 있다. 문학소비자들이 소비의 대상으로 선호하는 것은 소설임에는 분명해 보이지만 시가 참여의 대상으로 부각된 것은 어쩌면 놀라운 현상이다.
문학애호가와 문학 매체의 증가는 주로 시 장르에 대한 참여적 관심을 증대시켰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시 장르가 많은 시간을 투여하지 않고 창작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서정시를 우위에 두는 전통적인 문학성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영역의 확대는 시의 생산과 유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제도권 문학 공간에 진입하지 못한 문학동호인들의 자유롭고 활발한 활동 무대이다. 네티즌들은 문단 내부의 등단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의 시를 올릴 수 있고 그 공간을 통해 동호인들의 문학적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통신 공간내의 시 작품들이 그 숫자에 비해서는 아직은 그 수준에서 제도권 문단에 위협을 가할 만한 문학성과 실험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대중적 문학 참여 공간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 할만 사실이다.
다만 작법이나 시학에서 요구하는 시 고유의 은유나 상징성이 부족한 넋두리의 나열은 독자들을 식상케 한다. 시가 많고 시인이 많다는 것은 희소성이 없고 시에 대한 외겸심을 잃게 하였다.전통과 현상의 반영에 무심하게 되고 시 전통과 독자에게 충실하지 안은 채 두려움을 잊은 현상의 반영이 나타나고 있다.
시는 언제나 효용이나 의의가 많은 진실성을 요구하고 단순성이 있다. 수 많은 언어의 조탁으로 싸여져 있는 진리를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비정함과 순수성이 담보되야 한다. 바로 풀어 헤쳐 놓은 난삽한 언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가 정제된 언어와 조화로울 때 좋은 시라 할 수 있다.시간과 공간의 화해와 사물과 사유를 공감을 목적으로 한다.
결국 시의 효용은 인간적인 감화력에 휴머니즘과 상응하는 자아인식과 자신의 성찰, 현실적인 세상에서 고뇌와 마찰을 해결하여 새로운 가치관의 설정을 위한 해법찾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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