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나일본부설' 비판

책향1 2008. 10. 17. 11:06

 

 

일본에서 미마나(任那)로 불리는 임나일본부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국내보다  논란이 많은 일본측 자료나 해석의 명확한 재해석이 필요하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래의 세가지이다. 이 세가지는 일본 역사 왜곡의 시작이고 군국주의 사관의 본질이다.즉, 칠지도와 광개토대왕비문,일본서기(日本書紀)이다.이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왔다. 가끔 양국에서 양심적인 목소리가 나오긴 하지만 대세에 밀려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최근 독도 문제에 대해 일본의 대표적인 독도 전문가 나이토 세이추(內藤正中ㆍ79) 시마네(島根)대 명예교수 일본의 주장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 출간 하고 "일본 외무성 독도 자료의 가장 큰 문제는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증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완전히 엉터리 자료다." 라는 통쾌한 논리를 전개하고있다. 일본 외무성의 '다케시마(竹島)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 자료를 조목조목 반박한 < 다케시마=독도 문제 입문 > (신칸샤ㆍ新幹社 발행)을 최근 펴냈다.


 일본의 종교 사상가·비평가인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 1861.~1930)는 근대 일본의 작가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91년 천황의 교육칙어 봉독식에서 '불경사건'을 일으켜 사직했으며 한국병탄을 반대한 드문 일본인 중의 한사람이고 일본의 양심이다.

 

 극단적인 비양심의 표본이고 일본의 속내를 들어낸 사람도 있다.  최근 독도 문제로 시끄러울 때 한국이 독도 주변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독도 문제를 가열시키고 있는데 대해 언젠가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나섰다.


 방위성 직속 싱크탱크인 방위연구소의 다케사다 히데시(武貞秀士) 총괄연구관은 이날 산케이(産經)신문에 실린 전문가 의견란에서 한국의 독도 방어 군사훈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독도 문제를 가열시킬 경우 한국 측의 대가가 크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례로 “한국의 대외채무가 증가하고 외환준비고가 줄어들고 있는 점을 들어 장차 IMF 같은 금융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 했다. 여기서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속내가 표현됐다. 즉 총 한방 쏘지 않고 일본이 이기는 방법은 제2의 외환사태를 만드는 것이란 점을 알리고 있다. 이런 말들에 대해 야구에서처럼 효과적인 제압 수단이 없는 것이 아쉽다. 경제가 하루 아침에 발달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인들의 망언을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사실 국내의 가야 유물에서는 임나 관련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다. 다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학창시절(1983) 한학자이고 일문과교수였던 분이 원효대사 비문에 "임나출신"이라고 되어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분의 말대로 사실이라면 가야 지역의  일개 지방 이름이었을련지 모르고,과장된 임나일본부설은 허위로 보인다. 다행스럽게 일본 국내에서도 양심적인 학자들이 거주민들의 '자치 기관" 정도였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역사 왜곡을 치밀하게 준비해 온 것이 사실이고 그들의 준비된 논리성을 앞세워 충실히 일본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해 왔다는 점이 증명되고 있다.


일본의 4세기는 "수수께끼의 세기"로 불린다.일본서기와 고사기(古事記)는 기기(紀記)로 불리며 우리나라의 삼국사기나 삼국사기 격이지만 그들의 책에 왜 남의 역사가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었는지는 바로 그들의 자국위주의 역사 왜곡이 목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 그들의 역사 왜곡은 사실 오늘 어제의 일이 아니고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 쓰여진 우리 역사서 처럼 일본의 기기도 4세기까지 일본 열도의 역사는


신화임에 틀림이 없도 일본학게에서는 근래 30년 전까지 야마토(大和) 정권에 의해서 한반도 남부에 출병해 2세기에 걸친 지배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로 강변해 왔다. 따라서 허황한 사실 인지로 야마토 다마시이(魂)는 일본 정신으로 숭상받으며 "카미카제" 특공대가 미국 함정에 뛰어들 때 외쳤다.


우리가 일본 역사 왜곡을 나무라면 일본도 한국의 명백한 역사 왜곡 증거로 백촌강(백마강 지금의 금강 하류)에서 35,000 여명의 일본군이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전멸한 부분을 누락시켰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554년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이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군) 전투에서 대패하고 백제 성왕도 사로잡혀 참수당하여 이전까지의 가야 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소멸했다.  이는 한일 역사서 모두에 나오는 명백한 사실이다.


최근 미국에서 독도 문제에 대해 한국은 미국에 지지를 부탁하지 마라며 일본내 양심세력에게 호소하는 것이 좋다는 충고도 있었다. 이는 전 주일한국 최상용 대사가 기고문에서 말한 "합리적인 논리는 (일본내에서) 듣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를 역사 왜곡 나아가 임나일본부에 적용해도 합당할 것 같다.


필자가 일본어를 전공하면서 입수한 전전의 일본강점기 일본어 교과서에는 머리에 손을 얹고 멀리 '신라정벌을 위해 떠나는 일본군을 전송하는 진구황후'라는 그림을 보고 놀랐다. 그후 일본인 교수를 통해 구입한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가야 부분이 '임나'로 표기 된 것을 보고 다시한 번 놀랐다. 그 교과서의 본문에는 "철 자원의 확보를 위해 한국에 진출했다"고 되어 있었다.


물론 이글 아래 부분 역시 한국쪽 해석이 많다. 이유는 지면관계이다. 수많은 해석이나 논리를 다 소개하기는 힘들다.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전해져오는 특이한 모양의 철제 가지칼. ‘칠지도(七枝刀)’라고도 한다. 일본 운동 선수들의 유니폼 어께부분 문양은 칠지도를 상징한다.


철을 두드려서 만든 이른바 단조(鍛造) 제품이다. 전체 길이는 74.9cm로 그 중 손잡이 내지 연결부에 해당하는 슴베(莖) 8.4cm를 뺀 나머지 66.5cm가 칼날에 해당한다. 칼의 양쪽 날 부분에 마치 소뿔모양으로 나뭇가지처럼 굽은 가지가 각각 3개씩 같은 간격으로 뻗어 나와 있다.


1873∼1877년 사이에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던 간 마사도모(菅政友)가 칠지도에 붙어있던 녹을 닦아내다가 칼의 양쪽 옆면에 금으로 상감된 명문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이것이 칼의 일종이며 제작 당시의 명칭이 칠지도였음이 분명해졌다.


명문은 한쪽 면에서 34자(字), 그리고 다른 쪽 면에서 27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명문 외곽으로는 금선(金線)이 상감기법으로 가늘게 둘러쳐져 있다. 명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34자가 새겨진 곳을 보통  앞면(前面)이라 부르고, 27자가 새겨진 곳이  뒷면(後面)이다.


명문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적지 않아서 판독된 글자는 연구 시점과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상당수의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한 덕분에 근래에는 꽤 많은 부분에서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泰(和?)四年 五月 十六日 丙午正陽 造百練鋼七支刀 豈避百兵 宜供供侯王 □□□□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그러나 이와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도 많다. 예를 들어 〈뒷면〉의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을 ‘백제왕이 다스릴 때 기묘하게 얻은 성스러운 소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성음’을 ‘성진(聖晋)’, 곧 중국의 동진(東晋, 317∼418)왕조로 판독한 뒤 ‘백제왕의 세자가 생(生)을 성스러운 진나라에 의탁하고 있으므로’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왜왕 지’를 ‘왜왕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명문이 매우 단조로운 표현방식을 따르고 있고, 주는 이와 받는 이가 함께 명시되어 있으며, 명문의 궁극적인 목적이 명확한 뜻의 전달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교를 버리고 매우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칠지도에 대한 학자들의 분분한 해석을 종합해보면,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칠지도의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태△ 4년이 과연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제작 주체, 곧 왜왕에게 칠지도를 만들어준 정체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태△’는 연호임에 틀림없는데, 어느 나라의 연호인지가 문제이다. 처음에는 태초(泰初) 혹은 태시(泰始)로 읽고, 중국 전진(前秦)의 태초(太初, 386∼394)라든가 서진(西晉)의 태시(太始·泰始, 265∼274), 남송(南宋)의 태시(泰始, 465∼471) 등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태화(泰和)로 읽고 위(魏)의 태화(太和, 227∼232), 동진의 태화(太和, 366∼371), 북위(北魏)의 태화(太和, 477∼499) 등에 주목하는 연구자가 많은 편이다.


또한 ‘태△’를 백제의 연호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명문의 ‘5월’을 6월 또는 4월로 판독하기도 하며, ‘16일’을 11일 또는 13일로 판독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서기의 백제본기에는 진구황후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두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니혼쇼키는 천황의 왕권을 높이기 위해서 쓰여진 것으로 의심되며 내용 또한 백제의 사서인 백제본기,백제신찬,백제기 등을 임의로 일본에 맞추어 혼합하였고 최소한 4개 이상의 사서가 자의적으로 차용되어 혼합되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바 한국,중국,일본 어느 쪽에서나 사료의 문구를 그대로 받아 들이지는 않는다.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391년)에 해당하는 곳에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臣民”이라고 쓰여 있는데, 일본 학자들은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한국 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이 고구려의 행동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주체라고 해석한다.또한 필체 등을 들어 비문의 일부가 20세기 초에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재일 사학자 이진희 씨가 있다. 1985년 중일 학계의 공동 조사에서 비면에 아직도 석회가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어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속민으로 삼았다"는 그들의 해석은 신빙성을 잃었다. 이 교수는 1999년 일본문화와 조선에서 야마토 정권이 철정(쇠덩어리) 구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지 못햇다고 했다. 즉 철제 갑주나 창으로 무장한 가야군을 헐벗은 야마토군대가 이길 수없었다는 말이다. 또 일본내에서도 당시 주코쿠(中國) 지방에 사철(砂鐵)이 나오고 있었는데 위험을 무릅 쓴 해외 출병은 불가능했다. 수송문제 역시 파고가 높은 한일 수역에 무거운 쇠덩어리를  운송할 수단이 없었다고 본다. 또한 당시 일본 국내 사정상 2세기에 걸쳐 신라의 반격을 물리칠 만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임나’는 가야, 특히 아라가야를 이른다.


진구 황후( 神功皇后),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토(息長足姬尊, 170년 - 270년)는, 가이카 천황(開化天皇)의 증손이며, 츄아이 천황(仲哀天皇)의 황후이다. 오우진 천황(應神天皇)의 어머니로 201년~269년간 섭정을 하였다고 전한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 서기에 의하면 오우진 천황을 임신한 채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삼한을 정벌(200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에 돌을 대어 아이의 출산을 늦추었고 일본에 돌아가 치쿠시에서 오우진 천황을 출산했다고 전하고 있다. 가야사의 정립을 위해서는 일본서기 등의 비판적인 이용은 필다.일본서기 개체조(開體條)나 흠명조(欽明條)는 우리나라 가야 관련 기사로 채워져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삼한 정벌설을 신화로 여긴다.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실재의 인물로 여겼으나, 세계대전 이후 현재 역사적 사실성은 부정되고 있다.전전 일본 교과서에는 신라정벌을 가는 군사들을 환송하는 그림이 버젓이 실려 있고 80년 초반의 일본 고교 역사책 지도에는 가야 부분을 임나로 표기하였다.


진구 황후의 섭정 시기는, 중국의 삼국지에 기록된 무녀 히미코(卑彌呼)의 시대와 비슷하며 일본 서기에도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면서 야마토조정과 히미코를 관련지으려는 의도로 전승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여기는 설도 있다. 또한 이 시대는 장기간에 걸쳐 일본의 천황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천황이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진구 황후를 히미코와 같은 무녀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조에 나오는 히미코는 172년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진구황후와 히미코를 동일화시킨 것은 일본서기 저자들이 일부러 기록을 2갑자 뒤로 되돌린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의 결과로 사실의 조작인 것이다.이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향한 감성을 깃들여 적은 그들만의 역사일지 모른다. 기원전 3세기부터 7세기까지 100만명의 일본 열도로 건너 갔고 선진적인 이주민(소위 도래인)은 왜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로 삼고 있는 위 세 가지에 대한 명확하고 객관적인 해석이 없는 이상 일본서기부터 출발한 일본의 유구한 역사왜곡 버릇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색맹상태의 일본역사계중에서  양심세력들을 옳바른 사관으로 이끌 수 있는 국내 역량을 길러야 한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상이 없는 절 통도사   (0) 2008.10.24
족보이야기  (0) 2008.10.19
요산선생과 남해  (0) 2008.10.09
해상 크레인의 "꺾어진 꿈"  (0) 2008.10.04
최진실 자살과 사회영향(집필중)  (0) 2008.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