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족보이야기

책향1 2008. 10. 19. 10:29

족보이야기


현대인들은 누구나 족보와 본관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 즉 18세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가짜 족보가 양산되었다. 이유는 신분의 귀천 모두 성씨를 갖게 되었고 신분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관료사회에서 군역이나 세수 확보를 위해 체계적으로 호구를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사회적으로 묵인 되었지만 “겉다리 양반” 등은 가짜 호적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은어였다.

양반의 경우 군역이 면제되고 벼슬길로 나갈 수 있으므로 매관매직 등에 의한 가짜 족보가 성행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고려 18대 의종 때의 왕실 계보도인 왕대종족기가 최초로 보인다. 이처럼 족보는 처음 명문대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백성들이 오늘과 같은 방식의 족보는 1476년 조선 성종조에 만든 안동 권씨의 성화보가 최초이다.

대부분의 족보에서 시조가 대부분 고려시대에 등장한다. 일부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아득한 예부터 성씨의 중요성을 알고 가계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현존하는 족보들을 눈여겨보면 위의 성화보보다 앞선 내용들이 많은 것은 더욱 의아하게 한다.

많은 족보들은 시조로부터 일목요연하게 조상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록하는 것이나 사적이 많이 소실된 임란 이전의 기록은 추측이거나 거짓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후손들은 문중의 자랑스러운 행적을 그대로 믿는 경우가 많고 묘비명 등에서도 미화하거나 나아가 허위관직이 많은 것을 그대로 믿고 명문가인 것처럼 자부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족보의 생몰연대와 관직, 부인의 이름, 묘소 등을 세밀히 비교해보면 허위 여부를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청보(淸譜)니 탁보(濁譜)니 하는 말은 누가 더 양반이냐는 말만큼 논쟁이 많다.

족보 내용 중 관직이 특히 분식이 심하다. 중추부사(中樞府事)나 평장사(平章事)라고만 기재되어 있다면 거의 가짜다. 이는 첨지(僉知)나 동지(同知), 문하시랑(門下侍郞), 중서시랑(中書侍郞)라는 품계가 붙어야 정확하다.

시대에 맞지 않은 관직이 있으면 가짜이다. 고려시대 관직이나 품계가 신라 때 사람에게 붙은 경우가 그렇다. 고려 시대 관직인 문하시중이나 평장사를 신라 사람에게 붙인 경우다.

또한 신라 시대에 없던 제도인 시호(공이 있는 신하에게 사후에 내리는 칭호)나 **군(산 사람에게 내리는 직위- 대원군)이 신라 사람에게 붙은 경우도 볼 수 있다.

비석에도 앞면에는 병조판서로 새겨졌지만 후면이나 측면에 행적이 전혀 나오지 않고 가족 관계만 나오는 경우를 본 일이 있다. 족보에도 행적이 나오지 않지만 비석에만 있는 경우 역시 가짜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의 맣은 성씨가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귀화 성씨의 경우도 족보 외에 다른 문헌에서 많이 등장한다. 삼국시대에 일부 귀족들이 성씨를 사용한 이래 족보가 만들어진 시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원칙적으로 같은 성씨라도 본관이 다르면 혈족이라 할 수 없다. 시조가 성이 있으면 반드시 본관이 따른다. 본관은 지방의 호족이 근거지이다. 공신에게 특정 지역을 식읍으로 하사하면 그곳이 본관이 되었다.

 외경심으로 조상에 대한 미화가 지나치면 족보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존재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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