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종교차별로 본 일본의 개신교 전래

책향1 2008. 8. 30. 23:34

일본의 종교라면 신도가 우선적으로 한국인들은 회상할 것이다. 국사 공부를 좀 한 사람들은 임지왜란 당시 종군 승려나 기독교 왜군이 생각날 것이다. 막상 한국인들이 기독교의 일본 전래가 우리보다는 좀 앞섰다는 생각만 할뿐 전래 과정은 잘 모르고 있다. 마치 하늘의 새도 떨어뜨린다는 의미의 조총의 두려움은 알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 임란시 위력을 발휘한지도 잘 모른다. 최근 언론 보도에 당시의 일본의 조총 숫자가 세게에서 제일 많았다고 한다. 아직도 조총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조총사격 연습도 하고 철판을 뚫는 능력으로 자부심을 일깨우고 있다.

임란이 과연 우리의 승리인가.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고 순화공 등 왕자가 사로잡힌 상황과 궁궐이 불탄 사실로 우리가 이겼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마디로 전국토가 유린당한 전쟁의 패배자가 우리 선조들이다. 여기서 왜란을 논하기 보다 좀더 눈을 크게 떠보면 잔인했던 왜군을 따라온 기독교 왜인들이 있었다는 점을 우리 역사는 간과하고 있다. 기독교와 왜란은 너무 성격이 맞지 않다. 잔인한 침략 전쟁과 사랑을 포교의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와는 너무 성격이 멀다. 

기독교의 아시아 전도는 비교적 탈이 많았다. 기존 문명이 독자적으로 있는데 색다른 외래 문화의 전래는 이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서양 문명에 대해 접경지역이던 필리핀과 우리 나라의 기독교는 활발하다. 그 원인은 권위주의 정부와 대항한 반정부 도구로서의 기독교편승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본다. 

일본의 기독교 전래도 사회전체가 위기에 빠지거나 큰 변화를 겪었다. 1549년은 프란시스 사비에르(1506-1552)의 일본 입국부터 시작이다. 임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이다.이후 1세기가 일본의 기독교 부흥기 였고 지역의 영주 격인 다이묘들은 외래인들로 인해 무역이 융성해지리라 믿고 더욱 권장하게 되었다. 초기 일본에서 기독교는 정치적이거나 자신의 목적을 위하거나 일부의 불교 세력을 누르기 위한 좋은 방편이었다. 

또한 실력자였던 오다 노부가다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만큼 전도에 호기가 되었고 당시 개종한 신도수가 15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급격히 늘어난 신도수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적과 내통하는 것으로 봐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자 일부를 제외하고는 또 다시 개종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 도요토미는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할 수 있다. 당시 예수교 선교사이던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가 기독교에서 여성편력을 부정적이었고, 봉건 영주인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부하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사찰을 불태우고 신도들의 사당을 없애지 않았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보고 분기 충천해 나사사키 시민들에게 과다한 벌금을 매기기기도 하고 십자가와 성당을 부수게 했다.   

이 무렵 조난당한 스페인의 선박인 산 펠리페 호가 시코쿠(四國) 근해에서 화물을 찾는 다는 핑계로 기독굘를 앞세워 세계정복을 운운하자 기독교가 침탈의 선봉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확증을 잡은 도요토미는 기독교 탄압을 시작했고 많은 수의 신도가 순교했다. 1597년 26명의 기독교인 사로잡혀 나가사키의 니자카(西坂)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 졌다. 그후 서양과의 통상을 원하던 도요토미는 기독교에 호의적으로 나왔고 포용정책을 펴게 되었다. 물론 이시기에도 참혹한 탄압은 이어졌고 선교사들에게 추방령이 떨어졌지만 남아있던 선교사들에 의해 신앙심이 더 돈독해지기도 하였다. 집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