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언론인의 변신, 무엇이 문제인가?
늦은 감이 있지만 지역에서 신문 발행인의 한나라당 입당을 두고 말이 많다. 화두는 당연 공적인 개념의 신문 발행인의 특정 정당 가입이다. 사실 일반인의 입당은 별탈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신문 발행인이란 점과 최근까지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원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구설수에 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강한 이미지의 글로 표현된 그의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변신이 정체성을 의심해도 무리가 없다. 그가 후발 신문의 발행인이고, 대표이사란 점은 앞으로도 화제가 될 만한 이슈이다. 필자가 여기서 그의 변신을 나무라거나 시시비비를 걸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직 그의 변신에 따라 알려진 사실보다는 인간적인 고뇌를 알고 싶다.
우리나라 정계에서의 변신은 ‘무죄’로 불릴 만큼 다양한 변신과 빈도가 높았다. 정치인들의 변신은 일반인들은 무감각하다고 하는 표현이 맞다. 물론 그가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식견이 있는지는 필자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풍토에서 정치인을 제외하고 문인이나 언론인들 즉 식자층의 변신은 많은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왔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과거 김춘수 시인의 신군부정치 참여와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소설가 이문열 씨의 ‘변화’를 예로 들며 위 발행인의 성향에 이해를 보태고자 한다. 혹자는 무명의 작은 지역신문사 발행인과 저명인사들과의 비유가 어불성설이고 필자의 친소관계 탓으로 치부하기 쉽다.
시인이자 경북대학교 교수였던 김춘수는 잘 알려진 순수파이고 경험주의자이다. 순수 시인으로 대충 1970년 이후 그는 절대적인 이상을 믿지 않으며 이데올로기를 내버려두자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초기 작품에서 그는 릴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근년에 와 소위 '무의미 시'를 대변하고 있다. 문명에 대한 비평시도로 한국 전통무용의 리듬과 시적 기술을 결합한 정서를 한 때 담기도 했다. 후기 특징인 무의미 시는 7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그는 당대 최고명문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지만 1942년 퇴학당했으며 사상이 불순하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6개월 옥고를 치룬 그가 19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민주정의당 소속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신군부 정권에 참여하여 정계에 진출한 것에 대해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그의 정치 참여에 대해 비화가 별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그 당시 그가 줄기차게 주장한 탈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었다고 필자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
류근일 주필의 경우 원래 자생적 사회주의자이지만 보수 우익의 자유주의자로 변신했다. 군사 평론가 지만원 씨가 그를 “뉴라이트의 빨갱이” 로 비판을 하고 “봉건적 자유주의자”로 비판을 받았지만 여러 기고에서 자신이 “자유주의자”임을 확인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친북세력을 향해 '종북주의자'로 일침을 가했다. 70년대 밀실에서 행해지던 운동이 80년대 이후 2세대라 할 386 NL계열과 그 후속 세대 '종북주의자'들은 드디어 민주화 본연의 자리를 지키려 했던 주류 사회운동의 주조정실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며 이들 '종북주의자'들은 '일심회 간첩' 감싸기, 북한 인권 말살 옹호, 북한 핵 지지, 한·미동맹 해체, 평택 미군기지 반대, 빨치산 추모제, FTA 반대, 북한 선군정치 찬양, 6·15 국경일 제정, 연방제 통일 등을 끈질기게 부추겨 왔다고 했다.
그들은 '진보'의 이름을 도용해 '김정일 추종=진보' '김정일 비판=보수'라는 해괴한 분류법을 이 사회에 확산시켜 놓기도 했다 고 비난 했다. 양식 있는 '진보'라면 이제야말로 '종북주의자'들과 미련 없이 헤어져서 합리적 민주적 대한민국적 '진보'로 거듭나야 할 것을 강조했다.
류 주필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 이승만 정권 말기 서울대 필화사건으로 첫 옥고를 치른 이래, 5.16직후 민통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7년여를 감옥에서 보냈고, 유신 직후 민청학년 사건으로 세 번째 투옥됐다. 중앙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했다.
참여정부에 대한 류 주필의 반감은 “황폐한 민족주의”로 표현했다. 또 노무현식 화법을 일컬어 “지난 5년 우리 사회의 ‘깽판’은 삭막한 구석에서 ‘깡마른 청춘’을 씹어야 했던 ‘어둠의 자식들’의 병리적 복수극”이었다고 풀이했다. 그의 변신에 따라 진보매체에서는 “류 씨의 변화는 종잡을 수가 없다”고도 하고 “가면의 탈을 쓰면서까지 친미 꾼이 되어 보고 자 애걸하는 모습이 언동의 뒷면에 고스란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하늘을 가려보고 자 위장하고 싶어 하는 한 언론인의 이중적 태도”로 비난 받았지만 그는 박대통령 시해 사건 후 부천에서 문상 갔던 일을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아버지를 둔 소설가 이문열 씨가 일부 세력에 의해 본격적으로 매도되기 시작된 것은 아마 2004년 4,15총선 당시 위기에 몰렸던 한나라당 공천심사 위원장을 맡고 부터이다. 김춘수 시인과 마찬 가지로 정치와는 무관해보이던 순수 문학인이 살벌한 정치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명성으로 보면 '추악한 외도'로 비판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신선한 공당의 참신한 발상으로 보였다.
1990년대 중반이후 급격히 가시화된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논쟁에서 강연활동과 신문기고, 작품 활동 등을 통해 보수주의의 입장을 대변하고 진보주의 진영을 비판한다 하여 특히 진보진영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선택」(1997)에서는 조선시대의 캐릭터를 빌려와 현대의 페미니즘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여성운동가들의 반발을 샀다. 2001년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등에서는 김대중과 추미애 등 최근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맞지 않는 정치인들을 소설 속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이문열의 이와 같은 입장에 반대하는 일부 독자들이 2001년 자신들이 구입한 이문열의 책을 집단으로 버리는 "책장례식"이라는 퍼포먼스를 열리기도 했다. 최근 그의 강연 내용 중 과거사조사위원회를 비판했다하여 “친일파”로 매도되기도 했으며 「시인」(1994)’ 「선택」 이후 반페미니즘적, 보수적이라는 문단 안팎의 비판 속에 일부 시민단체와 ‘홍위병’ 논쟁을 벌였다.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인정받는 그의 행보를 보면 과거 스스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거대한 서사로 꼽는 대하장편소설 「변경」 집필을 12년 만에 끝내고 "한 시대의 거대한 벽화를 그리려 했다"는 말이 진실로 보인다.
위 세분의 저명인사 예에서는 모두 시대의 아픔이 묻어난다. 모두 변신에 따른 반대의견을 가진 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이 따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 대한 비판들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변화 모습만 보고 개인적인 성향과 여러 이해관계 변화에 따른 개인적인 아픔을 무시하고 흑백논리로 무장한 사시로 마녀사냥식 비난을 퍼붓는 점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묵묵하게 자신의 갈 길을 걸어온 강단이 있다.
지역에서도 언론인 개인의 아픔을 헤아리기 전에 인간성 상실의 표본적인 인사, 의리 없는 변절자로 매도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과거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긴다"는 멘트로 유명한 백주 선전에 소설가 이병주씨가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문인이 술선전을 한다며 그를 비판 했지만 후에 그가 그 주류회사의 사장과 소꿉친구임이 밝혀졌다.
1월 13일자 “남해시대신문 경영자로서의 고백” 사설에서 그는 시대적인 아픔 보다 신문사 경영의 애로 사항을 누누이 설명하며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 것으로 일종의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 치부해도 좋다.
아쉬운 점은 신문사 내의 반발에 대해 해명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매일 낯을 대하는 직원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급선무였을지는 모르나 전체적인 신문의 정체성과 개인의 성향과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독자들이나 군민들을 위해 일종의 해명을 하는 것이 더 옳다.
그는 “사설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운명”을 말하며 향우기업인들의 주식투자를 의미하는 “외적인 경영여건”의 개선을 바라는 점을 변신에 대한 해명으로 비교적 진솔하게 피력했다. 기업의 한 경영인이자 발행인으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방언론사의 어려운 점을 밝혔다.
정론직필이 모토인 언론사지만 우선은 기업으로 살아남아야 그것도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시대와 개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개인을 성토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일종의 린치라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외부의 영향을 받지않는 것이 경영자의 숙원이다. 그의 이런 소박한 꿈이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 시대의 증언자가 가져야 할 용기와 개인의 자유로운 변신에 다시는 지역에서 흑백논리로 무장한 채 시시비비를 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2008.2.18 .14시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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