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교육
우리나라의 교육의 기점은 부득이 역사 기술 이후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분명히 신화나 전설시대도 그 민족의 연원과 의미성의 탐구에서 부정되거나 소외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교육 출발의 설정으로만 머물러야 되는 한계성이 있다. 한국사상의 원형은 무교사상과 단군신앙으로부터 시작된다. 홍익인간은 민주적 인간의 한국적 표현으로, 널리 남을 이롭게 하는 인간이자 자립적이고 이타적인 정신을 지닌 인간이다. 정치이념으로는 인본주의를 근본정신으로 한 대승적 가치관이다.
윤리의식으로 순수한 인간애, 상부상조의 정신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 생산적인 인간,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인간, 자주적이며 자유로운 인간, 자아 희생적이며 봉사정신에 투철한 이타인이며 8조법금은 고조선의 도덕률이었다. 고대 한국인이 도출했던 홍익인간의 이상 등은 예전부터 간직해왔던 삶의 이상이며 지혜의 유산으로서 재조명, 재해석되면서 교육적 슬기이며 현대사회에서도 보편타당한 이념으로 수렴, 보완되어야 한다.
삼국시대교육은 인재와 무인양성, 암기식 유교중심 모방교육, 화랑도(실생활 중심) 교육이었다. 먼저 고구려부터 알아보면 태학(소수림왕 2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이다.)최초의 관학이고 귀족자제들만이 다닐 수 있었으며 거기에서 강조했던 것은 전통유지, 정신교육이었다. 그밖에 고전중심으로 삼사(史記, 漢書, 後漢書)와 오경(詩經, 西京, 易經, 禮記, 春秋)을 공부했으며 고급관리양성에 목적을 두었고 오늘날이 대학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당시 로는 주체적인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식 교육 모방하였다. 태학이 최초의 국가에서 지은 관학이었다면 경당은 최초의 사학이었다. 주로 평민미혼자제가 다녔으며 문무일치교육을 시켰다. 그 당시 평민교육 기관으로서의 경당이 보급되었다.
백제는 구체적인 교육기관의 존재 여부를 기록에는 남기지 않았으나, 당시의 관제나 기술 및 지식문화를 일찍부터 일본에 전파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자체적인 고도의 교육제도와 교육문화를 향유했음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신라의 교육은 통일이전까지는 중국식 교육체제를 받아들인 흔적은 없으나 전래의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조화시킨 청소년 수련단체인 화랑도가 이었다. 화랑도에서는 문문겸비의 전인교육을 시켰으며 실생활을 통한 교육을 하였다.
우리가 흔희알고 있는 세속오계(원광법사,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도 화랑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화왕계라는 글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설총이 군왕의 교육을 위해 지은 글이다. 이글은 비유와 풍자적인 교육방법으로 국왕을 교육 시킨 글이다. 삼국 통일이후에는 국학이 등장한다. 국학은 신라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인재양성과 논어와 효경이 필수였다. 9년제였고 능력이 없으면 퇴학을 당하여 그이상도 다닐 수 있다. 독서삼품과의 실시는 독서인의 경전이나 시부의 실력에서 관료층을 확보하는 제도화를 뿌리내리게 하였다. 이 독서삼품과는 과거제도의 선구적 형태 이고 논어 효경이 필수가 아니었다. 원성왕 4년에 만들어졌으며 국학내용 시험으로 성적은 특등, 상, 중, 하로 4등급으로 나뉘었다. 독서삼품과의 가장 큰 의의는 족벌, 학벌본위에서 실력 또는 시험 본위로 전환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시대는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로 지정, 장려되고 정치면에서는 유교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고려시대 성종이 교육조서 발표를 하게 되고 이때부터 사학이 발달하게 된다. 학교교육에서는 유교경전을 공부하게 되고, 민중교육에서는 불교경전을 공부하게 된다. 국자감 내에 서인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율학, 서학, 산학의 직업교육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없었으나 신라의 국학과 고려의 국자감에서는 가르친다. 고려시대 관학으로는 국자감(중앙)이 있었고 학당(중앙)도 있었다. 그밖에 향교(향약)도 있었다. 국자감은 국립종합대학으로 문묘를 모시고 논어 효경 필수로 하였다. 성종 11년 (교육조서)에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강조하였다. 국자감은 나중에 국학으로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으로 개칭된다. 국자감에는 양사비가 있었는데 국자감에 입학 학생에 대한 수업 상, 숙식 상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마련해 주었다. 양현고, 즉 지금의 장학금과 비슷한 제도였다. 고려시대에는 학당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개경에 세워 국자감 미입학자를 교육하였다. 그리고 문묘의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향교는 지방민에 유교경전의 중등교육기관으로 문묘를 모셨고 국자감의 축소판이다. 고려시대 사학으로는 십이공도, 서당이 있었고 12공도-해동공자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 등 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관리와 인재양성위한 과거준비 하였고 오늘날의 사립대학과 비슷한 기능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서당도 있었는데 민중 초등교육기관으로 전국에 산재 -서민교육과 지방민 교화-향선생을 두고-지방민 자치적으로 운영하였다. 고려시대 과거제도는 천민제외 양민에게도 자격부여를 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귀족 말고는 과거에 응시하기가 무리가 이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무과가 없었다. 승려는 승과에만 응시하였고 평민에게는 10번 기회를 주었고 관리에는 5번 기회를 주었다. 과거제도는 쌍기의 건의로 광종 9년에 실시되었다. 과거시험의 과목에는 제술과( 진사과) 문예시험 중시하였고 명경과(생원과) 유교 경전를 보았고, 잡과 (기술관시험)-승과가 있었다. 고려시대학자로는 해동공자로 불린 최충이 있었다. 그는 12도의 선구자이고 문헌공도 설립하였다. 그밖에 안향(안유)이 있었는데 주자학, 성리학의 대가이다. 섬학전제도란 것도 있었는데. 양현고의 재원을 충당하기위해 관리의 품계에 따라 일정한 재원을 기부 받았던 제도로 오늘날의 일종의 교육의 연금제도였다. 이색도 있었는데 문무 겸비인을 교육적 인간상으로 과거제에 무과 둘 것을 강조하였다. 정몽주는 중용과 대학을 심신의 학문으로 중시여기는 고려 말의 학자였다.
다음은 고려시대 끝나고 조선시대의 교육이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유교중심의 교육이었고 하지만 민중은 불교를 섬겼다. 조선시대의 성리학과 교육의 관계는 고려 말 안향이 수입하여 조선 중기 이황과 이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성리학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성현의 행실모방, 선인 양성, 실생활 중시, 자기수양 목적으로 사회에 쓸모없는 공리공론을 일삼음 사서삼경이나 소학 등의 유교 경전을 주장했고 그에 대한 비판으로 실학이 등장하였다. 실학은 공리공론의 성리학 비판으로 일어난 원리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실학에는 중농주의, 중상주의, 실사주의가 있었다. 먼저 경세치용파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른말로 중농주의라고 불린 경세치용파에 이익에 대해 먼저 살펴보면 이익은 남녀유별과 능력주의 주장(여자는 가정일 충실)하였다. 그리고 과거제 폐지 주장하였고 성호사설을 지었다. 그다음 대표적인 중농학파 학자인 유형원은 신분과 직업세습제 철폐안 제시하였다. 공거제를 주장했는데 공거제란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교교육을 구상하겨 국가에서 필요한 인원을 직접 공급하자와 능력에 따른 교육기회 부여를 주장한 개혁론이다. 그의 저서에는 반계수록이 있다. 그다음 이용후생파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중상주의라고도 불리는 이용후생파는 박지원이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들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상업에 발전에 관심을 가지 학자들이다. 다음 실사구시파는 경서와 금석문 고증에 관심을 가지고 김정희가 중심이었고 그밖에는 김정호 등이 있었다. 실학은 남녀유별, 인간평등, 능력제일주의 , 개인차 인정, 중국역사 비판하였고 소외된 남인 중심으로 개혁의 요구하였지만 국정에 효율적 반영이 안되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먼저 종학에 대하여 살펴보면 왕족 자제 교육하였고 세종이 세운 기관이다. 여기서 참고로 군왕교육에 대한 저술한 책들을 살펴보면 설총(화왕계), 권근(수창궁재상서), 이황(성학십도),이이(성학집요)들이 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세운 관학으로는 성균관, 사학, 향교가 있었고 사학으로는 서원, 서당이 있었다. 먼저 조선시대 관학에 대해 살펴보면 성균관은 조선의 최고의 교육기관 ( 문묘와 명륜당) - 고려의 국자감 격이었다. 성균관에서 하는 것은 인재양성, 선현에 제사, 고급관리 양성이었다. 문묘는 공자의 제자와 역대 대유가를 모시고 배향하는 기관이었고 명륜당- 유생의 교육과 학문 강학, 양재 - 유생의 기숙하는 교육기관이었다. 4학은 서울에 위치하였고 중등교육기관이고 문묘가 없었다. 4학은 고려의 학당 격 이었다. 향교는 지방의 중등교육기관이고, 교관으로 교수, 훈도, 학장이 있었다. 그리고 교생에게는 병역이 면제되었다. 재원은 국고에서 지급하는 학전이다. 그다음 조선시대 사학에 대하여 살펴보면 서원부터 볼 수 있다. 중등교육기관으로 (주세붕의 백운동서원(안향추모))이 대표적인 교육기관이고 그곳에서 하는 일은 과거준비(고려의 12공도)였다. 그리고 국가에 보조도 받았다. 그다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당이 있는데 범 계급적 초등기관이고 훈장, 접장, 학도가 있었고 사학과 향교에 입학준비를 도와주는 기관이었다. 여기서 접장이란 나이가 많은 우수학도로 학력이 낮은 학도 지도하는 사람이다. 잡과는 형식적 교육기관은 따로 없고 중앙과 지방의 소관 관청의 책임 하에 각기 교육하였다. 잡과의 과거에 합격하면 하급관리로 임명되었다. 외국어 분야도 포함 되었고 초시와 복시로 치뤄졌다. 서당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면 훈장 자영서당, 유지 독당 서당, 유지 조합 서당, 촌락조합 서당이 있었다. 참고로 오늘날 교육 인적 자원부는 조선시대의 禮曹(예조)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먼저 초시에 합격하면 복시를 볼 자격이 주어졌고 복시(초시합격자)에 합격하면 전시(임금 앞에서 시험- 서열만 가림)를 보았다. 식년시 - 3년마다 치러지는 시험이었고 그밖에 증광시 - 국가 경사시 보는 시험, 알성시 - 왕이 성균관 제사 참여 때 성균관 유생들이 보는 시험과 백일장 - 시골 유학생 학문 장려한 시험과 절일제 - 삼일제, 칠석제, 구일제에 치른 시험이 있었다.
문과(성균관),생진과(각도의 향교, 사부학당) - 문과 응시의 예비시험
무과, 잡과-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에 대패 살펴보면 이이부터 살펴볼 수 있다. 이이의 교육사상으로 - 立志 (주기론적) 성(誠)이 있고 이이는 대중교육 장려하였다. 학교모범: 교육규범으로 학생 수양에 관한 상세한 훈규(성인을 위한 규범)과 격몽요결-교육사상서 - 학문에 뜻을 둔자의 진학의 입문제시서가 있었다.
학교사목 : 교원과 학생의 인사관리를 하였고 성학집요는 군왕교육을 하기위한 책이었다.
권근은 성리학을 도표화한 학자이고 시청각 교육의 효시가 되었고 입학도설(17C 코메니우스의 세계도회보다 앞섬)제시 그는 수창궁재상서(군왕의 교육방법)를 제시하고 권학사목 - 생원시에 "소학"을 시험과목으로 부과하자는 규칙을 제정하였다.
다음 이황은 敬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저서로 성학십도(군왕교육), 주리론, 태극도설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청빈한 공직자가 지켜야할 내용 등이 나와 있고, 흠흠신서에는 형벌제도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고 경세유표는 중앙정치개혁, 여유당전서는 500권의 실학적 업적이 있다. 그 밖의 이덕무는 이동의 능력에 따라 교육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수준별 교육 강조하였고 박지원은 북학파이고 양반사회 비판하였고 신분타파 주장과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을 저술하였다.
다음으로 근대시대의 교육이다.
(1876한일 통상 수호조약의 의한 개항이후)교육과 현대교육관학은 주로 외국어교육, 교사양성교육, 실업교육에 치중, 기회균등사상에 치중하였다. 근대 시대의 관학으로는 육영고원, 한성사범학교, 한성 중학교, 한성고등학교, 한성여자고등학교, 광혜원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현대교육은 기회균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현대에 계급이 무너지고 나서는 교육에는 차별이 없어졌다. 육영공원(1886)은 최초의 서구식 교육기관(민영익)이다. 교육입국조서 ( 고종-1895.2월) 1894년 갑오경장에 영향을 받았고 구교육과 신교육의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교육이 실로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 - 교육구국운동의 기치를 내걸었고 3대강령 : 덕, 체, 지의 3육의 제시로 전인적 인간 설정하였다. 교육의 사회 개조 기능 강조, 교육의 의무화 계몽을 강조하였다.
*. 홍범14조 - 갑오개혁의 일환, 최초의 신식 헌법, 대외적 선포의미 (학생들로 하여금
외국에서 교육을 받게 함)
선교사에 의한 기독계 학교는 기독교사상 보급, 자주적 한국인 양성, 기회균등, 근로정신을 강조 하였고 배제학당(1885-1886)은 아펜젤러의 최초의 근대적 사학이다. 그리고 이화학당(1886) - 스크랜더 부인이 설립한 최초의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이고 정신여학교(1887) - 엘러즈 여사가 설립한 학교이다. 근대 시대의 관학의 설립의 목표는 국가의 인재양성이다. 근대 시대의 관학에 대해 살펴보면 육영공원(1886) - 최초의 근대적 관학(영어교육-양반층 자제)-일명 '통변학교'라고 불리었고 한성사범학교(1895) - 최초의 사범학교(소학교 교원양성)-교육입국조서, 한성 중학교(1899) - 최초의 중학교이고 광혜원(제중원)- 최초의 국립학교(근대병원, 최초의 근대식 국립의료기관)였다.
근대 시대에도 사학이 많이 설립되었는데 민족선각자에 의한 사학의 건학정신은 개화사상의 수용과 민족개조, 민족주체성 함양, 근대 학교 성립에 공헌하였다.
원산학사 - 최초의 근대적 사학 - 개량서당- 선각자들에 의한 우리의 기금조성 설립하였고 (1883)외국학교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덕원부사 정현이 개화파의 요청으로 설립되었고
홍화학교 - 민영환 설립(영어, 일어 습득),점진학교 - 안창호 서립(최초의 소학교),보성학교 - 이용익이 설립 , 대성학교 - 안창호(평양)등이 있었다.
근대교육사상가로는 이승훈, 남궁억, 안창호가 있다.
먼저 이승훈에 대해 살펴보면 강명의숙을 세워 초등 수준의 신식교육을 하였고 오산학교 설립(중등교육)하여 민족독립 정신 고취하였다. 다음 남궁억은 현산학교를 지었는데 이는 중등교육기관이고 "교육월보(순한글)" 발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안창호의 교육신조부터 살펴보면 교육신조는 자아혁신, 무실역행, 점진공부 튼튼한 몸, 직업교육, 도덕적 품성, 4대 정신(務實, 力行, 忠義, 勇敢)이었다. 점진학교, 대성학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흥사단 운동, 이상촌 계획, 미소운동을 하였다. 근대 시절에 소학교가 보통학교로 바뀌고 다음 심상소학교로 그 다음 국민학교로 마지막으로 지금의 초등학교(1996)로 개명되었다. 현대 교육의 특징은 교육의 기회균등, 교육의 질적 향상, 교사의 높은 자질, 사회와의 적응, 개성화와 인간능력 개발, 평생 교육 등을 들 수 있다. 2005년 8월 남해군은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평생학습도시 지정을 받았다. 평생학습도시란 도시의 사회적 안정과 시민들의 기본적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고, 시민의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하고, 해당 도시의 인적, 물적, 재정적 지원을 합리적, 혁신적으로 동원하는 데 있어서 학습이 핵심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를 뜻한다. 즉 평생학습의 지역공동체로써 학습네트워크를 구축을 통한 지역 살리기, 제 2의 새마을 운동, 열린 학습공동체 건설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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