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의 술나라 기행8- 쇠죽 퍼 먹기
녀석을 만나기 위해서 한참을 버스로 달려 시골로 갔다. 녀석의 집으로 곧장 가기 전 동네 어귀에 있는 구멍가게 들렀다. 녀석과 필자는 술을 마시는 양이 술통이라고 불릴 만큼 두주불사 형이므로 이를 감안, 소주를 무려 10병이나 샀다.
「낯선 분인데 어디 잔치 집 있소?」
「아뇨, 친구와 마시려고요.」
「예, 친구들이 여럿인 모양이군요.」
술을 한꺼번에 여러 병을 사니까 주인이 의아해 묻는 소리다. 이걸 글 나부랭이나 쓴다며 궁상을 떠는 둘이 마시려고 사가는 걸 안다면 놀랄 것 같아 피식 웃으며 가게를 나와 녀석의 집으로 향했다.
녀석은 시골집 사랑방에 쳐 박혀 글을 쓰는 신춘문예 출신의 문인이다. 그가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작업께나 했음직한 티가 까칠한 수염과 꾀죄죄한 모습에서 역력히 드러났다. 방안은 온통 책과, 담배꽁초 등으로 지저분했으며, 가난한 시골 노총각의 퀴퀴한 냄새까지 물신 풍겼다.
늘 하는 버릇처럼 녀석은 술병을 보자 웬 떡이나 싶어 금방 얼굴에 화기가 돌더니 부엌으로 쪼르르 가 먹다 남음직한 김치찌개 냄비와 술잔을 쟁반에 들고 왔다. 녀석과 필자는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다짜고짜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아동문학을 하는 녀석은 자연에 바탕을 둔 신선하고 참신한 동심으로 글을 써야 한다며 강론(?)을 폈다. 자신의 창은 남으로 붙어서 좋다면서 녀석 특유의 고운 음성으로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낭낭한 목소리로 읊었다. 필자는 앙드레 말로의 소설 <인간의 조건>에서 나온 삶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삶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으리라며 평범한 예찬론을 펴며 말 그대로 척을 했다.
이렇게 둘은 문학얘기, 세상얘기 등 시시콜콜한 잡다한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비우다보니 어느새 사왔던 소주 10병을 다 비웠다. 이 시간은 불과 한 시간 남짓했는데 녀석도 필자도 어쩔 수 없는 성질 급한 초전박살형이었기 때문이다. 술병을 다 비우자 두 술통(?)은 집에 담아 놓고 아끼던 칡주로 주종을 바꿔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제 술이 사람을 먹기 시작했다. 이러다보니 둘은 해롱해롱되며 사리에 맞지 않은 엉뚱한 헛소리로 분위기는 조용해졌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다가 녀석과 필자는 결국 쓰러져 잠을 잤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과 속이 울렁거려 스르르 눈을 떴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다시 잠을 잤다. 또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목이 타고 머리가 아파 눈을 뜨고 가까스로 문을 열어보니 밖은 깜깜했으나 뒷산등성이에 보름달이 걸쳐있는 방문 앞에 있는 부엌 아궁이 쪽은 윤곽이 드러났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나가보니 솥이 보였다. 솥뚜껑을 열고 손을 넣고 더듬거리다 바가지 같은 게 잡히고 텁텁한 국물이 떠진다. 머리도 아프고 목이 타는 터에 두 바가지 퍼서 먹었다. 그러니 정신이 좀 들고 살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 방으로 기어 들어가 잠을 잤다. 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부엌 부뚜막 쪽에서 두런거리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어, 누가 우리 쇠죽 다 퍼 먹었네!”
순간 필자는 입가에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는 이물질에 손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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