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동면의 인물
한반도의 최남단 한려수도의 중심에 위치한 삼동면은 깨끗한 자연환경과 역사의 혼이 살아 숨쉬는 곳이며,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고장으로 남해를 대표할만한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삼동면은 시원한 숲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갯벌이 펼쳐진, 한려수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과 기암괴석의 산을 갖춘 아름다운 자연이 있으며,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문무를 겸비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젊은이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지역민들에게는 고향 사랑의 자부심을 일깨워 준다. 삼동면은 남해군 어느 면보다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독립운동가
이상태(李相兌)
1891년 9월 17일 지족3리 105번지에서 아버지 지무(枝武)씨와 어머니 최경아(崔敬阿)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하전(河筌)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남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이상태 지사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가자 이예모, 정용교 등과 함께 남해의거를 의논하고 1919년 4월 4일 읍장날 남해읍 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4월 5일 지족리, 4월 6일 오전 미조리, 같은 날 오후 동천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1919년 8월에 조직된 대한민국회에 김종명, 김인섭과 함께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을 더했다. 1920년 2월 16일에는 서울에서 김광제, 문탁, 김영만, 이종만 등과 함께 조선노동대회를 조직하여 노동자의 상부상조와 인격 및 지적 향상을 도모하는 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초대회장은 김광제로 그의 사망 후 회장은 문탁이 맡았으며 이상태 지사는 재무를 담당하였다. 조선노동대회는 전국지부를 설치하고 노동단체 규합으로 회원이 8천 명에 달했지만 내부 갈등과 재정난 등으로 1924년 4월 조선노동총연맹과 합하였다. 그는 1920년 상해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지만 보안주임 이원보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동지 규합과 자금모금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독립운동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하자 1921년 11월 15일 인천 연해여관에서 한흥회(韓興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중흥에 진력했다. 그는 독립전쟁을 대비하여 폭탄, 권총 등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예견하고 사용법을 습득하기 위해 1921년 12월 16일 인천을 출발, 상해로 가던 중 경의선 차령관에서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상태 지사는 해주지방법원 초심을 거쳐 1922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3년 7월 25일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4년여 동안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계속하다가 일경의 눈을 피해 진주로 들어가서 영남유림단을 조직하여 유림 동지들과 갑을여관을 신축하여 10여 년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아 활약하기도 했다.
1930년 그는 고향인 지족으로 내려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수산업을 경영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잠식되어 가는 어업권을 되찾는 등 어민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해방을 2년 여 앞둔 1943년 2월에는 동천리에 해관암을 창건하여 수양을 가장한 독립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동지들과의 연락처로 삼았다.
조국 광복을 맞이하자 인재양성을 위해 남해수산고등학교를 미조리에서 지족리로 이전하고 신축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7년간 활동하다 1955년 12월 24일 64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103번이다.
최용덕 1920. 5. 20 영지
최용덕(崔龍德)
최용덕 지사는 1920년 5월 20일 영지리 2532-2번지에서 아버지 익전(翊全) 씨와 어머니 배아지(裵阿只) 여사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중앙대학 법과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1944년 1월 20일 대구에서 입대하였다. 곧바로 중국 강소성 소주의 일본군 60사단 제46대대 제2중대에 배속 받은 최용덕 지사는 초년병 훈련 1개월 과정을 마치고 2월 간부 후보생시험에 합격하고 최전방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는 소주지구 경중기 부대에 받았지만 동료 학도병들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하기 위한 거사를 모의했다. 7인의 학도병 탈출사건은 1993년 삼지원(三知院)에서 출판한 『7인의 脫出』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최용덕 지사와 함께 탈출한 학도병 유재영(柳在榮)씨가 쓴 이 책에는 탈출 모의, 일본군 초소 습격, 중국 충의구국군 도착, 광복군 입대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회상케 하고 있다.
최용덕 지사는 같은 부대 소속이던 학도병 유재영, 정석진, 정병훈 등과 함께 탈출을 모의하던 중 소주시내에서 양곡상을 경영하던 이씨를 포섭하여 길안내 등 광복군과 합류하기 위한 철저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인근 상주지구 일본군 60사단 47대대의 학도병 성동준 등과 함께 1944년 3월 10일 오전 10시에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이들 7인의 학도병들은 일본군 공용완장을 착용하고 38식 소총 6정, 경기관총 1정, 실탄 500여 발을 휴대하고 정식 부대 출동으로 가장하여 위병과 헌병들의 쉽게 속이고 탈출하는 대담함을 보여 주었다. 탈출 과정에서 그들은 일본군 전선 분견대, 왕정위 정권 병사를 수차례 습격하는 등 전과를 올려 당시 중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이 후 광복군의 안내원과 미리 준비된 두 척의 배로 중국 충의구국군에 도착하여 대대적 환영을 받기도 했다.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배속된 7인의 학도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위정원 전 의장 이강 선생, 정화암 선생 등과 함께 항일전을 펼치다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일본군을 탈출하여 항일운동에 참가했던 7인의 학도병 중 정병훈은 정읍여고 교감 재직 중 6.25한국전쟁 때 사망했고, 김영남은 헌병대령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으며, 김봉옥 역시 6.25전쟁에 참전하여 사망했다. 그리고 성동준은 전남교육감과 문교부차관, 박영은 뉴질랜드 대사, 한국유네스코연맹 상임부회장, 유재영은 전남교육감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을 활동을 펼쳤지만 최용덕 지사는 남해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등 조용한 삶을 보냈다. 가족으로는 부인 임연옥 여사와의 사이에 영일, 영우, 영숙, 영균, 영대, 영혜 등 6남매를 두었다. 정부는 최용덕 지사의 공훈을 기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박해근 1919. 7. 21 미조
박해근 지사는 미조리 29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 회양에서 일본군 부대에 군납업을 하던 중 1942년 2월 22세 때 김학규가 지대장으로 있는 광복군 제3지대에 조병걸과 함께 입대하였다. 군납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부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 일본의 군사기밀을 탐지 보고하면서 교포 포섭에도 최선을 다했으며, 개봉, 귀덕, 서주지역에서 초모, 반일전선 유격활동 등 적 후방 교란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지사는 첩보활동과 회양성 탈환에 정보 제공 활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주모자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군법회의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북경형무소에 수감 중 광복과 함께 출감하였다. 회양성 탈환작전의 실패는 작전 개시일인 1942년 5월 23일을 6일 앞둔 5월 17일 일본군 헌병부대 통역으로 있던 이창근의 배신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국대륙에서의 광복군의 활동이 더욱 활발했을 것으로 보여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박해근 지사는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1973년 9월 14일 서거했으며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금산리에 있었으나, 1978년 국립대전현충원 제2묘역 732번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1959년 학우사에서 발행한 『끝없는 抗戰』이 있다.
행정
@최영태 1934. 6. 11 영지 행정고시 합격, 국무총리실 10년 근무
주택은행 부은행장 역임
최영태(崔永泰)
소속 : 전 한국싸이네트 회장
성별 남
별칭 해송(海松)
본관 慶州
출생지 경남 남해
직업 [前]기업인 , [前]은행인
본적 경남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2602
원적 경남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2602
종교 기독교
자녀수 2남 2녀
가훈 정직,성실,노력
생활신조 청렴결백
취미 등산,골프
혈액형 O형
신장/체중 172cm, 71 kg
학력
입학년도 졸업년도 출신학교 및 전공
1958 부산대학교 행정학 학사
1979 고려대학교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교육과정 수료
1992 미국 하버드대학교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력
기간 기관경력
1964. ~ . 국무총리 비서관(정무담당2급)
1979. ~ . 신용보증기금 감사
1980. ~ . 한국주택은행 감사
1983. ~ . 한국주택은행 전무이사
1984. ~ 1989.08 한국주택은행 부행장
1989. ~ 1994. 세경산업 회장
1995. ~ . 한국싸이네트 회장
기간 기타
. ~ 1983. 전경련부설 국제경영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가족/지인
관계 이름 생년월일 직장 및 직위
배우자 김두리(金斗理) 1936.02.05
장남 최세훈(崔世勳) 1962.03.25
차남 최동훈(崔東勳) 1967.01.28
차녀 최청윤(崔淸允) 1963.08.11
교우 최인호(崔仁昊) 1934.03.08 前동서식품 대표이사사장
교우 김철용(金徹容) 1935.11.28 세종대학교 교수
활동
상훈
녹조근정훈장
1934년 6월 11일 영지리 2602번지에서 태어나 행정고시 합격하고 국무총리실에서 10년 근무하고, 주택은행 부은행장 역임 후 한국싸이네트 회장으로 활동한 행정관료이고 경제통이다. 1958년 부산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고려대학교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교육과정과 1992년 미국 하버드대학교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하였다. 1964년 국무총리 비서관(정무담당2급)으로 행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9년부터 신용보증기금 감사와 1980년 한국주택은행 감사, 1983년 한국주택은행 전무이사를 거처 1984년 1989년 8월까지 한국주택은행 부행장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세경산업 회장과 1995년 한국싸이네트 회장으로 수완을 발휘했다. 상훈으로 녹조근정훈장이 있다.
@최정일 1955. 3. 24 영지 사법고시, 행정고시 합격, 법제처 이사관
최정일(崔正一)
직업 : 현 행정공무원, 현 변호사
출생 : 1955년 3월 24일 경남 남해 출생
소속 : 현 법제처 행정법제국 국장
성별 남
본관 慶州
출생지 경남 남해
직업 행정공무원 , 변호사
전문분야 법제,행정법
병역사항 육군병장 만기제대
직장주소 (110-760) 서울 종로구 세종로 55 정부중앙청사
직장전화 02-2100-2114
E-MAIL cji3024@moleg.go.kr
본적 경남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3005
종교 기독교
결혼기념일 1984년 04월 10일
자녀수 1남 2녀
가훈 믿음,건강,실천,이론
자격면허 변호사
취미 음악감상
신장/체중 175cm, 80 kg
학력
입학년도 졸업년도 출신학교 및 전공
1973 경남고등학교
1977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1987 1989 독일 본대학교대학원 법학 석사
1992 1995 서울대학교대학원 행정법 박사
경력
기간 기관경력
1975. ~ . 제18회 행정고시 합격
1981. ~ . 제23회 사법시험 합격
1981.09 ~ 1983.08 제13기 사법연수원 수료
1983.10 ~ 1985.03 법제처 행정사무관
1985.04 ~ 1993.12 법제처 법제조정실 법제관(서기관)
1994.01 ~ 1995.05 법제처 제1국 법제관(서기관)
1995.05 ~ 1995.12 법제처 제2국 법제관(서기관)
1995.12 ~ 1999.01 법제처 경제법제국 법제관(부이사관)
1999.01 ~ 1999.12 국회사무처 법제예산실 부이사관
2000.01 ~ 2001.01 국회사무처 법제실 부이사관
2001.01 ~ 2002.05 법제처 사회문화법제국 법제관(부이사관)
2002.05 ~ 2002.08 법제처 심판심의관
2002.08 ~ 2003.05 법제처 행정법제국 국장(이사관)
2003.05 ~ 2005.07 법제처 사회문화법제국 국장
2005.04 ~ . [現]문화재청 문화재제도분과 문화재전문위원
2005.08 ~ 2006.08 법제처 경제법제국 국장
2006.08 ~ . [現]법제처 행정법제국 국장
가족/지인
관계 이름 생년월일 직장 및 직위
배우자 이영선 1957.04.14
장녀 최선아 1984.09.27
장남 최길성 1987.11.28
차녀 치인애 1989.08.22
활동
저서
중점정리 문제해설 행정법(상)(하),박영사,2000
논문
독일에서의 행정규칙의 법적 성질 및 효력-특히 규범구체화행정규칙을 중심으로(박사학위논문),서울대 대학원,1995
행정입법절차의 정착방향,법제연구,1997
행정규칙의 법규성문제를 또 생각하며,법제,1998
1955년 3월 24 일 영지리 3005번지에서 태어나 사법고시와 행정고시에 합격한 수재이며 법제처 행정법제국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1973년 경남고등학교와 1977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독일 본대학교대학원 법학 석사를 받았으며 1995년 서울대학교대학원 행정법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5년 제18회 행정고시 합격하고,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도 합격 합격하여 남해인의 긍지를 더 높였다. 그는 법제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통하며 행정법 분야의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중점정리 문제해설 행정법”(상)(하), 박영사(2000년), “행정입법절차의 정착방향”법제연구(1997년), “행정규칙의 법규성문제를 또 생각하며”법제(1998년)과 논문으로 “독일에서의 행정규칙의 법적 성질 및 효력-특히 규범구체화행정규칙을 중심으로”(박사학위논문),서울대 대학원(1995년) 등이 있다.
\장인태 1951. 3. 25 전도 경상남도 행정부지사, 현 행정자치부 2차관
장인태(張仁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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