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남해읍 재실기

책향1 2007. 11. 23. 13:38
 

남해읍 재각 및 문중회관


김해김씨 (가락김씨회관)

 駕洛金氏會館 


● 회관소재지  남해읍 서변리 324-3번지

● 회관건립일  1976년 6월 5일(최초건립일), 2006년 4월 1일(이전일)

● 건축방식    콘크리트조 3층 슬래브

● 부속물      공적비 1기


1, 회관연혁


1915년 남해 김해김씨 화수회를 만들었고 1950년 3월 존목회를 만들어 유지해 오다 1952년 10월 10일 남해읍 북변동의 김윤석씨 집에서 20여 명이 모여 김해 김씨 남해군 종친회를 발기할 것을 협의하고 1952년 10월 23일 남해읍 남산동 남산정미소(사주 김천금)에서 발기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52년 10월 28일 남산정미소에서 230여 종친이 모여 발기 총회를 개최하여 회장에 김형기 씨를 선출하였다. 1971년 4월 24일 제 7대회장에 김은태 씨가 선출되어 종친회 명칭을 가락남해군 종친회로 변경하고 1972년 5월 19일 남해극장에서 16차 종친회  남해군총회를 개최하고 남해읍 남산리 209-1번지 대지 100평을 회장 김은태 씨가 희사하여 1973년 3월 30일 헌성금을 모아 회관 기공식을 열었고 1976년 6월 5일 대지 175평에 연건평 80평으로 낙성하게 되었다. 구 회관은 남해군 도시계획에 의해서 2005년 11월 남해읍 서변리 324-3번지 구 남해유치원과 교환 이전에 합의하여 2006년 4월 1일 이전하였다. 


(공적기념비)


구지봉의 영기(靈氣)를 받아 가락(駕洛) 성업을 이룩하고 순충장열(純忠壯烈)로 3한을 통합하였으며 화랑정신을 세세상전(世世相傳)하여 유구한 역사를 길이 빛내고 구국 대임(大任)에 선봉서는 우리 호족들이 남해군에 삼천 여 호가 살아온지 오래되었으나 친화 돈목할 회관이 없어 불편을 느껴오던 중 가락 1931년 3월 정기총회에서 회관건립 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하여 오던 바 거액을 희사하여 이 사업을 성공케한 이분들의 공적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여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가락 1936년 5월 건

   김은태(金銀泰) 김평석(金平淅) 김달중(金達中) 김봉곤(金奉坤)





2. 김해김씨 역사


김해김씨는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씨다. 4백 만 명을 넘는 유일한 성으로 서울 인구의 절반 가량에 이른다. 웬만한 시. 도의 인구보다 많다. 시조는 가락국의 시조왕 김수로다. 가락국은 고대 낙동강 하류에서 일어난 나라다. 가야 혹은 6가야라고도 하며 오늘날 김해 일대에 해당된다.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후 500여 년 동안 계속되다가 후에 신라에 합병된다. 김해를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가락국의 터전이 김해였기 때문이다. 한편 가락국의 창업주 김수로왕의 탄생에는 설화가 전해온다.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가락의 땅에는 왕은 물론 나라의 이름도 없었다. 다만 여러 부족의 아홉 촌장(村長)들이 백성을 통솔하고 있었다. 서기 42년 어느 날 촌장들이 인근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나라를 다스릴 왕을 얻기 위해 의식을 올린다. 이 때 하늘에서 한 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달려가 보니 금그릇 안에 여섯 개의 알이 있었다. 다음날 그 알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온다. 그 중 제일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라 하고 금 그릇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했다. 그가 바로 가락국의 시조 왕 김수로다. 나머지 다섯 동자는 5가야의 수장으로 각각 삼았다. 뒤에 수로왕은 아유타국(지금의 인도)의 공주 허황옥(許皇玉)을 왕비로 맞아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두었다. 왕자 중 맏이인 거등왕자가 왕위를 잇고 둘째 왕자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로 계승한다. 거등왕으로 이어지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바로 김해 김씨다. 김해김씨는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수로왕의 13세조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여 그 뒤에 148파로 갈라진다.

 그 중에서 고려 때의 김목경을 1세조로 하는 경파와 그의 아우 김익경을 1세조로 하는 사군파, 그리고 김관을 1세조로 하는 삼현파가 주종을 이룬다. 김해김씨는 김수로왕 이후 11世 김무력(金武力)의 대부터 크게 번창한다. 김해김씨의 중조(中祖)라 할 수 있는 흥무왕 김유신이 김무력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김무력은 신라조에 각간(角干)의 벼슬을 했을 뿐 아니라 뛰어난 무장이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신라 진흥왕의 조카딸과 혼인함으로써 신라의 종성(宗姓)과 인척을 맺고 가락국을 신라와 합병했다. 김유신이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워 흥무대왕(興武大王)에 봉해짐으로써 이 집안은 신라의 골품체제 내에서도 최고 가문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따라서 김해김씨는 김유신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김해김씨는 역사가 길고 자손이 번창한 만큼 후손들의 분파도 무려 1백48개에 이른다. 

 김해(金海)는 경남 위치하는 고장으로 6가야 중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으나  680년(문무왕 )에 김해로 개칭하였다. 일찍이 가락국 역사와 함께 문호를 개방한 김해 김씨는 김해김 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여 왔다. 김해 김씨의 연원은 『가락 국기』등 많은 기록이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에 여섯 개의 알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 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을 김씨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군왕이 된 수로왕은 나라이름을 대가락으로 정하고 남천축(고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여인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그 후 10대 구형왕이  532년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의 작위와 가락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을 역임했다. 구형왕의 증손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명장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의 세계(世系)를 이었다. 김해 김씨는 중시조 유신(庾信)의 후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개 파(派)로 분파되었으며, 그 중에서 경파(京派)와 사군파(四君派), 삼현파(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 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경파(京派)의 파조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에 봉해졌으며,  목경의 맏아들 보(普)의 6세손 영견(永堅), 영서(永瑞), 영정(永貞), 영순(永純) 4형제가  빼어났다.

사군파(四君派)에서는 파조인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 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를 지냈다. 한편 진문(振門)의  6세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일세조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의 아들 맹(孟)은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 기손(驥孫), 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맹(孟)의 세 아들 모두 당대의 문장가로 과거에 올랐다. “김씨삼주”로 불리었고 삼현파의 삼현은 극일(克一), 일손(馹孫), 대유(大有)를 가리킨다. 48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일손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옛날 항우가 초(楚)나라 양왕(壤王)을 죽인 중국의 고사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한 내용의 조의제문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일손은 참수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었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에  숙부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청도의 운문산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그 밖의 인물로는 중국어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수군통제사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 홍도(弘道)가 유명했고, 『해동가요』를 남기고 『청구영언』을 편찬한 천택(天澤) 등이 명문거족인 김해김씨를 빛냈다.  

 김해김씨의 중시조 김유신은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로 신라 왕실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 어머니이다. 진평왕 31년 화랑이 되어 향도를 거느리면서 심신을 수련했다. 654년 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김춘추를 무열왕으로 추대했다. 660년(무열왕 7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튼튼히 했다. 고려에서는 정승급 15명, 명신(名臣)과 공신(功臣) 10여명,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을 배출했다. 조선조에 들어서 김해김씨의 꽃은 모암(慕庵) 김극일(金克一)에게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김극일은 삼현파(三賢派)의 파조인 김관(金管)의 5세손으로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세종 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그의 2남 김맹(金孟)이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밀양박씨재각 및 문중회관  


密陽朴氏 縣監公派(敎授公)淸風齋


● 재실소재지   남해읍 서변리 231번지

● 재실건립일   1971년 4월 18일

● 건축방식     목조와가

● 부속물       외삼문(和伯門) 공적비 등 7기

● 봉안선조     입남조 1위

● 입남조      현감(縣監) 교수공(敎授公) 환(桓) 중조 밀성대군 휘 언침(彦忱) 23세손 파                  조 규정공 휘 현(鉉)의 8세손

● 입남시기     1501년

● 시향일       음력 10월 10일


1.재실기


남해는 구읍 그대로 인데 사당(祠堂)은 새롭구나. 내리뻗은 봉강산(鳳岡山) 줄기는 청룡이요. 품어 안은 남산은 봉우리는 백호로다. 천시(天時)는 반질반질한 술구더기에 받들어 흠향하고 육지는 넓은 바다에 맞닿아 끝이 없다. 약간의 들보는 도가(道家)의 방서(方書)처럼 고요하고 묵직하며 날아갈 듯 한 처마의 모양은 의시(擬詩)를 외우는 듯 날개질 치고 북쪽의 망운산은 한 고을을 편안하게 진정시키는 조종(祖宗)같이 우뚝하고 동쪽에 펼쳐진 섬호(贍湖)는 은혜로운 빛을 뿌리며 남쪽의 금산은 공손하고 겸손하게 절하는 군자와도 같고 서쪽에 흐르는 봉내의 정취는 완연한 선경이로다. 우뚝한 청풍대(淸風臺)는 봉학(鳳鶴)이 날아 듬직하고 널따랗게 펼쳐진 강진바다는 구룡(龜龍)의 상서로움이 나타나고 도로는 사방으로 연관하니 교통이 편리하며 기름진 들판이 광평하니 뻐꾹새소리가 무궁하구나. 봄꽃은 산야를 수놓고 여름 숲은 나무 그늘을 이루니 정말 화전(花田)의 풍경이요 가을비는 알맞게 뿌리고 그치며 겨울바람은 더운 입김을 내뿜게 하니 실로 천하의 낙원이로다. 양천(釀泉)에 으뜸이 있으니 세상에 반드시 충효의 자손이 있을 것이요 영지버섯이 스스로 향기를 뿜으니 이 어찌 문무의 의관이 없을소냐 나 얕은 견문으로 바쁨을 핑계 삼아 감히 몇 구절을 인용하여 간략한 글월을 이루어 두느니라.

신라 기원 2030년(기미)4월 27일

입남조 현령공 16세손 봉주(琫柱) 삼가 적음


2. 문중 역사


 

 박씨의 원조(元祖)는 아득한 옛날 지금의 경주에 있는 양산(楊山)골 나정림(蘿井林)에서 천마(天馬)가 품은 알에서 오색광채(五色光彩)를 띠고 태어났다.

 둥근 박 같은 알에서 나셨다 하여 성을 박(朴) 세상을 밝게 비치실 분이라 하여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고 육촌마을 사람들의 추대로 신라 재위 61년의 시조왕이 되었다.

원조 이후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에 이르러 그의 8 왕자들이 각기 분관을 하면서 장자이신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沈)은 밀양 박씨의 시조가 되었고 다른 왕자들도 고령,함양,죽산,상주,전주,순천,경주 등 박씨의 시조가 되었고 이때부터 박씨의 8대본(八大本)이 비롯되었다. 박씨 팔대본 중에서도 밀양박씨는 더욱 번성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나라에 충성하고 삼강오륜을 잘 지켜 부모 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동기간에 우애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밀양을 본으로 하는 박씨는 다시 12 파로 갈라지게 되었으니 이 때 고려조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벼슬을 지내고 특히, 동방 도학(道學)의 대가였던 현(鉉)은 규정공파의 현조(顯祖)가 되었다. 본은 밀양, 파(派)는 규정공파라고 일컫는 이유는 이와 같은 분관분파(分貫分派)의 내력에서 연유된 것이다. 현조 이후 절도사공 대손(大孫)은 중국 심양에서 단종(端宗)이 화를 당하매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사육신(死六臣)에 버금가는 충절의 귀감(龜鑑)이 되었으며 절도사공 대손(大孫)은 북평절도사로 있을 때 단종이 왕위를 강탈당한 그 울분과 통한의 심정을 겨누며, 숙부 청재공이 질정사의 소임을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올 무렵 육신의 참사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니 절도사공은 시신을 거두고 충절의 절개를 다 하였다. 그의 여섯 아들 중 다섯째인 운산 현감 환(桓)은 ‘벼슬을 버리고 숨어살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남해섬으로 들어 와서 남해군 서면 서호리에 정착하고 슬하에 성간(成簡), 성화(成和), 성주(成周), 성근(成近), 성의(成義)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500 여 년 전의 일이며 현감공 환(桓)을 입남조로 하고 다섯 아들의 후손을 남해 5파(五派)로 부르고 있다. 남해현지(南海縣誌)에서는 1501년 진주 교수관으로 있다가 입남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당시 유배 중이던 자암(自庵) 김구의 문집인 화전별곡(花田別曲)중에 교우(交友) 사실이 나타나 있으며 특히 1531년 5월 19일 유배에서 풀린 자암이 남긴 송별시에 “萬事是非外 百年時酒中 尋常君得此 飄伯魂衰翁”이란 구절에서 그와의 이별을 서러워하고 세상의 덧없음을 안타까워한다. 묘소는 이설이 있으나 남해읍 봉성리 산 330의 3번지 도장곡(都藏谷) 일송봉(日傘峰) 정좌(丁坐)이고 배(配) 함안(咸安) 조(趙)씨와 동원이다. 



나주임씨 정자공파

羅州林氏 正字公派 淸林齋


● 재실소재지  남해읍 평리(마산) 1078-3

● 재실건립일  2001년 11월 29일

● 건축방식    2층 재실 조립식 와가

● 부속물      1층 회관

● 봉안선조    19세손 휘 귀유(貴儒) 이하 120위(位)

● 입남조      시조 비(庇)의 19세손 휘 귀유(貴儒)

● 입남시기    1670년경

● 시향일      음 10월15일



1. 창건기(創建記)


망운산(望雲山) 품안에 정기(正氣)가 서린 능선을 타고 굽이굽이 산록의 끝자락에 높이 솟은 일당재사(一堂齋舍)가 있으니 이는 입남조(入南祖)를 이곳 마산리(馬山里) 뒤산 자락에 건좌(乾坐)로 모셔 부호군(副護軍 入南祖) 휘(諱) 귀유(貴儒) 자(字) 중경(重卿) 10대조(代祖) 이하(以下) 제(諸) 자손(子孫) 120위(位) 내외분(內外分) 선조(先祖)를 봉안(奉安)하시고 청림재(淸林齋)라 이름하여 문중(門中)이 대길(大吉)의 전망(展望)을 안고 있다. 더욱이 생명(生命)의 근원(根源)을 알고 조상(祖上)의 대은(大恩)을 가슴 깊이 새겨 후손(後孫)들이 숭조(崇祖) 효친(孝親)의 정신(精神)과 씨족적(氏族的) 뿌리 의식함양(意識涵養)으로 심혈(心血)을 경주(傾注) 정성(精誠)을 다하여 여기 청림재(淸林齋)를 건립(建立)하였다.

고려(高麗) 충열왕조(忠烈王朝) 보좌공신으로 대장군(大將軍,從一品)과 충청도(忠淸都) 지휘사(指揮使, 現道知事) 판사(判司) 재사사(宰寺事, 現 조달청장)까지 이른 임비(林庇) 공(公)을 원조(遠祖)로 모시고 우리나라 열 번째 성씨(姓氏)이자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 공(公)은 공직(公職)에서 영화(榮華)를 마다하고 마침내 멀리 입남(入南)하시어 자기(自己) 몸을 세상(世上)에 숨기면서 국가(國家)에 보은(報恩)해야 한다는 대승적(大乘的) 차원(次元)에서 후손(後孫)에 크신 덕(德)과 참된 삶의 길을 훈교(訓敎)하시다. 청림재(淸林齋)는 씨족(氏族)에 대한 숭고(崇高) 애정(愛情)과 자신(自身)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생(生)의 전기(轉機)를 마련하게 하는 산 교육장(敎育場)이다. 여기에 종문(宗門)의 뿌리 의식(意識)의 함양(涵養)과 인재(人材) 배출(輩出)을 통(通)한 사회개혁(社會改革)에 기여(寄與)하는 나주임씨(羅州林氏) 정신창달(精神暢達)의 터전이 될 것인지라 후손(後孫)들이 추원보본(追遠報本)하는 마음과 몸을 이곳에 모아 종중(宗中)의 숙원사업(宿願事業)인 재사건립(齋舍建立)의 성취(成就)에 관(關)한 약기(略記)를 설명하면 1999년 7월 종회(宗會)의 중지(衆智)를 모아 총 예산 1억 5천여만 원 중(中) 가호당(家戶當)30만원 분담금과 헌, 성금으로 충당하여 2000년 9월 23일 본회관(本會館) 및 청림재(淸林齋)준공식(竣工式)이 거행되었다. 건립(建立) 추진 중 유공자(有功者, 獻誠金)는 특별(特別)히 이 비(碑)에 새겨 영원(永遠)토록 후대(後代)에 귀감이 되게 하였다. 역사(歷史)의 질곡 속에서 언제나 불굴의 의지(意志)로 나라와 민족(民族)을 지키신 선조(先祖)들의 깊은 뜻과 높은 덕(德)을 거울삼아 가문(家門) 의 훌륭한 전통(傳統)을 계승 발전함을 거듭 바라며 천세(天世) 토록 향화(香火)가 소멸(消滅)되지 않고 이곳의 서기(瑞氣)는 영원(永遠)하리라.

서기 2001년 11월 29일

추진위원(推進委員)

추진위원회 회장  종수(鐘水)

추진위원 춘택(春澤) 원채(邧彩)

  창락(昌洛) 형춘(亨春)

성현(成顯) 화석(華碩)

권택(權澤) 태권(泰權)

석택(錫澤) 춘풍(春風)

총무 남택(南澤)

글지음 준택(俊澤)

글씀 종모(鍾模)


2. 나주임씨 역사


임씨(林氏) 성은 BC천년 경 중국의 은(殷)나라 왕자 비간(比干)이 당대의 폭군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주왕의 폭정을 만류하니 주왕이 "예로부터 충신의 염통에는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 했는데 진실로 충신이라면 염통에 구멍이 아홉 개가 있겠다." 하면서 비간을 죽였다. 비간은 은나라 태정대왕(太丁大王)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주왕의 숙부(叔父)이시다. 비간공이 은나라 말에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정부인 진씨(正夫人 陳氏)는 임신 중에 장림산(長林山)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아들을 낳으시니 천(泉)이라 하였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건국(建國)되자 무왕(武王)이 비간공의 아들 천을 찾아 임씨(林氏)의 성과 견(堅)이라는 이름을 사(賜)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나주 임씨(羅州林氏)시조는 고려의 대장군 임비(林庇)이다. 임비는 1281년(충렬왕 7년) 왕과 함께 원나라에 다녀오고 시종보좌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대장군, 충청도 도지휘사 판재사사에 이르렀다. 본관(本貫)의 유래(由來)는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72현(賢) 가운데 한 분이신 임비의 9세손으로 해남 현무를 지낸 감무공(監務公) 휘(諱) 탁(卓)이 불사이군의 절의를 굳게 지키시고 동지들과 함께 괘관현(掛冠峴)에 올라 뜻을 밝히시며 관복을 걸고 부조현(不朝賢)을 넘어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셨다. 그 후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으시고 드디어 낙남(落南)하시어 지금의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會津)에 은둔하시고 종신(終身)토록 나오시지 않으셨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어 본관(本貫)을 회진(會津)으로 하였다. 회진이 지금의 나주(羅州)에 속하게 됨으로 경신(庚申. 1800)년에 악정공(樂正公)이 문중(門中)의 결의를 얻어 본관을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문헌상에 본관이 회진으로 기록되어 있음은 개칭전의 기록이고 개칭 후에는 모두 나주(羅州)로 되어있다.

나주임씨의 분파는 조선 초기에 생존했던 조상들에서 시작된다. 탁(卓)의 아들이며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10세손 봉(鳳)에게는 시소(始巢), 유소(有巢)의 두 아들이 있었다. 유소(有巢)의 후손이 도정공파(都正公派)로 갈라진다. 시소(始巢)에게는 귀연(貴椽), 귀량(貴樑)의 두 손자가 있었는데, 큰 손자 후손에게서 6개파(派)가 갈라지고, 둘째 손자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리되었다.

귀연(貴椽)에게는 붕(鵬), 학(鶴), 임안의 세 손자가 있었다. 붕(鵬)은 중종조에 유생들과 함께 조정암(趙靜菴)을 구명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며,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재직 중 죽은 붕(鵬)의 네 아들인 익(益), 복(復), 진(晋), 몽(蒙)이 각각 장수공파(長水公派), 정자공파(正字公派), 절도공파(節度公派), 첨지공파(僉知公派)의 파조가 되었고, 학鶴), 안이 각각 생원공파(生員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의 파조가 된다. 나주임씨(羅州林氏)의 분파(分派)는 후대로 내려가며 더 세분되나, 대개는 위에서 언급된 8개 파로 나누어진다. 탁(卓)의 8세손인 정자공파(正字公派)의 파조(派祖) 복(復)은 승정원정자(承政院正字)를 지냈다. 파조는 16世 정자공(正字公)으 휘 복이며 자 희인(希仁) 호 풍암(楓巖)으로 154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46년 증광 을과(增廣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에 등용 되였는데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사건에 연루 되여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順懷世子)의 탄생으로 특사로 풀려나 고향 회진으로 돌아왔다. 선조(宣祖)초에 박사(博士)에 임명 되였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공은 시문(詩文)과 학행(學行)뿐만 아니라 무략(武略)에도 뛰어났다. 1574년에 왜(倭)가 쟁단(爭端)을 만들자 변사(邊事) 십여책(十餘策)을 상소(上疏)하니 상(上)께서 비답(批答)을 내려 그중 전선(戰船 鐵甲船)의 제도(制度)를 가납(嘉納) 비변사령(備邊司令)과 각도수사(各道水使)로 하여금 그 설계에 따라 장조(裝造)하여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을 장려하였다.

그후 10여 년 후 1592년 임진년에 난이 일어나 통제사 이순신(統制使 李舜臣)등이 이것을 이용하여 대승(大勝)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가 증직되었다.

 정자공 복의 맏아들인 감사공 서는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황해감사에 이르렀다. 감사공 서의 아들 승지공 련 또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우승지에 이르렀고, 감사공의 둘째 아들 충익공 담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병자호란의 뒷일을 수습하기 위해 접반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가산에서 생을 마치게 되니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자공 복의 손자인 상주공 타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원 종2등 공신에 녹권1등에 추록되었고 관직은 상주목사에 이르러 후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입남조는 그의 손자이고 묘는 마산리(馬山里) 뒷산 자락 건좌(乾坐)에 있다.

 



문화류씨


文化柳氏 忠景公派 豊溪祠


● 재실소재지 남해읍 평현리 728-13번지

● 재실건립일  2003년 4월  일

● 건축방식   콘크리트조 와가

● 부속물     외삼문(崇祖門) 공적비 등 비2기

● 봉안선조   입남조 이하 379위

● 입남조    합천군수 휘 륜(綸) 시조 휘 차달(車達)의 16세손. 충경공(忠景公) 휘 량(亮)                 의 손자

● 입남시기   1456년

● 시향일     음력 10월 10일


1. 재실기(풍계사 건립비)


뿌리가 깊은 나무는 세찬 비바람에도 굳건한 모습을 간직하며 무성(茂盛)한 가지를 뻗히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문화 류씨는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 )을 시조로 황해도 신천군 문화(文化)에 본관을 두고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오면서 여러 분야 여러 지역에서 영광스런 자취를 뚜렷이 남긴 자랑스런 종중이다.

이곳 입남조 휘 륜(綸) 조(祖)는 시조 류차달의 16세손. 륜의 조부는 14세손 휘 량(亮 )이며 조선조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석의정(石儀政)을 지내시고 문성부원군(文成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충경공이라는 시호를 받으셔서 충경공파의 파조가 되셨고 부(父)는 15세손 한생(漢生)으로 사헌부 지평과 왕실의 계보편찬 및 왕족의 허물을 살피는 종부사(宗簿寺)소윤(少尹)을 지내시고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오르신 분이다.

군수공(郡守公) 륜(綸)은 소윤공 한생의 6남중 차남으로 협천군수를 지내시면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1456년 이를 부당하게 여겨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려는 마음으로 군수 직을 버리고 신분을 감추면서 남해군 설천면 모천리 649번지에 이거하셔서 뿌리를 내리신 입남조 이시다. 숙부인 행주(幸州) 기(奇)씨와 슬하에 중(淙), 전(沺), 윤(潤) 등 세 아드님과 한 분의 따님을 두셨으며 강직 온후한 성품으로 덕행에 힘쓰시면서 후손들을 있게 하셨다.

우리 후손들이 유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기품을 지키며 살고 있음은 위대한 선조의 보살핌에 힘입은 바 크다아니할 수 없다. 잘 태어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 영광은 오로지 선조에게 돌려져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가지와 열매가 무성함은 그 나무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우리 후손들은 이런 이치를 깨우치고 선조의 덕을 기리며 얼을 이어받고자 후손들의 융성과 화목을 지켜보고 게신 망운산 관대봉 선산 바로 아래여기 이 자리에 소망하던 제각 풍계사를 세운다. 이 재각에는 입남조 후손대 7대의 위패를 봉안 하였고 앞으로 그 후대도 봉안할 재각. 이곳은 선조의 자랑스런 정신적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도덕성을 회복하고 가치관을 바로 세우기 위한 터전이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아니한다.

개인이나 문중으로서는 물론 사회적으로 각자기 스스로를 바르게 지켜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번영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여기에 담겨있다.

선조를 되돌아 보지 않고 어찌 자손에 대하여 생각한다 할 수 있는 일인가 건립기금은 경기도 남양주군 하도면 창현리 소윤공 한생(漢生) 선조의 묘소제각이 시 계획에 편입됨에 따라 충남 아산시 배방면으로 옮겨지면서 받은 보상금중 남해문중 재각건립기금으로 배정된 1억 5천만 원에다 남해군 내외 문중의 성금으로 충당하였다.

이 재각은 한국전통 이익식(二翼式) 팔자형 지붕으로 강원도 자생의 육송과 고령 기와로 지어진 본채 20평, 아래채 배집형 솟을 대문 12평 한옥으로  건축비 및 부지매입비 2억 7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이 재각에는 군내외 전 종친의 정성이 담겨있고 추진위원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열성적으로 맡은 일을 다한 회장 우석(雨錫) 총무 권수(權垂)의 건축공사 감독역에 시종일관 노고가 스며있다. 2002년 3월 2일 착공하여 2003년 4월 일에 준공하였습니다.


입남조 21세손 동길(東吉) 근식(謹識)

 

 

2. 문중 역사


시조 차효전은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인 류차달(문화 류씨의 시조)의 첫째 아들이다. 유차달의 5대 조상인 차승색은 신라 애장왕 때 벼슬이 좌승상이었는데 809년(신라 애장왕 10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金彦昇, 41대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차승색은 애장왕의 복수를 위해 좌승상의 벼슬을 버리고 아들 차공숙과 함께 사냥가는 헌덕왕을 죽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차공숙을 데리고 도피하여 황해도 신천 유주(문화의 개명 전 지명)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할머니의 성인 양(楊)씨를 모방하여 류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 후 류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 유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차 천량을 제작하고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 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에 올랐다. 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태조 왕건이 류차달의 원래 이름은 류해(柳海)였지만 "이차위달(以車爲達)"했다고 하여 차달(車達)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차 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류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류씨도 없앨 수 없다."하며 유차달의 첫째 아들 차효전에게는 대광백에 봉하고 연안을 식읍으로 하사 하고 차씨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인 효금에게는 류씨를 계승하게 하였다.

파조인 류량(柳亮, 1355 ~ 1416) 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자 명중(明仲), 시호 충경(忠景), 문성군(文城君)이다.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典儀副令)을 지내고 1392년(공양왕 4)에는 이조전서로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이듬해 중추원 부사가 되어 강릉도관찰출척사를 겸임하였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자헌대부에 올라 문성군(文城君)에 봉해지고 대제학 ·대사헌 ·찬성을 역임하였으며, 다시 부원군에 봉군되어 1415년 우의정에 오른 뒤 병으로 사임하자 동덕공신(同德功臣)의 호가 내렸다. 입남조(入南祖)는 합천군수를 지낸 휘(諱) 륜(綸) 시조 휘 차달(車達)의 16세손이고 충경공(忠景公) 휘 량(亮)의 손자로 1456년 경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로 입남하였고 묘는 남해읍 평현리 풍계산(豊溪山) 자좌(子坐)에 합부(合祔)되어 있다.


3. 문화류씨회관기


● 회관소재지 남해읍 아산리 350-13번지

● 회관건립일 1988년 8월 1일

● 건축방식   콘크리트조 슬래브 2층


회관기


1976년 12월 8일 남해읍 평현리(야촌) 533번지 25평 남해종친 회관이 준공되어 사용해 오다 문중의 중지로 종원들의 성금을 모아 남해읍 아산리(봉전) 350-13번지 대지 103평에 연건평 90평 2층 콘크리트조 슬래브 건물을 1988년 9월 8일 준공하여 옮겨 남해종친 회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유아남해종문(惟我南海宗門)이 입남 후 역년(歷年) 500여년을 유지(維持)하여 오면서 숭조목종(崇祖睦宗)의 종의(宗誼)를 발휘하고 후손의 발전을 위하여 1988년 전 종원의 단합된 정성을 모아 현 위치에 재실 겸 회관을 건립하게 이르렀다.







전주이씨 회안대군파

全州李氏 懷安大君派 李花齋와  남해군 문중회관


● 재실소재지   남해읍 야촌리

● 재실건립일   1992년

● 건축방식     이화재(李花齋) 콘크리트조 스레이트

● 봉안선조     입남조 이하 13위

● 입남조     

● 입남시기

● 시향일


1. 재실기

재실기가 없어 ****년 &월 &일 구입하여 문중회관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2. 문중의 역사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하여 신라 문성왕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 후 대대로 신라시대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인 이안사(李安社)는 대대로 전주에 살아온 호족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지주의 탐학을 규탄하자 지주가 군사를 휘둘러 보복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처 원나라 간동으로 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의 아들, 즉 시조의 22세손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등 52명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를 창건, 전주이씨의 종시조가 되었다.

1398년(태조 7) 8월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을 방원(芳遠:태종)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의 난, 또는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 하고 1400년(정종 2) 1월에 일어난 제2차 왕자의 난을 방간(芳幹)의 난 또는 박포(朴苞)의 난이라고도 한다. 태조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방우(芳雨)·방과(芳果:정종)·방원 방간 등 여섯 형제를 두었고,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와의 사이에 방번(芳蕃)과 방석(芳碩)을 두었다. 난의 발단은 태조의 후계자 책정에 있었다. 태조는 첫째부인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반발함에도 불구하고 총애하던 강씨 소생의 여덟 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한씨 소생 왕자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고, 특히 정몽주를 비롯한 개국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왕대비 안씨(安氏)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케 하는 등 조선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다. 더구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유신(儒臣)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왕실 권력의 기반인 사병(私兵)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방원은 한씨 소생 왕자들과 함께 1398년(무인년)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河崙)·이거이(李居易)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세자가 되었는데 이가 곧 정종(定宗)이다. 이후 정종과 그의 정비 정안왕후(定安王后) 사이에 소생이 없자,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과 방간은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싸였다. 이때 공신 책정문제로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방간을 충동질하여 1400년 1월 방원과 방간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이 싸움은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이후 지위가 확고해진 방원은 1400년(정종 2)마침내 세자로 책봉되고 같은 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太宗)이 되었다. 회안대군(懷安大君)은 1364년(공민왕 13)에 태어나 1421(세종 3)에 별세했고 이름은 방간(芳幹)으로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1392년(태조 1) 회안군(懷安君)에 봉군되었고, 1398년 회안공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황해도토산(兎山)에 유배 중인 1401년(태종 1) 회안대군에 봉해졌고 회안대군파의 파조이다.





진양정씨 첨정공파 오동 

晋陽鄭氏 宗親會館(오동)


● 회관소재지  남해읍 아산리(오동) 산19-1

● 회관건립일  1984년 11월

● 건축방식    콘크리트조 슬래브 1층

● 봉안선조    입남조 이하 7위

● 입남조      휘 확(確) 시조 휘 중공(仲恭)의 10세손

● 입남시기    1417년 성종2년 신묘

● 시향일      음 10월 6일


1. 회관기


오랫동안 문중의 숙원 사업으로 1984년 초에  숭조목종(崇祖睦宗)의 종의(宗誼)결의로 헌성금을 모아 입남조 배(配)의 묘 아래에 건립하여 종친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2.문중 역사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6촌장 중 한 사람인 자산진부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며, 그의 후대에서 정씨의 분관, 분파가 이루어졌다.

진양정씨는 동성동본이면서도 각각 시조를 달리하는 8개 파가 있어 흔히 진양(현재의 진주) 8정이라고들 일컫는다. 고려의 건국공신으로 문하 시중평장사를 지낸 정예(鄭藝)를 시조로 하는 충장공파(忠莊公派), 호장을 지낸 정자우(鄭子友)를 시조로 하는 은열공파(殷烈公派),   공대공파(恭戴公派)는고려 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 를 지낸 정장(鄭莊)을 시조로 한다. 첨정공파(僉政公派)는 고려 때 검정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을 시조이고,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낸 정온(鄭溫)을 시조로 하고 정헌(鄭櫶) 계통이 우곡공파(愚谷公派)이다. 어사공파(御史公派)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낸 정택(鄭澤)을 시조로 한다. 지후공파(祗侯公派)는  고려 때 지후를 지낸 정신(鄭侁)을 시조로 한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는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낸 정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한다

고려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정시양(鄭時陽), 병부상서를 역임한 정신열(鄭臣烈), 판도판서인 정임덕(鄭任德), 예의판서의 정유(鄭愈), 대제학을 지낸 정수(鄭需), 평장사를 지낸 정록, 찬성사를 지낸 정을보(鄭乙輔) 등이 있다.

공민왕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고,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목화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정천익(鄭天益)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상신 1명(그의 아들이 정지산(鄭之産)이다),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59명과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 등의 청백리를 배출해냈다.

조선 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정경세(鄭經世),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던 수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고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를 형성했다.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용(鄭起龍)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상주성 탈환, 정유재란 때의 성주, 초계, 의령성 탈환 전투에도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남해안을 방어하던 중 통영진중에서 숨졌다. 그의 묘는 남해군 남면 석교리 산산(蒜山)의 유좌(酉坐)에 있다. 조선조 태종조에 남해현을 설치하고 이웃 고을의 사족(士族)여덟 성씨를 뽑아 이곳에 살게 하고 그 중에서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이를 뽑아 훈도하게 할 때 공은 그 으뜸으로 뽑혀 선천(繕川) 난포(蘭浦)로부터 들어왔다. 남해현에 학문이 있고 왕화(王化)가 퍼지게 된 것은 실로 그의 힘이다. 그의 공인(恭人) 함안(咸安) 조(趙)씨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고 그 장남이 효충(孝忠)이고 차남이 효신(孝信)이고 모두 재덕과 문장으로 당세에 알려졌다고 한다. 회관 바로 위에는 함안 조씨 부인과 장남의 묘가 있다.






 


경주김씨 수은공파 경풍사(景楓祠) 차산종중 

慶州金氏 樹隱公派 景楓祠


● 재실소재지 남해읍 서변리 산 262번지

● 재실건립일 1992년 5월 31일

● 건축방식   목조와가

● 부속물     외삼문(崇華門)

● 봉안선조   입남조 이하 400위

● 입남조     휘 의손(義孫) 승사랑(氶仕郞) 수의부위(修義副尉) 시조 휘 알지(閼智)의 49                 세손

● 입남시기   1510년경

● 시향일     음력 10월 12일


1. 경풍사기(景楓祠記)


망운산의 정기는 연대봉 남록 풍계등(楓溪嶝)에게 집결하니 장엄한 입수자(入首者)요 수려한 남산은 백호의(白虎儀)며 봉안산(鳳鴈山) 원봉(園峰)으로 청룡위(靑龍位) 완연하다. 봉강산 봉황군은 전위(前衛)를 담당하며 강진해수구에다 창선도를 대하니 지리법규구비로다 입남조 모신 곳이 절승요지가 아닐소냐 입남조 휘(諱)는 의손(義孫) 자는 익신(翊信) 호는 둔암(遯庵)이신데 생은 1480년 경자(庚子)이시오 승사랑(氶仕郞) 수의부위(修義副尉)의 벼슬을 하셨다. 경주 김씨의 관조이신 라말 경순왕(敬順王) 제3자 휘 대보공 휘 명종(鳴鍾) 경주군 시(謚) 영분(永芬)공(公)으로부터 21세손이요 시조 대보공(大輔公) 알지(閼智)의 49세손이 되신다 공은 기상이 쾌활청아(快活淸雅) 지조가 굳건하시고 언행이 순신(純愼)하시었다 . 조선 중종 때 교수관으로 참여되시어 남해에 오셨다가 그 풍토의 미를 낙으로 삼으셔서 수류부반(遂留不返)하시고 차산리 곡내에서 후진 교도에 전이기임(專以己任)하셨기에 향리화지(鄕里化之)라 개모(皆慕) 흠앙(欽仰)하시더라 슬하에 4남 1녀 하니 장남은 전(銓)이요 차남 영(鍈)의 후손은 남향 양지에 거하고 3남 순(錞)은 한양 김씨의 관조이다. 4남 균(均)은 예성사정(禮賓寺正)의 벼슬을 하셨고 외손은 임란 시에 유공하였던 통제사 정기룡(鄭起龍) 장군이다.

우리 김씨 시조 대보공이 탈해왕(脫解王) 9년 서기65년 을해(乙亥) 3월 서일(瑞日) 시림(始林)에서 탄강하신 후 7세손 미추왕(味雛王)으로부터 56대 경순왕까지 38왕이 연하여 계승하시면서 전장(典章)과 관제를 바로잡고 화랑도를 일으켜 원대한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여 원흉복죄(元兇服罪)세대의 수치를 씻고 찬란한 불교문화예술을 창조하신 통일후기의 영화를 생각하면 원조에 대한 추모지념(追慕之念이)이 간절하다. 여조대(麗朝代)에는 문벌 융성하여 누대를 이어 문무현상이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어 국사를 빛내니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인종조에 등제 하신 명암(明庵) 공(公) 휘(諱) 인경(仁鏡) 관(官)이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 평장사 수문전 대학사 태자소전 증시(贈諡) 정숙(貞肅) 공(公)이신데 문무겸전 입상출사의 위대한 분이시다. 공의 현손인 휘 충한(冲漢) 자(字)가 통향(通鄕)이요 호는 수은(樹隱) 관이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義判書)이시다. 정포은(鄭圃隱) 이목은(李木隱) 길야은(吉冶隱) 민농은(閔農隱) 이도은(李陶隱)과 더불어 도의로 문유하시니 세칭 6은(六隱)이라 하셨다. 고려가 망하자 개성 만수산에 입산하니 후인이 두문동 72현이라 하셨다. 이태조가 누차 부름에도 굴하지 않고 남원 두곡(杜谷)에 피적하시여 기정충대절(은 6은과 병열하였다. 임종에 유계 박장분부입석(薄葬墳不立石)이라 묘 재 남원 백용곡이나 누경병화로 인해 실전 축단 치제하던 중 경두재(景杜齋)를 건립, 명암공과 함께 봉사한다. 태종원년에 증작 이조판서와 문민공(文閔公)의 시호를 내렸으나 유언에 따라 받지 않았다. 3남 1녀 하시니 장은 휘 자(滋)로 만경 현령이시고 차 휘 승(縄)이요. 담양 부사이셨고 계(季) 휘는 작(綽) 호는 남천(南川)이시다. 태종조 문과에 등제하시어 관이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이요 증자헌대부 공조판서이시다. 묘는 남원 주천면 고제봉(高帝峰) 무수동 정좌원(丁坐原)이요. 후손들이 묘하에 원천재(源川齋)를 건립하여 세세 봉사한다. 유 4남 1녀 하시니 장은 휘 급경(及經) 진사요 호는 남호(南湖) 입남조의 증조부되신다. 후손들이 차산리 곡내에 정거하므로 차산파(車山派)라 하고 차남 휘는 입경(入經) 진사요 호는 동계(東呇)이며 3남 휘는 직경(直經) 생원 호는 송헌선원파(松軒仙源派)이시고 4남 휘는 신경(信經) 진사 관이 승정원 좌승지 판서행평안감사(判書行平安監査) 호는 죽원(竹苑)이시며 서호파(西湖派)이시다. 위의 3파가 군 종친회를 구성하여 종친간의 화목과 부종(扶宗)사업을 위해 합심전력하고 있다.

우리 둔암공파 후손들이 번창하여 영화로우나 재실이 없어 적세(積世) 숙원이었던바 다행히 거년(去年) 종회 시 발의되어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건립비 조달을 위해 종원 호당(戶當) 십 만원으로 합의 지역별 책임위원에 위임시켰다. 다행히 종원 제위께서 위선사(爲先事)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열성이 지극하여 금년 세초(歲初)에 착공 5월 성록(盛綠)에 순조롭게 완공되니 경하지사가 아닐 수 없다. 종원제위(宗員諸位)의 정성과 특지가(特志家) 헌성금 임원들의 노고를 후세에 전하고저 한다. 특히 총무 두열(斗烈) 재무 성윤(性允) 현장감독 희은(熹殷)은 불고가사(不顧家事)하고 전심전력하였으니 그 정열은 종문의 마음에 길이 남으리로다. 근원 없는 물이 없고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어찌 조상의 얼을 잊을 수가 있으랴 시조로부터 같은 핏줄을 이어 받은 우리 후손들이 이 사당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아 축복받은 성손으로서의 근본정신을 자각하고 종헌을 준수하고 화목을 도모하여 후손들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힘쓸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2. 경주김씨 남해종친회관


● 회관소재지   남해읍 서변리 105번지

● 재실건립일   1997년 6월 29일

● 건축방식     콘크리트조 슬래브 3층


1. 재실기


오랫동안 종친들의 모임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숙원이었고 1997년 종의에 따라 회관 건립을 결의하고 종원들의 헌성금으로 1996년 10월 29일 착공하여 1997년 6월 29일 연건평 150평의 현대식 3층 건물의 완공을 보게 되었다.


진주 정씨  심천 군부대위쪽  정현철 총무 863 3807

晋州鄭氏 和軒公派 和軒齋


● 재실소재지   남해읍 심천리 1162번지

● 재실건립일   1972년 5월 10일

● 건축방식     목조 와가 14평

● 봉안선조    입남조 이하 6위

● 입남조      휘 결(潔) 호 화헌(和軒)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 입남시기    1453년(단종 계유년) 경

● 시향일      음력 10월 9일


1. 화헌재 기문 


망운산 국사봉 험준한 산이 높이 솟아 엎디어 유현(幽玄)한데 그 한 줄기가 앙청의 형국을 이루었으니 곧 사당(祠堂)의 바탕이 되는 구시골이고 이 넓은 지역이 진주 정씨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묘소이다. 우리 입남조는 휘(諱)가 결(潔)이시며 호가 화헌(和軒)이시다. 시조의 휘(諱)는 예(藝)이시며 고려조에서 벽상공신(壁上功臣)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지내시고 시호(諡號)가 영절(英節) 공(公)이신 분의 14세손이시다. 옛적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군신이 함께 화를 입고 충신이 말살되고 유배당할 때 남해에 들어오시어 숨어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입남한 뒤에 유유자적하시고 도연명을 스승 삼아 속세를 떠나 시례(詩禮)로서 옛날 가문의 착한 행실과 훌륭한 공적을 돈독(惇篤)히 지켜 옛날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 내려오시니 조상의 음덕이 막중하다. 그러므로 발영후성(發榮厚盛)하여 헤아릴 수 없이 빛남은 여러 해 동안 선영(先靈)을 추봉(椎奉)한 때문이며 실지로 상도(常道)를 굳게 지켜온 성품 때문이다. 그렇기에 온 나라 안의 후손들이 모여서 그 정성을 다하여 좋은 자리를 골라 선산 아래 쪽 남쪽에 재사를 건립하여 화헌재라 하니 그 이름인 즉 화헌(和軒) 할아버지의 아호를 따온 것이니 천성이 화유(和柔)하고 기우(器宇)가 헌앙(軒昻)한 까닭이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기를 이름 함이다. 후손들이 모두 추원경모(追遠敬慕)하는 정성을 다하여 우리 문중의 숙원 사업을 마쳤다. 하나 재실의 아름다움이 끝이리오. 달리 할 일이 있으니 조상의 뜻을 헤아려 우리 집안이 돈후(惇厚)하고 화목함을 잃지 않고 충효의 도리를 강구(講究)하고 예절을 닦아 모두 현인, 달사(達士)가 되어 이 재실에 모이면 빛날 것이니 재실 건립의 공사 또한 양양(洋洋)할 것이다. 재천의 영령(英靈)께서 당상(堂上)에 강림하시어 나의 후손이 있구나 하시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원컨대 우리 종족(宗族)들은 다 같이 덕을 닦아 영원히 선조에 누를 끼치지 않으면 이 재실이 길이 보존될 것이니 어찌 우리 가문이 크게 번창함을 얻지 않겠는가 재실이 낙성함에 문중 여러분이 나에게 재실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니 나 역시 공사에 참가한 사람이다. 문장이 서툴지마는 사양(辭讓)치 않고 소감(所感)의 일단(一端)을 피력하고 공사의 시말(始末)을 적어 첨종(僉宗)의 높은 뜻에 따른다.

갑인년(甲寅年) 1974년 중춘(仲春) 초(初) 길일(吉日)

화헌공(和軒公) 16세손  규완(圭 完) 근식(謹識)


2. 문중 역사


시조(始祖)의 휘는 예(藝), 호(號)는 백곡(栢谷)이며 시호(諡號)는 영절(英節)이다.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삼한통합(三韓統合)에 공(功)이 있어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고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효행(孝行)과 절의(節義)로 당세에 추중(推重)되고 세덕사(世德祠)에서 향사(享祀)한다. 중조(中祖) 일세(一世) 시양(時陽)은 호(號)가 송암(松岩)이요, 시(諡)는 문익(文翼)이라 고려문종(高麗文宗) 때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과 주국태사(柱國太師)를 지나고 진양전원(晋陽田園)에 돌아왔다. 2세손 유(裕)의 호는 학당(學堂)이요, 시호는 문간(文簡)이요, 3세손 수균(守均)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겸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5세손 홍단(洪旦)의 호는 절은(節隱)이요, 시호는 영밀(英密)이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으며, 6세손 안사(安社)는 호가 죽파(竹坡)요, 시호는 충무(忠武)이니 유주(幼主)를 보좌(補佐)하여 청천군(菁川君)에 봉(封)하였다. 7세손 수(需)의 호는 송죽당(松竹堂)이고, 시호는 문영(文英)이며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하였으며, 화헌공의 고조인 10세손 을보(乙輔)는 호가 면재(勉齋) 시호는 문량(文良)으로 충혜왕(忠惠王) 때 수성협모찬리공신(輸成協謀贊理功臣) 춘추관사상호군(春秋館事上護軍)을 지냈고 청천군(菁川君)에 봉(封)해 졌다. 13세손 이오(以吾)의 호는 교은(郊隱), 시호는 문정(文定)이고 세종조(世宗朝)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總制府事)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하륜(河崙)과 변계량(卞季良)과 더불어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編纂)하였고, 도동서원(道東書院)과 구암서원(龜岩書院) 세덕사(世德祠)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14세손 분(苯)의 호는 애일당(愛日堂)이고,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니 충장공파(忠莊公派) 파조(派祖)이다. 문종(文宗) 때에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에 오르고 단종계유(端宗癸酉)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화로(回路)에 낙안(落安)으로 안치(安置)되어 적소(謫所)에서  별세했다. 장릉충신단(莊陵忠臣壇)과 도동서원(道東書院)에 향사(享祀)하고 순조 갑자(純祖 甲子)에 정려(旌閭)와 부조묘(不祧廟)를 명하였다. 화헌공의 부친은 해남군수를 지낸 휘 성오(省吾)이고 조부는 휘는 신중(臣重)으로 증보부는 좌우참찬(左右參贊)을 지낸 휘 천덕(天德)이다. 단종 1453년 종형(從兄) 충장공이 참화를 입으므로 천성이 단아하였던 화헌공은 남해에서 은유자적하였다. 묘는 망운산하 구시골 술좌(戌坐)이며 배 정부인 전의(全義) 이씨이고 묘는 동영(仝塋)이고 아들은 은석(殷碩), 균(均), 수(壽)이다.



인동(옥산)장씨 황상파 천후재

仁同張氏 凰顙派 天後齋


● 재실소재지  남해읍 아산리 736-2번지   

● 재실건립일  1999년 1월 20일

● 건축방식    콘크리트조 와가

● 봉안선조    입남조외 28위

● 입남조      천핵(天翮)  시조의 25세손 자(字) 중거(重擧) 통정대부(通政大夫)

● 입남시기    미상

● 시향일      음력 10월 10일


1. 재실기


현재 건축 중인 관계로 자료가 없으나 종친 장희종 씨의 전언에 의하면 종회 결의를 거쳐 종원들의 헌성금 호당 40만원으로 재실 본당은 1998년 11월 9일 시공하여 1999년 1월 20일 완공하였으며 마당 포장 및 담장 축조 공사는 2002년 4월 1부터 동년 8월 24년 완공 하였다. 


2. 문중 역사


장씨의 기원은 확실한 문헌적 고증(考證)은 없으나 장씨의 각관(各貫) 성씨(姓氏)의 기원은 중국으로부터 도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각관 장씨 족보상에는 인물이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계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발해,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등 국가의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영조(英祖) 45년(1769) 동추공(同樞公) 장지학(張趾學)이 옥산장씨족보(玉山張氏族譜) 서문에서 문강공(文康公) 수록(手錄)에서 이렇게 말하였으나 이는 다만 들은 바를 기록하였을 뿐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또한 각처에서 기록한 바에 말하기를 중원(中原)의 대광공주(大光公主)가 우리나라에 나올 때 8학사(八學士)를 거느리고 왔는데 그 중의 장학사(張學士)가 있어서 우리나라의 장씨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역시 문자의 기록이 아니라 확실히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시조 삼중대광공(三重大匡公)께서 인동(仁同)의 옥산하(玉山下)에 조기(肇基)한 이후 천 여년을 내려오면서 그 후손이 현재 38대까지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있다. 삼중대광공 이전의 선대 조상은 몇 대(代)나 되는지 또는 어느 때 누구인지 휘(諱)와 관작(官爵)이 장문(張門)의 족보나 다른 문헌에 전해 오지 않으니 오직 족보상에 기록된 최상의 선조이신 고려 초 인동현(仁同縣)의 옥산(玉山) 땅에 처음 복거한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의 벼슬을 지낸 휘(諱) 금용부군(金用府君)이다. 삼중대광공을 시조로 모시고 인동(仁同)의 인의동(仁義洞)에 옥산사(玉山祠)를 세워 숭의묘(崇義廟)에 신위를 모시고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제향하고 있다. 장씨는 고려 중기부터 분파되기 시작하여 무려 25개 파로 분파되어 왔다. 인동향내 5개 파로 종파(宗派), 남산(南山), 진가(眞佳), 진평(眞坪) 황상(凰顙) 파가 본향을 지켜 왔으며 이밖에 20여 파가 분파 되어 전국에 살고 있다.

1978년 2월 1일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로 승격시키고 1983년 2월 15일 종전의 인동의 인의동과 황상동, 구평동을 합쳐서 인동동(仁同洞)으로 하였고  인동면은 신라 때부터 구미시로 병합될 때까지 약 천여 년 동안 관아의 소재지였다. 황상은 현재의 구미시 인동동에 편입된 동 이름이고 죽정(竹亭)은 파조의 호이다.

시조는 장금용으로 그는 태사공 장정필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의 벼슬을 지낸 휘(諱) 금용(金用) 부군(府君)으로 옥산부원군에 봉해 졌다. 옥산군에 봉해진 장백은 중조로 모시고 있다.

황상파는 시조의 18세손인 잠(潛)을 파조로 한다. 중종조에 유학자로 호는 죽정(竹亭), 16세(歲)에 인동향시(仁同鄕試)에서 수위(首位)로 합격하였으며 중종 신묘(辛卯)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고 정암(靜庵) 조선생(趙先生)의 문인으로 적소에서 종시 배종(終始陪從)하였고 성리학의 논리를 정립한 당대의 대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교유한 선비로 도덕과 학문이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유림이 현암서원(賢巖書院)을 세워 제향하고 있으며, 묘소는 구미시 인동 정산(鼎山)에 있다. 입남조는 생몰 연대가 명확하지 않고 후식(後拭), 후순(後巡), 후감(後堪), 후세(後勢)의 4남을 두었다. 그의 후손들은 아산소문중(牙山小門中)으로 불린다. 묘는 남해군 이동면 다정리 다천 용두산(龍頭山) 남쪽 기좌(己坐)이고 배(配) 숙부인 진양 정씨와 부좌(祔左)이다.



 


진양하씨 사직공파 봉강재 

         晋陽河氏 司直公派 鳳岡齋


● 재실소재지  남해읍 아산리(봉전) 280번지

● 재실건립일  1968년 5월 15일

● 건축방식    목조와가

● 부속물      외삼문(歸厚門) 봉강재 기념비 1기

● 봉안선조    입남조 이하 3위

● 입남조      현령 신(紳) 여조 사직(司直) 휘 진(珍)의 14세손

● 입남시기    1437년(세종19년 정사)

● 시향일      음력 10월 7일 외


1. 재실기


홍유아국가용흥(洪惟我國家龍興)에 무응홍림(茂膺鴻林)하고 지아장헌대왕(至我莊憲大王)하야 빈천문교(丕闡文敎)에 성덕(聖德)이 극배우천(克配于天)이라 왕약왈유자해현(王若曰惟玆海縣)이 벽재황원(僻在荒遠)에 맹속(氓俗)이 유어견문(狃於見聞)하야 미역귀순(未易歸淳)이라 영문무제신중유장재위기지가이교오수자(令文武諸臣中有長材偉器之可以敫五數者)어던 출재남해(出宰南海)하라 시(時)에 진주하공휘신지문신(晋州河公諱紳之文臣)으로 당기선위현령(當其選爲縣令)하니개관비이임중야(盖官卑而任重也)라 공(公)이 도현(到縣)에 수선건학궁숭예교(首先建學宮崇禮敎)하고 야치관위(冶治官衛)하야 이선왕망(以宣王網)하니 울연유고문옹치촉지풍(蔚然有古文翁治蜀之風)이라 어시(於是)에 현민(縣民)이 화지(化之)하야 여기하제주현(與幾下諸州縣)으로 상상하(相上下)라 과만(瓜滿)에 애호산지승(愛湖山之勝)과 기마어도지(棄麻漁稻之)요하야 잉가언(仍家焉)하니 자성(子姓)이 수세거위남해인(遂世居爲南海人)이라 금기문란심성(今其門欄甚盛)하야 다재준문학지사(多才초雋文學之士)하야 거현내자가천호이계야(居縣內者可千戶而計也)라 개문유성덕자(盖聞有盛德者)는 필음어후(必蔭於後)라 하니 태공지위여(殆公之謂歟)근저 경년병오(頃年丙午)에 공후손(公後孫)이 대개문회(大開門會)하여 상여위왈오조지입남해기유오백재이상미유재처지소(相與謂曰吾祖之入南海己踰五百載而尙未有齋處之所)하니 기어위선(其於爲先)에 가호(可乎)아 수상지우현북일궁지(遂相地于縣北一弓地)하야 건일옥자(建一屋子)하니 기침산과해(其枕山跨海)에 조망(眺望)이 심달활(甚暢豁)하고 풍경(風景)이 역가완야(亦可玩也)라 시개망운산일지여려이봉강(是蓋望雲山一枝餘麗而鳳岡)이 위기진산야(爲其鎭山也)라 수안기저왈봉강재(遂顔其楮曰鳳岡齋)라하니 어시(於是)에 제족(諸族)이 회어사자가이천향화(會於斯者可以薦香火)요가이강돈목고동서양실왈여재야(可以講敦睦故東西兩室曰如在也)오 강목야(講睦也)오 욕사후인(欲使後人)으로 신종이추원고문왈귀후(愼終而追遠故門曰歸厚)라 주고정원개정비(廚庫庭園皆整備)하니 심걸열야(甚傑閱也)라 안공지묘재장생촌부앙지원이필재어사자위기자사방래자도리균고야금세지춘여유금해행일조기재(按公之墓在長栍村負卬之原而必齋於斯者爲其自四方來者道里均故也今歲之春余有錦海行一造其齋)하니 재지성절이유년이제족인음여 우당중주반어여왈자아성족중일장로야청유이기문야 여시사이병혼이유종불능거야여입남해탄기 유향속지미견거인다순근각실**유상덕지풍의자기현송교택지원이입인심야원제공물이봉강지재(齋之成絻以踰年矣諸族人飮余于堂中酒半語余曰子我姓族中一長老也請有以記文也 余始辭以病昏而有終不能拒也余入南海嘆其 有鄕俗之美見居人多淳謹慤實**有尙德之風意者其縣公敎澤之遠而入人深也願諸公勿以鳳岡之齋)로 위구완구미이필유모호현령공화민지치준수유교불감헐망이우이시전지구자기손물체기교즉가지창가영원이봉강지봉장대명어남해이명호기가면재사재지역후손한철간기임(爲苟完苟美而必有慕乎縣令公化民之治遵守遺敎不敢忽忘而又以是傳之具子其孫勿替其敎則家之昌可永遠而鳳岡之鳳將大鳴於南海矣이鳴乎其加勉哉斯齋之役後孫漢澈幹其任)하고 경원봉조봉근동기역장부서자오필야주공궤자몽일야도료장옥현야(涇元鳳祚鳳根董其役掌簿書者五弼也主供饋者夢日也都料匠玉鉉也)문영남급제인출거자이성지이서이면색여기자재섭야(文泳南及諸人出巨貲以成之而書以面索余記者在涉也)오 계형야(桂炯也)러라.


2. 문중 역사


진양 하씨는 삼한시대부터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하여 온 사족(士族)이다.  그러나 상고(上古)의 세계(世系)는 역사의 변천과 병란과 영욕의 세월 속에 종사의 기록이 실전(失傳)이 되었으며, 고려 8대 임금이신 현종(1009~1031)때에 거란이 3차에 걸친 침입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를 당했을 때 살신성인으로 나라를 지키고 구하신 시랑 하공진(河拱辰) 선생과 고려 10대  정종 (1034-1046) 11대 문종(1046~1083) 때에 궁중에서 임금을 모시던 사직 벼슬의 하진(河珍) 선생이 계셨는데 이 두 분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와 사직공파(司直公派)로 두파로 나뉘어져 있다.

일천년에 가까운 종사(宗史)를 지닌 하문(河門)은 고려조와 조선조를 거치면서 거공명현(巨公明賢)과 충효절의(忠孝節義)가 면면히 이어져 왔다. 고려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임명되시고. 1377년(禑王4년)에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보국숭록대부 진천부원군(輸忠佐理功臣 重大匡輔國崇祿大夫 晉川府院君)에 봉해지신 하즙(河楫)선생. 또 홍건적을 물리치시고 二등 공신이 되셨으며 수충좌리공신 중대광보국 진산부원군(輸忠佐理功臣 重大匡輔國崇祿大夫 晉山府院君)에 봉해지신 하윤원(河允源)선생,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키고 두문동 72현인 병부상서(兵部尙書) 하자종(河自宗)선생. 그 중에서도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태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하륜(河崙)선생과 세종 때 명상(名相)이며 조선개국 후 500여 년 동안 청백리로 빛나는 157인 중의 한 사람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 하연(河演)선생이 있으며, 무신으로서 진서(陳書)와 진도(陳圖)를 편찬 하였으며 국방에 전념하여 나라를 지킨 양정공 하경복(河敬復)장군이 있다

또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장하(杖下)의 이슬로 사라진 백세청풍(百世淸風) 만고충절 (萬古忠節)의 충렬공 하위지 선생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하계선(河繼先)장군, 환성재 하락선생. 하공헌선생, 또 낙동강 연안의 마진 무계 안언전투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성주성 탈환작전 등 치열한 전투 때 마다 큰 공을 세운 합천선비 하혼(河渾)선생  임란공신 하응상(河應祥). 하운(河雲)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가 있으며 문신으로 가문을 빛내신 각재하항. 송정하수일. 태계하진.서악하정도.영무성하응도.겸재 하홍도 .설창 하철. 강계부사 하겸락. 창녕 계팔의 인물 사헌부지평 하석홍 선생 등 많은 인물이 있다. 하씨 문중은 국가에 충성하고 환로(宦路)에 진출하여 나라에 공이 많은 저성(著姓)이다.

입남조는 1414년에 태어나 세종 임자년(1433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입남후 1458년 별세하고 묘지는 남해읍 서면 대정리 장생촌(長栍村) 후산(後山) 71의 2번지 묘좌(卯坐)이고 배(配)숙인(淑人) 영천(永川) 이씨와 합봉이다.



성주이씨  문열공파 봉황재 

星州李氏 文烈公派  鳳凰齋와 남해군종친 회관(修睦堂)


● 재실소재지  남해읍 아산리(봉전)277-2번지

● 재실건립일  1983년 11월 17일

● 건축방식    목조와가

               종친회관 수목당(修睦堂) 콘크리트 슬래브 

● 부속물      외삼문(由正門)  비 2기(復禮堂李基斗숭종공덕비), 공사연혁비

● 봉안선조    입남조 외 1위(입남조 계순과 조카 세온)

● 입남조      부사직(副司直) 계순(季淳) 시조 휘 순유(純由) 중조 휘 장경(長庚)의 6세손                 세온(世溫)은 질(姪)

● 입남시기    1456년

● 시향일      음력 10월 11일, 13일


1.봉황재기(鳳凰齋記)


외외망운(巍巍望雲)의 맥을 이은 이곳 백조비상(白鳥飛翔)하고 귤유향(橘柚香) 그윽한 봉강 기슭에 익연한(翼然)한 재사가 있으니 이름하여 봉황재라 선조 부사직(副司直) 휘(諱) 계순(季淳)과 부사직(副司直) 휘 세온(世溫) 후손 양파 종족이 수재모공(蒐財募工)하여 시공십유일월(始工十有一月)에 근이완공(僅而完工)한 이래 십수재(十數載)에 재사는 퇴락(頽落)하고 문주주(門株柱)후폐(朽㾱)하여 목불인시(目不忍視)하더니 재일(在日) 종원 기두(基斗)씨의 종조숭종과 종족소목(宗族昭穆)과 유후지념(裕後之念)에 힘입어 봉황재 유정문(由正門)의 중수와 영은각(永恩閣) 덕후문(德厚門) 수목당(修睦堂)의 신영지사(新營之事)를 숙의할 새 개유이론(豈有異論)이겠는가 수이(遂而) 서기 1981년 춘(春)에 시공하여 1983년 동(冬)에 총공사비 일억 일천 이백 오십 삼만 원으로 종공하니 대역이 삼백 팔십 평이요 전 건평이 일백 평이며 재사가 범육영통간평좌(凡六楹通間平座)에 상하좌우(上下左右) 단청도 선명하다 수목당 철근양옥으로 골격이 견고하여 전동이 격식을 구비하여 그 장려함이 여일소시(如一所視)라 차효시공(此效是功)은 열선조(列先朝)의 적덕누인(積德累仁)과 문열무의(文烈武毅)와 석덕고행(碩德高行)과 순국충절(殉國忠節)의 숭고한 정신을 전승하여 명심능체(銘心能體)할지어다 제어준공이불승감격(際於竣工而不勝感激)하여 지문여우(之文如右)함과 동시 대역추진의 임원제종을 유후각석(遺後刻石)하여 영구 찬양하노라  

서기 1984년 3월 일

남해종친회 장회 회장 영두(永斗) 근식(謹識)

총무 재두(在斗) 위원 득민(得珉) 성민(晟玟) 정오(正午) 재규(在圭) 대규(大圭) 군호(君浩) 창휴(昌烋) 복생(福生) 채규(采圭)


2. 문중 역사



성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56대 경순왕조(927~935년)의 재상 휘(諱) 순유(純由)이고, 동생 돈유(敦由)와 더불어 쓰러져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이었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여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 사직을 보전하기 위한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공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 극신이라 고쳐 부르고 경산(지금의 성주읍 경산동)으로 옮겨 숨어 살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여 호장(戶長)을 삼으니 마의태자와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장이라고 하는 것은 향직의 우두머리로서, 고려 태조 때 신라시대 이래로 지방에 세력을 펼치고 있던 성주나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호장이나 부호장 등 향직을 준데서 비롯한다. 지방의 토호적의 존재로서 상당한 세력을 가진 호장으로서 시조는 지방의 자치를 했다 할 수 있다.

중시조(中始祖)는 휘(諱) 장경(長庚)이고 신라 경상(卿相) 휘 순유(純由)의 후손으로 휘 덕희(德禧)의 아들이다. 고려 23대 고종(1214~1259)때 꿈에 문창성(文昌星)이 경산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공의 출생한 까닭에 이름을 장경(長庚)이라 했다고 전해 온다.

장성함에 따라 도량과 재주가 매우 뛰어나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 하였으며 널리 학문에 정통하면서 공손하고 검소하며 사람들을 거느리는 격이 있었음으로 당시 관인들 까지도 존경하여 따르는 자가 많았다.

2세 휘 조년(兆年)이 문열공파(文烈公派) 파조이다.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 , 백화헌(百花軒)이고 시호 문열(文烈)이다. 성주 이씨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인맥을 형성한 문열공(文烈公)은 충혜왕(忠惠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라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12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 수차 원나라에 다녀왔다. 12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 안남서기(安南書記)가 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書郞)을 역임하였다. 1306년 비서승(書丞) 때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하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1343년에 별세하고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l수가 전한다. 시조 다정가(多情歌) 중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로 봄밤의 애상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수에 잠겨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루게 하고 있음을 상징하며 지금도 널리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의 아들 포(褒)는 삼중대광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은 서경부원수(西京副元帥)인 인입(仁立)이고 그의 아들은 제(濟)은 시호가 춤경무공(景武公) 순충좌명(純忠佐命)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태조친제(太祖親製) 교서(敎書)가 있으며 그 사본이 종친회관에 있다. 왕명에 의해 태조묘(太祖廟)에 배향되고 1420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입남조 계순(1426년-1510년)은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의 6세손으로 경무공(景武公) 제(濟)가 그의 조부이고 부는 봉정대부(奉靖大夫) 결성현감(結城縣監)이던 윤(潤)이다. 윤은 단종 조 사육신인 성삼문(成三問)과 가까운 혼척(婚戚)으로 화를 피하기 위해 일가친척과 함께 경남 단성(丹城)에 이거하고 재차 남해읍 차산리로 입남하였다. 그의 손자인 응(鷹)은 1592년 임란시 군자감(軍資監) 참봉(叅奉)으로 군민을 인솔하여 진주 선평(宣坪) 전투에 참전하였고, 증손인 장(章)이 남해읍 평현리로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양지마을과 음지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따라서 평현파라 불린다. 묘비문에 의하면 계순은 진양하씨 (晋陽河氏) 사직공파(司直公派) 입남조 하신(河紳)과 진양 정씨 첨정공파 입남조 정확(鄭確)이 함께 입남하여 향교를 창립하고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기강을 세워 예양(禮讓)으로 지도하여 향속(鄕俗)이 크게 변했다고 한다. 묘는 남해읍 평현리 산 75의 1 번지 축좌(丑坐)에 부인 장수(長水) 황씨와 쌍분이다.

부사직공 휘 세온(1443년-1498년) 자 극일(克一)은 문열공의 7세손이며 그의 숙부인 계순 과 함께 입남하였으며 아들 5형제 중 장남인 붕(鵬)은 남해 향교 건립 후 처음으로 성균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한 인물이다. 부친의 종모부(從母夫)인 사육신 성삼문이 화를 당하자 장차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용인에서 단성으로 옮겨오고 재차 남해 차산리로 이거하였고 그의 후손을 조산파(俎山派)로 부른다. 조산은 현재의 고현면 도마리를 말하고 이후 이곳으로 이거했다. 묘는 남해군 이동면 초양리 월구산(月鉤山) 임좌(壬坐)로 공이 별세 후 6년 뒤 별세한 배(配) 하동 정씨와 쌍분이다. 세온의 5자인 용(龍)과 그의 아들 진산(震山)과 진흥(震興) 부자 3인을 포함하여 8인을 삼동면 시문리(영지) 1203번지 성주 이씨 경무공파 재각에 시향하고 있고 용파로 불린다.      


3. 종친회관


수목당(修睦堂)

● 재실소재지   남해읍 아산리(봉전) 277-3번지

● 재실건립일   1983년 11월 17일

● 건축방식     콘크리트 슬래브조

 

회관기


오랫동안 재실 바로 앞의 건물을 이용하여 오다가 재실 신축 시 협소하고 쇄락했다는 종의에 따라 재실 신축과 동시에 종원들의 헌성금을 모아 1981년 시공하여 건평 30여 평으로 1983년 11월 17일 준공하였다.





김녕김씨회관 봉전

金寧金氏 南海宗親會館


● 재실소재지  남해읍 아산리 346번지

● 재실건립일   1996년

● 건축방식   벽돌콘크리트 슬래브조 3층


1.회관 연혁( 金寧 金公 玉山 京玉 功德碑)


공의 함(啣)은 경옥(京玉)이요 호(號)는 옥산(玉山)이며 김녕(金寧) 김씨(金氏) 김녕군(金寧君) 시흥 (時興) 공(公)의 9세손인 충의공(忠毅公)의 후인 28세손 순주(順主)의 자(子)이심 공은 품성이 광원호매(廣遠豪邁)하여 세평 덕행이 적적(籍籍)하고 오문(吾門) 중 종친회 회관건립에 에 있어 부지 130여평의 거재(巨財)를 헌성하셨기에 문중에서 건평 52평의 2층 회관을 건립케 되었고 특히 부인 김해인 복선 여사의 후혜내조(厚惠內助)의 성의가 지대하였음 오종친은 공의 투철한 숭조정신에 감복 후손에게 귀감이 되고 단합된 김녕인의 산 교육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공적비를 세운다.

1996년 5월 8일

남해 김녕김씨 종친회장 윤수(閏水)

회관건립추진위원장 인생(仁生)  남해석재사 류동규(柳東圭) 증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경남지원 남해군분원  

 社團法人 全州李氏 大同宗約院 慶南支院 南海郡分院 864-6568


● 재실소재지   남해읍 남변리 249-2번지

● 재실건립일   1996년 1월 26일

● 건축방식     콘크리트조 슬래브 3층


1. 농은(農隱)전주(全州) 이공(李公)춘규(春圭) 기공비(紀功碑)


선원대향(璿源大鄕)을 전주로 하는 우리 이씨는 시조 사공공(司空公) 이래 창상(滄桑)한 세월에도 천년사를 빛내온 거족으로 천산일맥(千山一脉)이요 만지동근(萬枝同根)의 정신으로 숭조돈종(崇祖惇宗)하면서 세거해왔다. 특히 이 고장에도 동종 원근 제파의 선조들이 거금 400년 전부터 입남해하여 취락(聚落)하고 그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촌행(寸行)의 원근 부귀 빈천을 논하지 않고 일지지관으로 상호 면려하면서 만중 일심이 되면 이가 곧 일족 자치가 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연이 나 회동할 장소가 없어 종친들이 동좌할 때면 항상 우울해 하던 차에 여사(如斯)한 본분원의 정황을 전문한 춘규공(일명 金葉)께서 회관건립 택지 90평(시가 1억원 이상)을 조상 숭모와 종친간의 돈목을 위해 흔연히 헌성하였으므로 바로 여기에 현대적 위용을 구유(具有)한 회관의 영건을 보게된 것이다. 춘규공의 호는 농은인 바 태종대왕 제4왕자이신 성령(誠寧)대군의 제 19대손이요 증조의 휘는 상흥(相興)이며 조의 휘는 순도(淳道)요 고(考)의 휘 성순(性淳)의 장자로 서면 연죽리에서 기사년(己巳年 1919) 4월 29일 출생하니 천부적으로 성품이 성실 근면하였다. 연기(年旣) 40에 본군 읍내로 솔권이사(率眷移徙)하여서는 실(室) 곽씨부인과 화협하면서 근근자자(勤勤孶孶)로 위선(爲善)하고 자립자영하여 자수 성한 순진 무후한 농부라 원근 친척간은 물론이거니와 지방 사회 유지로부터 그 인품의 정실함을 숭앙받아 왔던 것이다. 특히 금반 이 헌성은 전체 본군분원원으로  하여금 감동 추종케 하였으니 진실로 장재(壯哉)라 동종제파종현의 정성을 결집 회관준공식일을 기하여 천세유방코자 여기에 편석전공(片石鎸功)하는 것이다.

  병자년(1996) 4월 일 견립입 수(竪)

전주이씨 남해분원원 일동


2.회관 연혁


1975년 10월 15일 남해읍 제일예식장에서 종친 60여 명이 참석하여 창립 총회가 열렸다. 이날 총회에서 초대 분원장에 성녕대군 20대손 백두(白斗)씨가 만장일치로 선임되고 임원진을 구성함으로서 탄생했다. 2955년 준선(俊善), 기숙(基淑)씨가 주축이 되어 암해종친회를 구성하고 돈종사업을 주도했다. 군내 이동면 용문사 별당에 조선 철종이 내린 전패(殿牌)와연(輦)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으로 보존에 위기를 맞자 1955년 준선 씨의 집 후방 가건물에 모셔 오다가 금산(錦山)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기단 선유추념각(墠壝追念閣)에 봉안했다. 태조가 100일 기도 후 신령의 감응으로 조선을 창건했다는 기도처의 석굴과 토담을 보존하고 이곳에서 탄신 다례회와 산신제를 매년 거행하고 있다.  이러한 성지가 숭조정신의 중심축을 이루고 분원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현재 무림군파 19대손 종수(宗秀)씨가 2006년 4월 12일부터 제7대 분원장으로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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